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세련된 것도 아니고 말수완이 좋은 것도 아닌데 은근한 매력이 있어서 끌리는 사람. 표현하는 것보다 내면에 충실하게 쌓인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이.
우연히 만난 제임스 A. 미치너가 그랬다.
<소설>의 원제는 실제 'The Novel'이다. 각각 독일계 미국인 소설가 루카스 요더,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의 시점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노년에 접어든 작가 요더가 펜실베니아 독일인 거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 <그렌즐러 8부작>을 완성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가 독자의 호응을 얻기까지의 연대기와 출판사 안에서의 편집자의 전략적인 지원, 비평가의 혹평, 신진 소설가의 육성을 둘러싼 태피스트리다. 이는 각자의 시점을 중심으로 똑같은 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하며 하나의 읽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특히나 남자아이들과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며 그들의 세계에 전투적으로 들어가려했으나 거부당했던 경험이 있는 유대인 소녀 이본 마멜이 소위 나쁜 남자를 만나 허덕이다 결국 편집자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 편집자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투쟁사는 약간 도식적인 면이 있고 그녀의 열기, 적극성과 상치되는 가정 폭력에 대한 대처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이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이라며 그녀에게 그 꿈의 현장에서 날아오르기를 응원한 삼촌의 존재는 여자아이들이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입성할 때 어떤 보편의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제시해주고 독려해 줄 수 있는 멘토의 가치를 의미 있게 보여준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칠 때 제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의 아트레우스가의 계보도를 중심으로 인간의 희비극의 원형을 제시하고 인물들에 철저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모습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이미 다 제공된 셈이다. 이것이 비틀어지고 겹치고 쌓이며 태어난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어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쓰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연구하고 내면화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와 소설가 요더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을 선점한 자에 대한 시기의 마음,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거액의 기부금을 약속한 것에 대한 불평등한 역학, 그럼에도 남는 인간적인 끌림. 여기에는 실제 작가 미치너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소설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어느 한 단면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여러 중층의 감정을 통과해야 이 언뜻 적대적으로 보이는 관계의 색깔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투박하고 거친 부분들이 있다. 서사보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의욕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이 몰입을 방해한다기보다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나이가 무려 여든넷이었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야기는 다르게 읽힌다.
이야기를 읽는 일마저 어떤 꿈을 꾸는 것마저 포기하고 싶어질 나이에 어떤 이야기를 다시 만들고 인물을 표현하고 이야기의 힘을,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 의지를 확인하는 건 도저히 말로 표현 못 다할 만큼 근사하고 빛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