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습작 등을 통해 기량을 닦아도 시 만큼은 쉽사리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시적 기량은 평생을 통해 한정된 값 안에 있는 것이라 어떤 위대한 시인은 나이가 들어 젊을 때와는 다른 완성도를 가진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로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한다. 


김희준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올해 요절한 시인이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시인이다. 천상계와 신화와 현실의 핍진한 삶을 종횡무진하는 시어들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집을 펼치면 그녀의 천문에 흠뻑 빠지게 된다. 시란 이렇게나 신비롭고 곡진하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그 기본적인 인식으로 다시 돌아가 이 시대에 배고픈 시인이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구나, 함부로 절대 폄하될 일이 아니구가 싶어진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중


그녀의 시어들은 작위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고 매끄럽지 않다. 생경하고 신비롭고 형형하고 절절하다. 어떤 문장도 남용되지 않고 빈 틈이 없이 촘촘해서 몇 번이고 되뇌어도 역시 청신하다. 빛나는 나이에 생의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독법은 시어들을 예언적으로 만든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란 시어에서 그만 먹먹해져버린다. 자신과 함께 사물을 읽고 시를 읽고 썼던 이 빛나는 아이를 잃은 시인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아릿해진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김희준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중

마치 시인의 시를 묘사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정갈한 여백, 쉼표마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완성도 있는 시들을 써주었으면 하는 독자의 마음과 이 시인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시의 절창을 완결하여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수긍이 함께 한다. 그녀를 읽으면서도 그녀가 그립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어떤가. 그녀 또한 한때 수도사를 꿈꿨던 시인이다. 자신이 읽은 시들과 자신이 보내는 나날들과 또 그 자체로 시 같은 문장들이 어우러진 이 책 또한 절창이다.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꺾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한정원 <시와 산책>


호숫가에서 노인의 굽은 등을 보며 나이듦을 성찰하는 시인의 언어들이 하나하나 다 온전히 와닿아서 움찔했다. 구태여 서로의 사생활을 캐묻지 않고도 우정을 나누게 된 과일행상 아저씨와의 사연이 너무 반가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든 갑작스런 불행과 삶의 난관들을 타인의 것으로 박제된 것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그 스무 살의 무지에 대한 회상이 너무 낯익어서 놀랐다.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결국 시인으로 돌아온 저자의 삶의 행로의 모서리가 저절로 그려져 고개가 수그러졌다. 


시인으로 태어나 기꺼이 시를 쓴 젊은 그녀들에게 늦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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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23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와 산책은 평점이 꽤 높네요. 근데 책값이 좀 센데요?ㅋ

blanca 2020-12-23 17:02   좋아요 1 | URL
^^ 제가 이제서야 읽은 이유입니다. 책값이 비싸서 도서관에 몇 번이나 예약하고 상호대차 신청도 했었는데 코로나로 다 취소되어버리더라고요. 중고로도 기다려도 한 권도 안 나오고요. 그런데 읽어보니까 이건 소장하고 싶어지는 책이더라고요. --;; 책값이 요새 자꾸 올라요. 아주 얇은 책도 만사천 원을 훌쩍 넘어버려서 넘겨보다가 못 사게 되더라고요. 도서관도 닫고요.

scott 2020-12-24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 가격 보고 깜놀 !!ㅋ

이출판사가 출간하는 책들 끝말 잇기로 제목을 정한데요.
주르륵 책장에 꽂아두면 한문장이 되도록 ㅎㅎ

블랑카님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카드 한장 놓고 가여 ㅋㅋ

*MerryChristMas*
┏━━━┓행복한
┃※☆※ ┃메리크리스마스★
┗━━━┛

blanca 2020-12-24 13:19   좋아요 0 | URL
어머, 메리크리스마스 너무 예쁘네요. Scott님도 메리크리스마스^^

scott 2020-12-31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2021년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blanca 2020-12-31 19:33   좋아요 1 | URL
대체 이런 이쁜 이모티콘은 어떻게 만드는 거랍니까? scott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감사해요. 더 가열차게 읽고 쓰는 한 해가 되기를...

2021-01-02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3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세련된 것도 아니고 말수완이 좋은 것도 아닌데 은근한 매력이 있어서 끌리는 사람. 표현하는 것보다 내면에 충실하게 쌓인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이. 


우연히 만난 제임스  A. 미치너가 그랬다. 



















<소설>의 원제는 실제 'The Novel'이다. 각각 독일계 미국인 소설가 루카스 요더,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의 시점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노년에 접어든 작가 요더가 펜실베니아 독일인 거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 <그렌즐러 8부작>을 완성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가 독자의 호응을 얻기까지의 연대기와 출판사 안에서의 편집자의 전략적인 지원, 비평가의 혹평, 신진 소설가의 육성을 둘러싼 태피스트리다. 이는 각자의 시점을 중심으로 똑같은 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하며 하나의 읽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특히나 남자아이들과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며 그들의 세계에 전투적으로 들어가려했으나 거부당했던 경험이 있는 유대인 소녀 이본 마멜이 소위 나쁜 남자를 만나 허덕이다 결국 편집자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 편집자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투쟁사는 약간 도식적인 면이 있고 그녀의 열기, 적극성과 상치되는 가정 폭력에 대한 대처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이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이라며 그녀에게 그 꿈의 현장에서 날아오르기를 응원한 삼촌의 존재는 여자아이들이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입성할 때 어떤 보편의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제시해주고 독려해 줄 수 있는 멘토의 가치를 의미 있게 보여준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칠 때 제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의 아트레우스가의 계보도를 중심으로 인간의 희비극의 원형을 제시하고 인물들에 철저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모습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이미 다 제공된 셈이다. 이것이 비틀어지고 겹치고 쌓이며 태어난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어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쓰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연구하고 내면화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와 소설가 요더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을 선점한 자에 대한 시기의 마음,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거액의 기부금을 약속한 것에 대한 불평등한 역학, 그럼에도 남는 인간적인 끌림. 여기에는 실제 작가 미치너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소설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어느 한 단면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여러 중층의 감정을 통과해야 이 언뜻 적대적으로 보이는 관계의 색깔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투박하고 거친 부분들이 있다. 서사보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의욕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이 몰입을 방해한다기보다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나이가 무려 여든넷이었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야기는 다르게 읽힌다. 


이야기를 읽는 일마저 어떤 꿈을 꾸는 것마저 포기하고 싶어질 나이에 어떤 이야기를 다시 만들고 인물을 표현하고 이야기의 힘을,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 의지를 확인하는 건 도저히 말로 표현 못 다할 만큼 근사하고 빛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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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2 1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작품은 소설을 쓰고 싶은 지망생들이 필독 리스트에 꼭들어가는 작품이에요
우와 작가가 여든넷에 이런 작품을 썼다니 .....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나온다는 말 동감합니다
셰익스피어 희비극도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출발했죠.

허구를 창작한 픽션일지라도 그 허구속 이야기에 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줄수 있는 이야기를 고대하게 만드는 작품들,,,
끊임없이 펼쳐져있는 광활한 우주속을 헤메도 인생에 나침판이 되어주는 책한권만 있다면
삶에 큰 위로가 될것 같네요 ^@^

blanca 2020-12-22 16:18   좋아요 1 | URL
제임스 미치너의 연표를 읽고 나면 말 그대로 리스펙트가 나와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을 했더라고요. 누구나 정점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그게 사람들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삼십대 중반 정도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요즘 작가들 연표를 보면 다 제각각이에요. 이십대에는 천재였다가 완전 추락하는 사람도 있고요. 제임스 미치너 자서전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stella.K 2020-12-22 16: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고 참 좋아했는데 아직도 다시 못 읽고 있네요.
처음 읽었을 때는 되게 신선하고 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투박했나요?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겠네요.
이책말고 <작가는 왜 쓰는가>도 좋았는데.
중고샵에 나가면 항상 꽂혀 있던데 다음에 나가면 엎어와야겠습니다.^^

blanca 2020-12-23 10:21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이게 아주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게 문장 연결이나 서사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대목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또 잘 읽혀요.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재미와는 또다른 흡인력이에요. 참, 출판사에서 특별판으로 상하 합본으로 낸 게 9천원이면 살 수 있어 가성비가 좋더라고요. 저는 그걸로 구입했어요. 책도 참 예쁘고 활자도 잘 읽히고 강력 추천합니다.
 

 cr'eme de la cre'eme(크렘 드 라 크렘)은 최고 중의 최고로 이 용어의 개념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구현한 이야기로는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가 있다. 여학교에서 진 브로디 선생이 자신이 직접 선별한 학생들을 최고 중의 최고로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결점 많은 인간이 자신의 주관으로 얼마나 왜곡된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맹목에 빠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에 수록된 <크림>에서의 '크렘 드 라 크렘'은 조금 다른 용도로 쓰였다. 최고의 것이라는 정의 그 자체를 변용한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아이러니 없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를 의미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실패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아집에 사로잡혀 구현한 세속적인 최고의 인간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은 무용한 것으로 결론나지만 하루키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정수를 얻어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독려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확장된다. <크림>에서 '내'가  바람 맞은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돌아오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신비스러운 노인은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가는 시기니까."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재수 중인 열여덟 살의 청년이다. 그리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그 노인의 말처럼 비슬비슬 늘어져 있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소녀의 실없는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정도로 나는 유유자적한다. 그 초대는 신비로운 각성의 초입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의 관문에 독자를 데려간다. 이것은 작위와 비작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에 당도하는 과정에 언제나 설득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얻는 깨달음들은 항상 울림이 크다. 재즈 매니아답게 <찰리  파커플레이즈 보사노바>에는 죽은 찰리 파커가 보사노바를 녹음한 가상의 음반조차 이 안의 세계에서는 왠지 타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게 하루키다. 실재가 아닌 가상의 것들도 모두 마치 현실에 있는 것처럼 그럴 듯하다. 화자는 대학 시절 자신이 하나의 가상의 공간을 창조했고 그 공간을 뉴욕에서 실제로 자신이 통과했음을 알아차린다. 그것이 하나의 환각이라고 했을지라도 그가 통과한 세계가 변화시킨 자신의 성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서른네 살에 죽은 찰리 파커의 고백은 죽음의 과정을 음악의 프레이즈로 변환시킨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의 나이는 여전히 스물 언저리, 삼십대 중반을 맴돌지만 그들의 죽음과 삶, 기억에 대한 인식은 하루키가 지금 살아내고 있는 칠십대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여전히 죽음은 그를 덮치진 않았지만 이젠 손에 닿을 거리로 다가왔다. 그것이 더 많은 앎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모호함은 그것에 대한 알수없음의 무게를 한층 더 올리며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주인공들의 기억의 소환은 이렇게 삶을 거쳐 죽음에 가닿는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반면 상당히 경쾌한 하루키 자신의 작은 전기 같은 이야기다. 집 근처 진구 구장에 만년 패자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을 응원하며 수시로 써낸 시들을 자비 출판한 이야기는 언뜻 소설인지 진짜 자신의 얘기인지 아니면 트릭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설 정도로 생생하다. 정작 아무도 출판해 주지 않아 자비로 손수 펴낸 시집을 많이 남기지 않아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대목은 과연 하루키답다는 생각이 드는 위트다. 하루키가 마침내 세상에 소설가로 등장한 시점과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드디어 이십구 년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한 때가 겹치며 한데 어우러진다. 이것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에 빗대어 하루키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역사를 축약한 것 같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중


무언가 찡 하고 울리는 대목. 밑줄을 긋는다. 정말 살아보니 그렇다. 승리했다고 졌다고 그 시간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결국 모든 것들은 기억으로 수렴한다.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키도 지금의 거장이 된 모습보다 무명이었던 시절 진구 구장에서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야구에 관련한 시를 끄적이던 시절들을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드 더 비틀스>는 사실 비틀스와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방에서 '벽지처럼' 비틀즈가 흘러나왔던 시대에 일인칭 화자는 여자친구도 아니고 여자친구의 오빠와 어느날 우연히 만나 그에게 자살한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를 읽어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둘은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닌데 하나의 문학 작품을 통해 깊은 소통의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결국 둘이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흘러들어갔을 때에도 영구적인 잔향을 남긴다. 어쩌면 공허와 여백이 통과하는 이 엉뚱한 이야기는 그 시대의 어떤 분위기와 그 우연적인 만남들이 빚어낸 기억들을 소환하는 분위기로 전부를 말하는 소설 같기도 해서 여운이 짙다. 대단한 얘기를 한 소설도 아닌데 더없이 강렬한 그것은 하루키 특유의 강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표제작의 제목처럼 모조리 일인칭 단수의 남성들 화자의 이야기. 그것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닌 하루키를 통과하고 화자들의 기억을 통과해서 독자들에게 와닿는다. 모든 우연적 조응, 모순, 공백, 상실들은 결국 어떤 허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긍정하며 나아가게 한다. 그게 바로 하루키의 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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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15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하루키의 이 책을 읽었던 사람으로서, 블랑카 님의 이 리뷰가 하루키의 책보다 더 좋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덧붙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도 담아갑니다.

blanca 2020-12-15 17:30   좋아요 0 | URL
아...그건...고맙지만... 좀 과한....^^;; 아,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저는 이북으로 읽었는데 실물 책으로 볼 걸 좀 후회했어요. 추천합니다. 막 되게 좋다, 이런건 아니지만 꽤 괜찮아요. 잘 읽히고요.

테레사 2020-12-15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댓글에)그니까요ㅎ블랑카님은 도대체..

blanca 2020-12-15 17:31   좋아요 0 | URL
말줄임표 뒤는 제 마음대로 생각하겠습니다. ㅋㅋ

scott 2020-12-15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에 동감 2번.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장바구니 속으로 ~@

blanca 2020-12-15 17:32   좋아요 0 | URL
ㅋㅋ scott님 써주신 페이퍼 덕에 표제작은 완전 쏙 들어오더라고요. 역시 이미지화가 중요해요. ˝부끄러운 줄 알아요.˝ 이런식의 하루키 말투가 너무 좋아요. 원문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아쉽더라고요.

단발머리 2020-12-15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 신작을 읽지는 못 했지만, 다락방님에 동감 3번입니다.
블랑카님이 골라주신 책은 무조건 읽어야한다는 마음으로!!!

blanca 2020-12-15 17:32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로 하루 기분 좋게 마감합니다. 고마워요.^^

잠자냥 2020-12-15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림 중의 크림‘ 표현 보고 저도 <진 브로디 선생 전성기> 떠올렸어요. 거기서 따왔나 싶기도 ㅎㅎㅎㅎ
암튼 하루키 이 책을 보고 이런 리뷰를 쓰시다니 대단하세요. (다락방 님 동감 4번)

blanca 2020-12-15 19:50   좋아요 1 | URL
하루키가 아무래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요?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표현이 너무 신기하고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라로 2020-12-16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의 글솜씨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서 저도 이 책 읽어보지 못했지만 다락방 님 동감 5번!!!

blanca 2020-12-17 08:55   좋아요 0 | URL
라로님, 일지가 더 좋아요...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내밀함을 뚫고 누구나와 공명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에세이는 공명하고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글쓰기가 될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방식대로 나의 언어로 주절댄다고 모두가 들어주는 것은 아니니까.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나는 한가함을 누려도 괜찮다."고 말하는 시인이 쓴 산문을 읽다보면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라는 그의 이야기에 수긍하게 된다. 


고통의 와중에도 아름다운 것들을 완상하고 음미하는 순간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메리 올리버는 손수 그것들을 채집해서 우리의 손안에 놓아준다. 그와 함께 숲속으로 걸어들어가면 나오는 길에 우리는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된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코로나의 집콕 시대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립되어 고독을 느낀다. 밀도 있는 캐럴라인 냅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가 이런 와중에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웃을 수 있는 근육을 점차 잃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캐럴라인 냅은 어렵고 외로운 삶을 통과하며 차마 바깥으로 꺼내어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에 언어의 집을 대신 지어준다. 그것을 통과하며 눈은 맑아지고 마음은 더 유연해진다.


명랑한 은둔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점에서 어려운지를 듣는 일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셔윈 B. 눌랜드 <사람은 어떻게 나이드는가>



저자 눌랜드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로 죽음에 대한 고전을 이미 낸 바 있다. 이 책도 그에 못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중년의 나이에 나이듦의 무게에 짓눌릴 때 만나면 딱 좋을 책. 어쩔 수 없는 변화와 어찌할 수 있는 여지 사이의 간극에서 저자가 하는 얘기들은 우리가 어떻게 조금 더 현명하게 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전범이 되어준다. 


"언제나 회의적이되, 절대로 냉소적이지는 않아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남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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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과학 분야는 아무래도 코로나와 관련된 읽기였다. 전염병도 결국 인간의 일이라 과학은 사회학과 만난다. 관련된 책들은 전문서라기보다는 대중서에 더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지금 여기의 상황에 매몰되기보다 좀 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안목에서 코로나 사태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스티븐 존슨 <감염 도시>




2020년의 키워드는 듣기도 지겨운 코로나가 되겠지만 그와 더불어 확진자의 동선 추적을 둘러싼 역학조사도 있다. 전염병은 인간의 움직임의 경로에 따른 확산이 불가피한 만큼 그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1854년 런던에서 콜레라를 둘러싸고 이미 이와 유사한 역학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체계적인 도시 전염 지도와 사례 연구는 15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들여다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두 남자의 자신의 일에 대한 가없는 열정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낳은 해피엔딩은 지금 우리 코로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 스티븐 존슨은 흡사 스릴러 소설 같은 긴장감과 서사력으로 자칫 딱딱하기 쉬운 분야의 글에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재미다. 지금 이 시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은 덤으로 느껴질 만큼.





수잔 스콧, 크리스토퍼 던컨 <흑사병의 귀환>




영국의 역사학자와 동물학자가  삼백 년에 걸친 흑사병의 역사를 각종 기록들을 바탕으로 고찰한 책이다. 그 옛날에도 이미 전염병의 전파를 막기 위한 대규모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고 있었다는 발견도 흥미롭다. 세기를 건너뛰어 힘든 전염병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겹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밖에 없는 책.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의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들이 코로나에도 강한 면역력, 적응력을 보일지 궁금하다. 인류는 끊임없이 전염병과 싸워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얻고 읽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공명한다. 









맷 매카시 <슈퍼버그>



이것은 좀 다른 얘기다.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의 의사인 저자 맷 매카시는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변이된 박테리아 '슈퍼버그'와 싸우는 이야기는 환자와의 에피소드와 자신의 연구 과정을 마치 단편 소설들처럼 들려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남용하는 항생제들이 우리가 정말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어떻게 우리를 배신하게 되는지에 대한 사례는 의료 신기술과 각종 약제에 대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기본자세에 대한 고찰로 돌아가게 한다.


무엇보다 그가 올해 초 미국에서 코로나의 대규모 확산을 경고하며 검사 키트를 확보하고 절대 검사수를 늘려야 한다고 했을 때 출연진들이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시하던 방송으로 유명해졌다. 결국 그의 경고는 맞아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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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09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페이퍼 읽자마자 <슈퍼버그> 주문했습니다. <감염도시>는 이미 사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네..

blanca 2020-12-09 18:29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죄송해요.

2020-12-09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9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22598 2020-12-12 0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염도시에 John snow 이야기가 나오나 보네요. 대학원때 역학 수업 몇개 들어봤는데 매우 재밌는 학문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어요. snow가 그 당시 역학조사 했던 방법대로 모의실험하고 그랬거든요..그런데.....좀 깊게 들어가니 어렵더라고요 (전공자 수준도 아닌데도). 기회가 되면 감염도시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blanca 2020-12-12 10:58   좋아요 1 | URL
아, 정말 매력적인 학문이죠! 실제 경험해 보셨다니 부럽습니다. 오늘날 역학조사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답니다. 강력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