서유기 1 - 돌 원숭이 손오공 문지 푸른 문학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김종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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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자랑스러운 책 읽기는 은하영웅전설 완독과 서유기 완독이다. 

은하영웅전설은 스무 살 때 절친의 매우 강력한 권유가 있은 지 20년만에 읽은 책이었고, 

영화가 개봉된다니 반갑다. 양웬리의 캐릭터 이외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책이다. 

일본 만화책 <쿠니미츠의 政>처럼 보여주려는 주제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편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유기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즐독하는 한 젊은 작가가 극력 추천해서 읽게 되었다. 

내 가벼운 귀는 독서에 도움이 된다. 

서유기 10권은 내 인생책이 되었다. 

수백년 동안 집단창작했던 오래된 이야기를 괴테 같은 괴력의 작가 오승은이 독창적으로 재창조했고,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여러 텍스트와의 전쟁에서 정본으로 살아남았다는 점과, 

예전에 읽으려고 했던 이탁오가 깊이 관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탁오의 책을 자꾸 미뤄뒀는데 <서유기>를 읽고 나서 읽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분서>는 1권만 사뒀는데 이제 2권도 구해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그렇게도 비난했던 작품과 극작 기법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이보다 통쾌하게 걷어찬 오승은 서유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고향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손오공을 위시한 진보적이고 건강한 민중이 툭하면 여래부처와 관세음보살을 소환해 문제를 해결하고 멈출 수 없는 독설과 조롱은 도무지 성역이 없다. 불교철학과 도교철학의 본의가 건강한 민중성과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작품 중 서유기보다 강력한 것은 못 보았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정치와 역사를 끌고 왔던 독서인층과 기득권, 권력자들을 삼장-국왕-관리-각종 기득권층 덩어리로 묶어 '위대한 서천행'에서 나름대로의 구실을 인정하고 있기에 서유기는 당대의 모든 계급과 주체를 망라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조리 성장한다. 


서유기가 다른 성장소설에 비해 매우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부분은 '모든 것의 성장'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도가 한 자 커지면 마는 열 자 커진다"는 서유기 퀘스트의 작동 원리는 요괴도 성장하고 문제도 성장한다는 점을 아주 잘 표현했다. 우리가 읽은 대부분의 성장소설은 주인공만 성장하거나 일부분만 성장하는 데 비해, 서유기는 악도 성장한다. 점점 고도의 스테이지로 옮기며 투쟁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전자오락 게임을 연상시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서유기의 플롯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여러 작품들은 서유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적인 토양이 서유기를 철저히 배격하는 방식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서유기가 나의 인생독서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제까지의 독서흐름에서 잡히지 않았던 매우 넓고 역동적인 공간에 나는 드디어 로그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기는 그 공간의 인증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서유기와 인사는 했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지고 볶고 우려먹고 해야겠다. 



"젊으신 도련님이라 세상일에 철이 덜 드셨군! 도둑질하는 놈이 밝은 대낮에 손대는 것을 어디서 보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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