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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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나는 너무 착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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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 방청기


패배한 열망과, 찢겨진 오시리스의 살갗이 재생한 작가 김연수



<김연수 신작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생활을 낱낱이 저격당한 소설가 지망생의 푸념과 문예과 수시에 합격하고 축사를 기대하는 고3수험생의 메시지, 문예창작과에서 습작하는 친구들의 열망과 소소한 호기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9일 혜화동에 있는 극단 연우소극장에서는 예스24와 문학동네가 공동기획한 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을 듣기 위해 4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김연수씨에 의하면 20대에는 열망이란 열망은 온갖 총집합한 나날이었으며 패배를 거듭한 끝에 빅뱅이 일어난 자리에서 작가 김연수가 태어났다고 했다. 열망의 화법이 귀에 들어온다. 철저히 파괴된 열망일수록 응어리는 단단해진다. 이집트의 오래된 신 오시리스처럼 낱낱이 찢겨진 열망의 부분들이 회생하여 인생의 새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29일 혜화동 연우소극장 40여 명의 독자들이 독자와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우문현답과 현문우답

김연수 작가가 이번에 새로 건립한 왕국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홍보를 위한 자리인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소극장이라 무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작가는 배우처럼 많은 '즉흥극'을 보여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대담에서는 '우문현답'과 '현문우답'을 구분할 수 없는 문답이 오갔다. 

독자1 : 소설의 무목적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의미를 담으려 하는데 교수님은 도대체 의미가 뭐냐고 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작가 : 교수에게 소설을 보여주고 대답을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친한 친구에게 보여줘라. 그런데 그 친구도 별로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냥 좋은 대로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독자2 : 작중인물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무지 쌈빡하고 성깔 있다. 상황논리에 짓눌렸으면서도 벗어나려고 악다구니를 치는데, 혹시 작가한테도 덤벼드는 거 아닌가?
작가 : 나는 인물들과 싸우기보다는 스스로와 자주 싸우는 편이다. 이번 작품에도 그린 인물이 맘에 들지 않아 나와 많이 다퉜다.

독자3 : 라디오PD 지망생이다. 요즘 소설가, 시인들이 라디오나 방송을 많이 하더라. 목소리가 좋은데 나중에 나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 같이 해볼 생각 없나?
작가 : (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하고 귀에다 대고) 나중에 연락 해라. 꼭 듣고 싶었던 FM이 있었는데 김천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서울의 펜팔 친구가 TV 안테나를 높은 데다 걸어보라고 하더라. 새벽 두 시인데 음파를 확인해줄 사람이 없어서 밤새 360도 돌리다가 지쳐서 옥상에서 쓰러졌다. 별이 참 밝더라.

이런 식이다. 소극장에서 그것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마이크도 없이 작가와 독자들은 시덥잖은 이야기에서부터 진솔한 이야기, 섬뜩한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즐겼다. 하루는 유치원 정도밖에 안 된 딸내미가 자기 소설에서 가장 야한, 그러니까 베드신이 나오는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읽고 있길래 뺏아들었는데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그 부분'을 확 접더란다. 소설의 원 제목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인데 딸이 제목을 이렇게 하면 소설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서 차라리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며 진지하게 제안해 왔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소설의 제목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그러면서도 김연수다운 성찰이 묻어 있는 강연의 내용을 요약한다.





<김연수 작가가 그의 신작('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들고 집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러니까 유배기간에 첫문장을 발굴한 것이다



출판사에서 청탁이 들어오면 주로 쓰는 편이다. 특별히 써보겠다고 마음을 따로 먹지는 않는 편이다.

막연히 생각나는 것은 '버려진 상태'에 대해서이다. 누군가는 버려져서 어떤 곳에 허름하게 놓여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공교롭게도 독일 대사관에서 한국 작가를 대상으로 독일 문화 체험 비슷한 사업을 하는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독일 시골로 가서 3개월 살다 오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대사관에 갔더니 수표 500만원 어치의 유로화를 주면서 생활을 하고 주소와 연락처를 주었다. 밤베르크였다.

17세기 대저택에 무지 넓은 집이었다. 정원, 분수, 조각상, 싱글침대. 천정은 어찌나 높은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는 일이란 아침 먹고 설거지, 점심 먹고 설거지, 저녁 먹고 설거지였다. 그러다가 문득 누워서 생각했다.

17세기에 지어진 집이라면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 중에서 한두명은 자살도 했을 것이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도망도 쳤을 것이다.

온갖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온갖 생각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독일어를 모르는 관계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더라. 자기네들끼리 한참 웃다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알아듣기만 했다면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뭘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쓸 이유가 생긴 것이다.


라운지 소설(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을 생각했다. 즉 이 이야기 쓰고, 저 이야기 듣고 하는 거다. 처음부터 의도는 이야기를 있는 대로 털어내보자는 거였다.

쓰다 보면서 고민한 것은 어떻게 이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장편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숭고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포만감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감화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장편의 장치가 필요했다.



심심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미술관에 찾아갔다. 원래 무엇이든 처음부터 살피는 성격이라 처음 부분에 너무 공력을 많이 들였나 보다. 얼마 못가 지쳐서 소파에 길게 누워버렸다.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그보다 '가판대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나를 자극시키는 그 무언가는 '누드사진'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보던 설악산 입체사진이 기억이 나는데 그거랑 비슷했다. 그 사진이 마음을 계속 끌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것이 내 성격이다. 좀 설렁설렁한 편이어서, 이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이고, 저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인다. 이것을 한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당시의 고민이 '드디어' 해결됐다. 입체사진을 보는 순간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서로 합쳐야만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첫 문장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南洋) 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카우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사진이었다.”(예의 맨 처음 문장)

 


참고로 말하자면 이것은 후일담 소설이 전혀 아니다. 개인적 경험이 전혀 없다. 특히 백병원에서 기식한 적은 절대 없다. (웃음, 본문 제17장(131~140쪽 참조))







<김연수 작가가 자신의 신작 소설 중 일부를 낭독하고 있다 >

 


나의 소설속의 인물들은 절대고립에서 환상을 찾아 기어나왔다

 

94년도 등단작품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다. 신작을 쓸 당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간다’라는 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며 지금 이 순간에서 그 당시를 회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이 시점, 이런 사람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므로 현재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때의 시점에서 그런 시선은 갖기가 어려웠다. 프락치 교육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존재의 고립된 순간에 대한 체험이다. 성인들은 그때 순간을 본다. 그때 모든 변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마귀를 보았고, 부처님은 마구미를 보았다. 다들 환상을 많이 보고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사람들이 사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쯤은 전적으로 고립된 후의 세상을 맞닥뜨렸을 대 그때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세상의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해서만 써보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두 개의 사진, 아니 두 개의 포개진 사진

 

이 소설은 두 개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입체 누드 사진, ②노을 사진

강시우 프락치가 탈출해서 죽으려 했을 때 노을을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죽으려 하는데, 노을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소설은 두 개의 사진을 놓고 시작한다.


단순히 인물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다.

그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 수 있지만 저 사람도 역시 나처럼 즐거운 순간이 있을 거고 그런 관점을 살려서 소설을 썼다.

회고담 듣는 게 나는 제일 좋다. 그들은 지금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결국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진다. 그게 이야기의 효능이다.





<강연회가 끝난 후 즉석 사인회를 가졌다> 


[작가 인터뷰]프로소설가라고? 나는 너무 착한 소설가이다, 그게 싫다.

소설 쓸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 갈팡질팡할 때는 재능이라는 말을 믿는데, 재능을 확인해보려 하는 확인욕이 나에게도 있었다.

당시 직장은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6시에 퇴근을 하고 11월에는 5시에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7~8시가 되는데, 그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1시까지 자고, 일어나 2시까지 소설을 썼다.

내가 자발적으로 쓴 소설은 단 두 작품이다.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였다.

청탁없이 쓴 소설이다.

규칙적으로 계속 글을 쓰는데, 쓸쓸했다. 귀신이 나타나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귀신 환상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3시간에 15매 정도 쓰면 아무 문제가 없이 너무 해피했다. 15매 프린트하고 다음날 야외 벤치에 앉아서 1시간 동안 계속 고친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타이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계속 고치면 20매로 불어난다. 나의 행복도 불어난다.


중요한 것은 계속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상을 받거나 독자들이 많이 읽어주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독자들이야 이해하든 말든, 30대 초반에는 건방지게 많이 썼다. 나도 사전 찾아가면서 썼는데, 독자들도 사전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소설의 인물들과 다툰 적이 있나? 주인공을 내놓으라든지 쓸데없이 인생에 간섭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물들이 시비를 걸어온 적은 없었나?

-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 스스로와 다툰 적이 있다. 그려놓은 인물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번 소설만 해도 강시우를 몹쓸 녀석으로 그릴 생각이었는데, 결국 그 녀석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 점이 몹시 아쉽다. 그런 점에서는 프로소설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꼭 '프로소설가가 되어' 악당을 그리고 악당과 한판 멋지게 다퉈보고 싶다.



'프로소설가'라던데?

- 취중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가 그렇게 썼더라. 내가 그 말을 한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프로소설가라는 게 있다면 ‘함께 읽는’ 소설가가 프로가 아닐까.

지금은 약간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소설을 쓸 계획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소녀에게?

- 글쓰기는 ‘순간의 문제’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엄청난 열망이 있었다. 심지어 출판사로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무턱대고 원고를 건네받은 사람이 장석남이다. 등단하는 날 통화를 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열망을 품고 있을 때는 백전백패다. 백전백패해도 열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가. 그것이면 되는 거다.



원형을 재현한다는 구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 유령작가를 쓸 때만 해도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진실을 담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상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와 플로베르의 차이점이 있다.

플로베르가 있던 시절에는 정확한 작품으로 재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리얼리즘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우리 세대가 직면한 현실은 재현할 수 없는 일종의 판타지와 같다. 각자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 현재의 소설세계도 판타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정점에 있는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결국 ‘원본’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 나한테 세미나를 해준 선배들은 ‘진리가 있다’고 나를 세뇌시켰다. 물론 ‘맑스의 진리’였다. 1,2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매트릭스처럼 잠이 깨면 완전한 세계와 닿을 것만 같았다. 존재와 이미지가 분리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세상도 있고 나도 있고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진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의 소설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비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진리에 대해서 부역하지 않으니까.

밝히려고 해도 밝혀지지 않는 진리란 없고 남는 것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구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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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조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지음, 나익주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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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알라딘 서평이벤트에서 받은 책이며 알라딘과 예스24, 블로그에 함께 게재하였습니다. 동일한 글을 보시기를 원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이 점을 밝혀둡니다.



나는 정치적인 글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하지만 책이 내포하는 프레임이 워낙 정치적인지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오늘날 정치세계가 '수사(修辭, rhetoric)의 전쟁 시대'에서 '행간의 전쟁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 한일합방을 위한 담판 회담이 열릴 때의 일이다. 우리측 사절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마라톤 협상을 벌였다고 하는데, 시나리오는 이미 정해진 뒤였다.
회담이 끝나고 와서 국민들 앞에 하는 말, "불가불가(不可^不可)라, 나는 두 번이나 불가하다고 하였다."고 하여 둘러대지만, 정작 그 뜻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 허락하지 아니할 수 없다"였다. 이런 초보적인 수사에서도 프레임이랄 게 보이기는 한다지만, 로크리지 연구소가 주지하는 것은 '행간'을 이용해서 국면을 전환하는 지극히 전략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이다.

프레임에 대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우리의 구조화된 정신적 체계"라고 거창하게 정의했지만, 나는 간단히 '사고의 다발', '수사의 다발', '인지의 다발' 등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싶다. 프레임은 단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1.언어 이전의 관습과 관념 혹은 상식-2.언어적 표현과 상징, 행간 등 언어의 사정거리-3.반복, 후속조치, 몰아세우기 등 언어와 언어에 담긴 의도를 완성하는 일련의 후속조치"라고 해석되는데 개별적으로 분석했을 때 이러한 개념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개념들을 종합하거나 특정한 의도에 맞게 기획하는 관점이다.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똑같이 이야기하지만 그 효과가 전혀 다를 때가 있다. 한 사람은 '얼음덩어리'처럼 금방 녹아버릴 수사를 구사하지만, 다른 사람은 마치 '빙산의 일각'과 같다. 철저히 계산된 행위와 언어이며, 심지어 농담까지도 시나리오에 따른다. 정치판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느 나라를 방문하시든지 간에 그 나라의 정사에 대해서 소상히 들으실 수 있는데, 그것은 공자께서 요청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 국가가 공자께 정보를 제공한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온화하고 진정성이 있고 공경하고 검소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실 수 있으신 겁니다. 설령 공자께서 그런 정보를 요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청하는 것과는 다른 셈이지요."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  <논어 학이>


공자가 어느 나라에 가건 그 나라의 핵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일종의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는 천금의 무게가 담긴 것처럼 진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좋은 위치에 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가장 비난하는 지점은 바로 진보주의자들의 매너리즘과 '중도'에 대한 환상이다. 이것은 정동영과 손학규의 지지율이 왜 지지부진한가를 보여준다. 나는 '중도가 환상이다'는 이 책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중도는 존재하지만, 매우 쉽지 않은 길일 뿐이다.

천하의 국가를 고르게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높은 직위를 고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심지어 날선 칼을 밟아 지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중용은 이런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달하기 어렵다.
子曰 天下國家 可 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중용 2장>


이런 의미로 따졌을 때, 우리나라의 '중도'란 수학적으로 가운데 있는 점일 뿐이다. "중도통합신당"을 '프레임 전쟁'식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적으로 가운데점에 위치한 오합지졸의 정치인들이 급조한 정치집단." 이 책에서는 표층프레임과 심층프레임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빙산의 일각 중 드러난 부분이 표층프레임이며 수면에 담긴 부분이 심층프레임이다. 다만 '빙산'이 존재할 때에만 이 용어는 성립한다. 심층프레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통합신당은 무의미하다.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법'은 이를 낱낱이 증명한다. 이들은 비정규보호법에 담겨 있는 '수사'를 신경쓰느라, 이것을 인지하는 '반향'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프레임 실패라고 할 것까지도 없고, 아예 프레임이 없는 경우다. 이들이 말하는 '중도'라는 것은 환상일 뿐만 아니라 '반거충이'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비참하게 깨지는 캐릭터가 누구인가. 악한이나 악녀는 나름대로 사랑을 받는다. 천사표 캐릭터는 진부하기는 하지만 '상식'과 통한다. 이 중간에 있는 '반거충이 캐릭터'는 양쪽에서 상식적 지탄을 받는다.

내친 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해보자. 민노당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들은 프레임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들 스스로의 굴레가 너무 지리멸렬하다. 그리고 스타정치인 한두명이나 수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항상 수세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구사할 공간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진정성이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은 민노당을 외면하게 된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이 책을 살펴보다 보면 그들이 지목하는 화자가 '민주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화자로 설정한 사람들은 '진보주의적 유권자'들이다. 민주당의 진보세력들 역시 유권자 안에 들어간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과 '말꼬리 싸움'을 하다가, 그들이 쳐놓은 프레임에 빠져서 결국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논평한다. 연애를 하든 경쟁을 하든 상대의 페이스에 말리는 것은 '꾼'들이 피하는 일이다. 어떻게 되었든 분위기를 환기해서 자기쪽에 유리하게 전개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로 책에 소개된 민주당 오버마의 프레임 생성법을 실습겸 흉내를 내본다.

신자유주의자들과 일반적인 대기업이 추구하는 방식, 그리고 미국 등 강대국이 추구하는 방향은 '우연성'을 가중시킨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사다리를 치워버린 자유주의이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의 돈으로 돈을 벌고, 남의 마당에 폐기물을 버리고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단규가 말했다. "나는 우임금보다 치수를 더 잘 할 수 있소." 맹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의 치적이 아니라 오히려 과오요. 우임금이 치수는 물길을 잘 살폈기 때문에 사해의 구덩이로 물을 고루고루 퍼뜨린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한 방법은 물을 이웃나라로 돌려놓았으니 이는 물길을 거스른 처사이지요."
白圭曰:  ?丹之治水也愈於禹. ? 
孟子曰:  ?子過矣. 禹之治水, 水之道也. 是故禹以四海爲壑, 今吾子以?國爲壑. 水逆行?  <맹자 고자-하>


자연재해는 우연성이 가중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연성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양극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처럼 자산집중도가 점점 커지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르겠지만, 그 수치 아래 깔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은 재앙에 가깝다. 단순히 도의적으로 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에 심화됨에 따라 '우연성'을 가중되기 때문이다. 이 우연성에서 폭동이나 테러, 여러가지 범죄 등이 태어난다. 어차피 인간은 '소비하는 존재'이다. 소비의 지표가 되는 것이 '엔트로피'인데, 엔트로피 분수령에 이르러서는 활용 가능한 에너지가 고갈되고 예상 불가능한 재해가 찾아올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명확한 것은 그것이 결국 '우연성의 총량'이라는 것이다.
긴 길을 돌아서 왔는데, 새로운 것은 없는 책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재치 있는 분석을 보는 일은 유익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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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8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한개는 내꺼! :)

승주나무 2007-08-19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 님//완죤 땡큐~~

한잔의여유 2007-08-21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을 돌아보는데 서평중에서 가장 서평이 좋아서 추천합니다.^^

승주나무 2007-08-2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토 님//감사합니다. 이런 댓글 받으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제가 잘 써서라기보다는 좋게 읽어주셔서겠죠.. 반갑습니다.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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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이야기를 듣다
- 형식실험을 멈추지 않는 사회적 작가

독자는 어떤 방식으로 작가를 사랑하는가?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이야기한다는 순수주의 독자가 있는 반면, 작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열정형 독자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나타내는 궤적에 따라 좌우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황석영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겠지만 대단히 논쟁적이고 문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견해를 서슴지 않고 밝히며 텍스트 외적인 교유와 활약이 대단하다. 만약 텍스트 안팎에서 일정한 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그의 아우라를 보지 못한다면, 또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연관되는 지점을 목격하지 못한다면 황석영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내가 그를 만나기까지 가졌던 혐의점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바리데기를 통해 느꼈던 황석영에 대한 반감은 완숙한 작가가 가지는 일종의 매너리즘과 독자를 가르치듯 하는 교술적 특징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가 치열한 실험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외유'가 바로 소설 안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예스24에서 독자들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와 차세대 작가로 황석영과 은희경을 선택했는데 이 두 작가를 만나보니 '밥상'을 한상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은희경은 '밥'이고 황석영은 '반찬'이다. 밥은 밥상에서 물리적으로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반찬들이 모이는 통로이다. 그것이 전라도식 한정식 반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반찬'을 먹는다고 하기보다는 '밥'을 먹는다고 한다. 추상어로 말하자면 '내면'에 해당할 것이다. 항상 들여다보고 성찰하고, 같은 듯하지만 매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가 은희경의 '나와바리'쯤 될 것이다.
황석영은 작품의 이상을 확대하고 밖에서 이를 실현시키려는 야심찬 작가이다. 그의 '반찬'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 역시 궁극적으로 '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 작가의 다름이 나에게 '푸짐한 밥상'을 선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밥을 꼭꼭 씹어 먹고 반찬을 가리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서 독자들에게 '장길산'과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황석영 작가>



다음은 황석영 인터뷰


황석영은 실험중

바리데기를 쓰게 된 배경은?
☞ 손님 발표할 때 베를린 붕괴됐다. 이때 세계는 변한다는 사실 깨달았다.
세계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통해 드러나므로 문학적 형식 역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문학적 형식 실험을 하게 되었고 이 작품은 그러한 형식을 담아냈다.
서사를 우리 전통에 동아시아의 그릇에 담고 싶다. 손님 시도하다 형식적 만족이 되지 않았는데, 오래된 정원에서는 종래의 산문형식을 파괴하게 된다. 즉 1인칭과 3인칭으로 넘나드는 두 주인공이 시간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는 시간개념 역시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손님에서 최초로 보이는 데, 소설을 하나의 굿과 같은 양식에 담았다. 즉 소설가가 마치 영매가 되어 전쟁 당시의 혼을 불러들이고 전달하는 것이다.
형식 변화의 두 번째 양식이 바로 ‘심청’이다. 형식실험 세 번째 작품은 바리데기인데, 굿에 나오는 바리공주/칠공주/말명(맡이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공주가 7째로 태어나 버림을 받기도 하고, 부모가 병들어 죽어 사천수 끝에 가서 생명수를 따와서 부모를 살리는 뼈대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이야기틀은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서 1,500년도 넘게 내려온 전형적인 이야기틀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의 변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종래의 서사를 떠올려 보자. 주인공이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찾아간다. 가는 길의 묘사와 정경, 화초 등이 들어온다. 대문으로 들어가면 집안의 인물들이 마중을 나와 있고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이렇게 한참 설명을 하는 것이다. 현대시대에는 이러한 대서사가 감당하지 못한다.
서사의 디테일을 변화시켜서 ‘시+서사’라는 시적 서사를 이루고 싶다.
뚜르니에, 끌레지오, 마르께스가 만년에 모두 이런 글쓰기를 하고 있더라.
서사의 무게를 압축과 영상으로 장르 내에서 산문형식으로 변화를 시작한다.
마치 미디어가 변화하듯.
영상적인 세계, 앵글은 렌즈 안에 들어오는 것만 보여준다. 프레임 안에 들어온 것은 연출자가 선택했다는 것. 이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기서 새로운 이미지가 생기는데 이를 몽타주, 미장센이라고 부르더라.
영화의 그대로는 될 수 없지만 영화적인 서술은 생각해볼 만한 화두이다.

작품 ‘바리데기’가 말하고 있는 세계관은?
☞ 나는 21세기의 주제는 ‘이동과 조화’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탈식민지’라고 하나 나는 ‘신식민지’라고 본다.
때문에 무슬림, 서방세계의 갈등을 동시에 그렸고, 출간 직후 공교롭게도 아프간 납치됐다.
이 작품이 북한, 중국, 영국 등을 넘나들기 때문에 ‘글로벌한 작품’이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글로벌이라는 말은 미국 중심의 사고와 생활이 반영된 말이므로 나는 이 말을 싫어한다. 그 대신 인터내셔널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I am No global citizen, I am international citizen.
90년대 동구가 멸망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대두하는데, 이것은 신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용유연성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흐름이다.
소련의 서구화 이후에 데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가 대두되는데, 이는 노골적인 자본주의이다. 광주 사태 이전인 70년대에 런던에서 광주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노동자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를 시작해 50여 명이 숨진 것이다. 이것이 교양 있다는 유럽의 모습이었다. 레이건은 복지를 다 없앴다. 레이건과 데처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한편으로는 세계화, 이념의 밑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아시아 건너오면서 IMF가 터지는데, 이때부터 신자유주의가 재편성된다.
바리데기에는 이런 일련의 화두가 잠재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캠프 2일째 황석영이 강연을 위해 자리했다. 1일째에 이어 '후배작가' 백가흠 씨가 사회를 맡았다. 황석영은 자신의 글쓰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물리적 기반 위에 존재한다고 규정했다.>


작가 황석영의 형성과정

민족작가인데 어떻게 세계시민을 논하는지 궁금하다.
☞ 한반도와 나의 문제를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뜻임. 다만 공유할 것과 공유하지 못할 것이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동시성과 비동시성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작가라는 존재는 국경이나 민족이나 국가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이다.
내 조국은 한국어이다.
작가의 존재는 모국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만난 삶의 문제를 공유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모국어이므로.




<인생의 변화기>
- 제1변화
베트남 참전 후가 첫 변화이다.
고2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며,
당시 고교생은 현재의 대학생보다 더 성숙했던 것 같다.
책 많이 읽고 친구들과 토론하다가 점차 주변/내면 문제에 침잠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분단사회, 베트남 의미, 사회적 인식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제2변화
광주 80년 군부 이동 허락, 학살 인용의 진정한 주범이 주한미군 사령부라는 것을 알았고, 이는 또 하나의 나가 존재함을 뜻한다.
제3세계 문학제 관계로 베를린에 처음으로 초청되었을 때 거기에서 수많은 망명자를 만났다. 그들과 교유하면서 북(北)을 발견하고 이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 시기의 의미 있는 변화이다.

- 제3변화
베를린 망명 3개월 만에 장벽이 무너졌다. 젊은이들 모두 나와 포옹하고 샴페인 나눠마시며 모든 사람이 웃고 즐기는 현장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눈물 흘렸다. 모두 개개의 인간이었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여기서 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더불어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세계가 변화한다면 발상도 역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반문해 보았다. 여기서부터 산문실험이 시작된다.

- 제4변화
감옥 수감생활 5년만에 뒤늦게 ‘일상’을 발견했다.
나는 모험에는 매우 강한데 막상 손발이 묶이고 갇히면 견디지 못한다.
감옥에서는 괴롭도록 일상의 내공을 쌓았다.
무협지에도 보면 사부들이 처음부터 내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무하기 설거지 등 사소한 ‘일상’을 가르치는데, 나는 너무나 늦게 ‘일상’에 대해서 학습하게 되었다.
뒤늦게 50줄에 일상을 쌓는 과정에서 미치는 줄 알았다.
출소 후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문인은 “한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농을 던지더라.(웃음)
김수영이 낙동강 건너 서울로 돌아갔을 60년대 그에게 남는 것은 일상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것은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치열한 일상이었다. 김수영의 1960년대 작품들은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감상해야 할 것이다.
칼을 못 갈게 하니까 칼을 만드는 계획을 세운다.
운동 1시간 동안 쇳조각, 깡통, 연통의 한 부분을 며칠 걸려서 다듬어
조그만 조각을 떼어내 깔창에 숨긴다.
화장실 시멘트 바닥에 두고 칼을 만들었다.
치열한 일상이야말로 나의 문학을 키웠다.

- 제5변화
감옥에서 나왔을 때 비로소 동시적, 전체적 세계를 발견했다.
동아시아와 세계가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7~8년 동안 형식의 실험을 거치고 있는 과정이 바로 오늘날의 모습이다.


작가의 소설쓰기란?
☞ 소설을 나는 ‘물리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글은 어떻게 쓰느냐 내게 묻는다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글의 대부분을 궁둥이가 쓴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글쓰기의 8~90%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개똥폼 잡을 일이 아니다.
출근하듯 나도 소설을 쓰고, 쓰다가 코딱지도 후비고 그런다.
이러한 물질의 표출에서 깊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동안)
그 순간이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시점이다.




<황석영 작가는 베르베르 베르나르, 움베르토 코엘료 등의 작가들이 한국에서 열광적으로 인기를 얻는 현상을 거론하며 우리나라도 작가에 대한 가치 평가가 엄정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강연회가 끝난 후에 팬 사인회를 갖고 있다.>


한국의 문학, 한국의 독자


한국문학의 위기와 근대문학 종언에 대한 입장을 말해달라
☞ 서구에서는 문학이 교양의 척도이며 모든 시험은 독후감이다.
그런데 우리의 풍경은 어떤가.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할 때는 서로 ‘소설 쓰지 마라’라고 한다.
이를 본받아 아이들도 ‘소설 쓰지 마라’고 한다.
소설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학은 한 사회의 인간에 대한 가치 아닌가.
일본은 80년대 베트남전 이후 최고의 특수를 누리는데 80년대에 이미 거품 껴서 불경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소비가 워낙 왕성하던 끝물이었기 떄문에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90년대 와중에 거품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본문학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은 이때부터 베스트셀러 줄세우기를 시작한다.
베스트셀러 줄세우기 속에서 소질 있는 세대들은 별똥별처럼 사라졌고,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분이 완전히 없어졌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
베르베르는 현지에서는 문학집 목록에 이름 한줄 올릴 수 없는 작가다.
문학동네 사장과 프랑스 작가회의 전시장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젊은 작가, 프랑스문인협회 전, 현 회장.. 편집자 들이 와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활약하는 프랑스 작가를 소개해 달라고 질문을 받자 문학동네 사장이 ‘베르베르 베르나르’를 이야기하자 좌중에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묻고 물은 끝에 구석에 있던 편집자가 그 사람은 리옹 지방의 젊은 사람으로 가끔 지방 신문에 SF 꽁트를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직 대한민국만 이 사람의 소설이 엄청나게 많이 팔리는 것이다.
이것은 출판사, 기자가 다 엉망이라는 뜻이다.
일본이 그래서 망했다.
코엘료도 마찬가지다. 교양인들 사이에서 코엘료는 전혀 언급대상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가치평가가 매우 엄정하다. 대중 소설은 옐로 페이퍼라고 부른다.
우리도 이런 구분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이 구분을 하지 못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최고의 작가가 된 기현상이 생긴 것이다. 일본 문학의 지성은 이러한 현상에 간판을 모두 내닫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소설의 한계>
☞노신 이후로 중국근대문학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검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대만에서 나온 ‘오래된 정원’은 중국과 동일한 문자를 사용하지만,
중국에서는 대만 분량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유사의 번역은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토호 현상이 대단하다.
김훈 칼의 노래 역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중국의 장수를 안 좋게 묘사했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우리나라의 독자들>
☞노벨상을 탄 빈터 그라스를 만나러 갔다.
시골 구석에서 아줌마 15명을 세워 놓고
그 노인이 자기의 작품을 낭독하고 있더라.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한국 독자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2007년을 나는 한국문학의 중흥기라고 생각한다.
원로에서 신예에 이르기까지 근사한 문학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여러분 자신감을 좀 가지시라.

장길산 이전과 이후의 여성상
☞ 우리 시대의 남성은 죄가 많다. 나는 혜택받은 장남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와 겸상을 받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는 독상을 받았다. 지독한 가부장이었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은 다 이랬다. 여성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받으면 꽁무늬를 뺀다.
독방에 살명서 이제까지의 잘못들을 생각해 보았다.
‘독방의 수컷’이 생각났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내를 죽이고, 딸도 죽이고 수컷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게 일본근대문학의 모습이다.
남성적 억압과 갈등이 근대를 이뤘다. 문명에 대한 반성..
질서가 만들어낸 억압은 오래 되었다.
서구가 동아시아에 침투하는 것은 여자의 모습을 통해 그려냈다.
발전된 동아시아의 변화과정은 ‘심청’에 담았다.
세계적인 주변인 왕따 백성이 모여 사는 모습은 ‘바리데기’에서 그렸다.


통일에 대한 입장?
☞ 아프리카는 직접,간접적 영양실조로 300만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는 사료로만 20억 달러를 쓴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15조 넘은 지는 15년이 지났다.
북한 식량지원 5년치에 해당한다.
통일되지 않고 북한이 붕괴한다면 국제법상 누가 북한을 우리 것이라 할 것인가.


장길산 같은 작품 다시 쓸 수 있겠나
☞ 장길산처럼 긴 서사는 프로작가로서 가장 큰 훈련이었다. 도스또옙스끼도 작가수첩에 온통 그림 투성이던데 나도 매 장면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3/4가 자료 조사에 바쳐졌다. 이런 짓 다시는 하지 않는다. (웃음)


<황석영 작가는 노벨 문학상의 작가 권터 그라스가 모국에서 독자들에게 받는 냉대를 예로 들며 높은 수준의 많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신은 매우 행복한 작가라고 말했다. 강연회가 끝난 독자들과 가진 단체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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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7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7-08-1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십니다.. ㅋㅋ

뽀송이 2007-08-2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승주나무 2007-08-2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송이 님//네~ 저도 황석영 소설에 관심을 좀더 가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스24에서 주최한 2007 예스24 문학캠프에서 은희경을 만났다. 혹자는 은희경을 두고 브랜드라고도 하고 장르라고도 하는데, 나는 은희경을 '코드'라고 말하고 싶다. 은희경의 작품 세계는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데 코드가 맞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은희경을 읽는다는 게 다소 피곤할 수 있다. 은희경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내면', '관찰', '노력', '상식'이다. 다음날 만난 황석영이 사회적인 작가라면 은희경은 지극히 생활적이고 내면적인 작가이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일상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감정의 편린들, 그리고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의미'를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은희경에게 천재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소설가의 천성과 천부적 재능은 물론이고 소질 역시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은희경은 그것을 모두 일궈냈다. 아침에 출근하듯 소설을 쓰고 안절부절 못하는 작가의 직업병을 남보다 더 앓으며 만들어낸 언어는 생경하면서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가 왜 30대 중반에 등단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소설가로 등단하려 하지만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보거든, 나는 절대로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은희경을 보고 위안을 삼아도 좋다.




<예스24 주최로 열린 문학캠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은희경 작가. 후배 작가인 백가흠 작가(왼쪽)와 윤성희 작가가 진행을 맡았다.>



가족의 발견

- 가족이 소설에 어떻게 작용하나
☞ 모티브로 아주 많이 나온다. 특히 남편. 온갖 소설에 악역이 있는데 주변인의 항의가 많이 온다. 관찰을 제일 많이 하는 것이 가족이니까. 평상시 1순위는 소설이고 비상시 1순위는 가족인데, 그것은 가족이 평소에 양보를 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족은 가장 관심이 있고 소중한 것이다. 내가 책 팔아서 가족을 먹여살리므로 당당할 수 있다.


-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관련해 가족들의 민원은?
☞ 남편은 “또 나를 썼군. 다들 이런 사람인지 알겠군”하고 불평한다.
딸은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새의 선물에 나오는 주인공이 당시 12살이었는데, 내 딸도 12살이었다. 작품 중에 딸아이 또래가 방황하는 작품이 있는데, 친구들이 딸에게 “너 가출했었니?” 하는 말을 듣는 것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딸은 “공부 잘하고 귀엽고 예쁘게 써달라”고 주문했다.

- 소설 안에서 작가는 어떤 얼굴로 나오나?
☞ 내 소설은 주인공이 늘 둘이다. 1인 천진, 1인 조숙 패턴이 자주 나온다. 소설가로서 자질이 있다면 다중인격이 아닐까 한다. 주인공 여러 명에게 자기 성격을 부여했다.
작가인 나도 기초적인 독법은 어쩔 수 없다. 백가흠 소설가(진행)의 소설에는 주인공이 살인자, 흉악범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나도 역시 독자로서 작가를 의심하게 된다.

- 소설을 쓰는 재미는?
☞ 해보지 못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



<소설에서 가족을 많이 이용한다는 은희경 작가. 생계를 위해서 가족을 판다고 하여 무마하기는 하지만 딸내미의 압박은 이기기 어렵다고 한다.>





'똥'으로 데뷔한 작가가 될 뻔해 가슴 쓸어 내려

- 제목은 어떻게 쓰나?
☞ 어떤 거는 제목부터 생각난다.(짐작가는 다른 이들), 아예 제목부터 시작하는 작품이 있는데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이런 작품은 문구가 발상이 되어서 시작하게 된다. 어떤 거는 다 쓰고도 제목 짓기가 매우 힘들다. “새의 선물”의 경우는 가장 힘든 작품이었는데, 원래 제목은 ‘사랑의 변주곡’이었다. 책을 내려고 할 때 자끄 플레베의 ‘새의 선물’이라는 시를 읽었느데, 거기서 제목을 따왔다. 이번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도 릴케의 작품 ‘드위노의 비가’ 중에서 한 구절을 취한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응모작 중 ‘똥’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친구가 이렇게 충고했다. "만약 당선이 안 된다면 모르겠는데 당선이 된다면 평생 이미지가 남는다. 똥으로 데뷔한 작가!” 그렇게 해서 현진건의 제목인 ‘빈처’를 제안했고, 내가 수락했다.

- 소설을 쓰다가 따로 환기하거나 휴식하는 방법이 있나?
☞ 소설, 산문을 쓸 때 산문은 주로 밤에 쓰고 소설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까지 마치 직장에 출근해서 일하듯 한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집에서 써도 긴장해야 하니까 끼는 옷을 입는다. 집중력 2~3시간 되면 커피를 많이 마시는 편이다. 그리고 산책도 한다. 어떤 작가는 시간이 촉박하면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으려고 밥까지도 똑같이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무엇을 먹는지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날은 잠을 잘 때도 가동된 마음이 꺼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는 술을 마신다. 이것은 행복한 단계다.
처음 구상하고 작품 스토리를 위해 메모하고 고민하느데 누가 문을 안 열어주듯이 잘 안 나올 때가 있다. 이때가 가장 힘들다. (백가흠 작가 왈 "소설가 이기호는 축구복 입고 경기하듯 하더라")

- 소설 쓸 때의 핸디캡은 있나?
☞ 사소한 것도 신경 건드림. 그때는 시간 자체가 하나도 용납되지 않으므로 부모님과 잠깐 통화해도 얼른 끊으라고 한다. 특히 여성 작가의 경우 일상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워한다.
(윤성희 작가 역시 신경질적으로 변한다고 거들었다. "가족들이 눈치보며 TV도 안 보더라. 그때 나는(윤성희) 내가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아버지 TV도 못 보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타이트한 복장에 손을 자주 씻고 야구모자를 써보기도 하는 등 별짓 다한다.")
선배 작가들은 글쓸 때 긴장하는 습관을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고은 시인은 상 5개 차려놓고 5개의 시를 동시에 쓰기도 한다.
“일상에 갇히면 작가의 권능 사라지는 것 같아서 여행을 간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 영문 이니셜을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의 없다는 비판도 있는데..
☞ 책으로 보니까 어떤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이름을 매우 신중하게 짓는 편이다. 이름에 대해 의미를 많이 두므로 신중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많이 둠. 카프카의 K를 많이 빌려오는 편(성의 주인공) 날씨와 소설의 주인공 B는 ‘벨라비의 환상’에 나오는 이미지.
머리카락 손에 걸레.. 머리 자르는데 벌레 떨어짐. 알 수 없는 불안과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있기 있기 마련인데. 작가의 이미지를 가져와 써서 나에게 B는 독특한 이름이다.
지도 중독의 P는 구해야 할 값(수학)이므로 나에게는 그대로 이름과 같다.
문학은 언어를 이용하므로 모순적 장르이다. 언어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누구나 다 아는 언어를 새롭게 쓸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한다.
도시적인 것을 다룰 땐 모던한 이미지, 새의 선물은 1969년대 배경이므로 사설시조의 유장한 문체를 이용함.

- 정말 쓰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나?
☞ 쓰기 싫을 때는 안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자신이 기분좋고 행복해야 된다. 스스로에게 술을 산다. 술을 마시고 자신이 기분좋게 하고 쉬게 한 다음, 내일 나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백가흠과 윤성희 작가가 이런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받는다.

- 딸이 작가를 꿈꾼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자기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작가가 되려 했으나 되지 못한 긴 시간 동안 상당히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작가가 되고 나서 더욱 행복했다 작가의 길이 쉽지 않다는 데 대해서 경고를 드리고, 꿈을 일찍 찾은 것을 축하한다. 모범생이 되지 않도록 막으라. 모든 사람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이미 생각한 것 역시 뚫고 그 너머를 생각해야 하므로 괴팍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줘야 하고 엉뚱하거나 괴팍한 데 대해서 칭창해
주어야 한다.



<은희경 작가는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생활인과 작가

- 작가, 가족을 동시에 만족하는 방법은 없나?
☞ 두 가지 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글을 쓰려면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이기적 작품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평범한 가정 생활이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된다면 좋은 글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 때문에 좋은 작품을 희생한 동료 선후배 작가를 많이 보았는데, 단언컨대 좋은 작가가 되려면 좋은 가족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내 이름을 팔아먹어도 좋다. 이 점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방정식?
☞ 잘하는 일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을 적게 할 수 있다. 때문에 잘하는 일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하고 싶은 일과 관련해서 작가의 재능, 성실성, 자유 중 ‘자유’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작가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일치는 아니고 하기 싫은 게 너무 많지만..

- 등단 시점이 30대 중반이어서 깜짝 놀랐다. 오랜 무명 시절을 극복한 방법과, 작가 지망생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을 충고한다면?
☞ 나는 어려서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절실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생활에 떠밀려서 생활인이 되었고, 건전한 생활에 건전한 직장생활, 결혼 좋은 가족, 집도 장만, 한단계씩 숙제를 풀다 보니 30대 중반이 되었다.
이것이 내 인생인가 하는 자각이 들더라.
이렇게 산다면 남아 있는 하루하루를 메울 뿐이지 않은가.
나를 객관화하는 작업이었으므로 글을 썼으며 그것이 소설이다. 처음에는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고민했지만 독자의 공감을 얻어서 위안이 되었다. 등단이 앞섰다면 지금은 전혀 다른 작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절박하지 않았고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보편적인 인생으로 판단.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작가인데 나를 합리화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작가가 되지 못했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과 맥이 통하는데, 내 인생을 재편해 보려고 할 때의 의지가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쓸 말이 있을 때에라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관점 없으면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와 소설은 다르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어야 하며, 수많은 관점에 자기 관점을 보태야 한다. (도스또옙스끼, 천재는 수많은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어야 한다.)



<은희경 작가는 소설가가 되려 한다면 자신이 쓸 것을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독자가 자신의 소설의 한 대목을 낭송하는 것을 경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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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6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6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이 님의 페이퍼로 세번째 보이네요, 제게..
읽으라는 계시인가^^

승주나무 2007-08-16 20:22   좋아요 0 | URL
읽으세요.. 읽으세요.. 읽으세요..
주문을 외웠습니다^^

바리데기 2007-09-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퍼갑니다... 저도 오늘 읽기를 마쳤는데 우연히 이곳까지 왔어요...^^
출처는 밝힐게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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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을 만나러 가는 고속 버스 안에서 이 글을 쓴다. “제4회 예스24 문학기행”에 운 좋게 추첨된 것이다. 첫 날의 강사는 은희경 작가이고, 둘째 날 황석영을 만난다. 때문에 급히 그의 소설 ‘바리데기’를 읽는다.

황석영의 이 소설에는 잔잔한 대하가 흐르는 듯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고단한 길을 걸어간다. 그러니까 황석영의 소설 속에는 물과 길이 어우러져 흘러간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존경받는 중견작가로서의 완숙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은 기성 작가들이 보이는 일종의 굴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처럼 망치를 가지고 이것저것 깨부수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대학교수와 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축적형 철학자’가 있다. 내가 가는 길이 아무리 금태를 두른 듯 보이고, 존경과 선망을 받는 듯 보여도 나 자신에게는 가시밭길이자 굴곡이다. 특히 작가라면 자신의 아우라를 허물고 전혀 새로운 캐릭터로 변모를 거듭해야 하지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황석영은 ‘중견작가 혹은 원로작가’의 직함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야기는 ‘바리’라는 주인공의 태생에서부터 아기를 낳고 가족을 이룰 때까지의 경과를 다루고 있다. 바리가 살아온 행로는 고난의 길이었는데, 그것은 토속신앙에서 ‘바리’라는 인물이 만인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설 속에서 반영한 결과이다. 바리가 고난을 겪고 사람들을 만나는 행로는 사뭇 안정적이며 노련미 있다. 사건과 사건 간의 인과관계가 매우 세밀하며 상황 속에서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으면서도 문체 자체는 그야말로 청산유수처럼 쉽게 읽힌다.

그의 소설을 기대한 독자이거나 소설의 미학적이고 기법적 향취를 얻고자 하는 독자라면 일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이런 이유 때문에 불만이다. 즉 주인공의 운명과 운명에 걸쳐 있는 메시지는 깔끔히 정리돼 있었으며 담아야 할 이야기 오늘날의 핵심적인 담론들, 이에 대한 작가의 입장과 읽은 후에 독자가 얻게 되는 교훈까지도 작가는 모두 배려했다. 마치 소설을 통해 강의를 들을 느낌이랄까? 나에게 소설 읽기는 소설쓰기의 일환이며, 본질적으로 그것은 ‘모험’이다. 소설은 나에게 무지의 세계이며 모험이며 내가 차곡차곡 쌓아둔 ‘도덕의 성’을 공격하는 적병이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는 임종 시에 신비를 발휘한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리’라는 기제를 통해 죽음의 신성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그 살이 부패하고 구더기가 모든 살을 파먹은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리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이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대심문관’은 어떤가, 예수가 강림했지만 사제는 그를 처형하려 하고, 그를 거부한다. 이것은 독자가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은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 아쉽다. 그가 비록 형식적 완성을 이뤘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세계관은 침해당했다.
개인적으로 도스또옙스끼를 환기시켜 준 점은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얻은 것이다.
핵심 담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건드렸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가르쳤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환기시켜준 것은 아니다.
나는 사회운동가이자 지도층으로서의 황석영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황석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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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리뷰 반갑습니다 :)

승주나무 2007-08-15 14:29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이 님//어제 방금 도착했습니다. 정신없이 잠을 자다 이제야 깼네요. 저도 댓글 반갑습니다.

마늘빵 2007-08-1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잘 다녀오세요.

승주나무 2007-08-15 14:29   좋아요 0 | URL
아프 님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마노아 2007-08-13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근데 혀익적 완성이 뭐죠? 오타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단어인가 싶어 국어사전도 찾아봤지만..;;;)

승주나무 2007-08-15 14:30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형식적 완성인데.. 호텔에 이너넷이 별로 없어서 급하게 올리다 보니 ㅋㅋ 국어사전까지 찾아보셨군요.. 아예 단어를 만들어버릴까요 ^^

멜기세덱 2007-08-13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재밌겠당....추천추천!!!!

승주나무 2007-08-15 14:31   좋아요 0 | URL
멜기세덱 님//황석영 작가의 이야기까지 직접 들으면 더 재밌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