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습작 등을 통해 기량을 닦아도 시 만큼은 쉽사리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시적 기량은 평생을 통해 한정된 값 안에 있는 것이라 어떤 위대한 시인은 나이가 들어 젊을 때와는 다른 완성도를 가진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로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한다. 


김희준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올해 요절한 시인이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시인이다. 천상계와 신화와 현실의 핍진한 삶을 종횡무진하는 시어들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집을 펼치면 그녀의 천문에 흠뻑 빠지게 된다. 시란 이렇게나 신비롭고 곡진하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그 기본적인 인식으로 다시 돌아가 이 시대에 배고픈 시인이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구나, 함부로 절대 폄하될 일이 아니구가 싶어진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중


그녀의 시어들은 작위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고 매끄럽지 않다. 생경하고 신비롭고 형형하고 절절하다. 어떤 문장도 남용되지 않고 빈 틈이 없이 촘촘해서 몇 번이고 되뇌어도 역시 청신하다. 빛나는 나이에 생의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독법은 시어들을 예언적으로 만든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란 시어에서 그만 먹먹해져버린다. 자신과 함께 사물을 읽고 시를 읽고 썼던 이 빛나는 아이를 잃은 시인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아릿해진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김희준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중

마치 시인의 시를 묘사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정갈한 여백, 쉼표마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완성도 있는 시들을 써주었으면 하는 독자의 마음과 이 시인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시의 절창을 완결하여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수긍이 함께 한다. 그녀를 읽으면서도 그녀가 그립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어떤가. 그녀 또한 한때 수도사를 꿈꿨던 시인이다. 자신이 읽은 시들과 자신이 보내는 나날들과 또 그 자체로 시 같은 문장들이 어우러진 이 책 또한 절창이다.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꺾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한정원 <시와 산책>


호숫가에서 노인의 굽은 등을 보며 나이듦을 성찰하는 시인의 언어들이 하나하나 다 온전히 와닿아서 움찔했다. 구태여 서로의 사생활을 캐묻지 않고도 우정을 나누게 된 과일행상 아저씨와의 사연이 너무 반가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든 갑작스런 불행과 삶의 난관들을 타인의 것으로 박제된 것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그 스무 살의 무지에 대한 회상이 너무 낯익어서 놀랐다.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결국 시인으로 돌아온 저자의 삶의 행로의 모서리가 저절로 그려져 고개가 수그러졌다. 


시인으로 태어나 기꺼이 시를 쓴 젊은 그녀들에게 늦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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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23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와 산책은 평점이 꽤 높네요. 근데 책값이 좀 센데요?ㅋ

blanca 2020-12-23 17:02   좋아요 1 | URL
^^ 제가 이제서야 읽은 이유입니다. 책값이 비싸서 도서관에 몇 번이나 예약하고 상호대차 신청도 했었는데 코로나로 다 취소되어버리더라고요. 중고로도 기다려도 한 권도 안 나오고요. 그런데 읽어보니까 이건 소장하고 싶어지는 책이더라고요. --;; 책값이 요새 자꾸 올라요. 아주 얇은 책도 만사천 원을 훌쩍 넘어버려서 넘겨보다가 못 사게 되더라고요. 도서관도 닫고요.

scott 2020-12-24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 가격 보고 깜놀 !!ㅋ

이출판사가 출간하는 책들 끝말 잇기로 제목을 정한데요.
주르륵 책장에 꽂아두면 한문장이 되도록 ㅎㅎ

블랑카님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카드 한장 놓고 가여 ㅋㅋ

*MerryChristMas*
┏━━━┓행복한
┃※☆※ ┃메리크리스마스★
┗━━━┛

blanca 2020-12-24 13:19   좋아요 0 | URL
어머, 메리크리스마스 너무 예쁘네요. Scott님도 메리크리스마스^^

scott 2020-12-31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2021년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blanca 2020-12-31 19:33   좋아요 1 | URL
대체 이런 이쁜 이모티콘은 어떻게 만드는 거랍니까? scott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감사해요. 더 가열차게 읽고 쓰는 한 해가 되기를...

2021-01-02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3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