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모래바람이 미친X   널뛰듯하는 날 힘겹게 폭풍의 언덕(정말이다)위 집에 아이를 끌고 밀며
힘겹게 당도하고 한참이나 지났는데
씩씩거리는 경비아저씨의 목소리. 
 

"아침에 집에 있었어요? 없었다구요? 근데 택배왔다는 얘기는 못들었어요?
 거 참 웃긴 놈이네."
아저씨는 화풀이를 할 건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애먼 택배기사들을 괴롭히는 재미에 한창 심취중이시다.
물론 그 무거운 책박스를 연락 한 마디 없이 경비실에 맡겨버린 그 사람도 한 소리 들을 만하긴 하지만. 

"저녁에 가지러 가면 안되나요??(소심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니 왜요!"  

이쯤되면 무섭다. 다시 그 황량한 언덕을 모래 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니 기다렸다는 듯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냉큼 박스를 치워버린다. 남편의 미니미는 무거운 택배 박스에 얼굴까지 가려진 엄마는 보이지 않고 그 추위 속에서도
이곳 저곳 다 참견하고 다 지체하며 속을 태운다. 심지어 이 기괴한 날씨 속에서도 그네를 열심히 타고 있는 한 언니를
발견하고는 놀이터로 줄달음쳐주신다. 솔직한 심정으로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입구에서 표정으로 다그치다 안 먹혀들어 다시 낑낑대며 상자를 이고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 봤지만
막무가내다. 저 언니는 할아버지가 재미나게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데 그 언니의 반의 반 줌이나 될까 말까한 자기는 왜 그네를 타서는 안되는지(사실 내가 춥고 힘들어서였으니)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구원투수의 등장.
그 언니. " 너 몇 살이야! 몇 살이야? 안되. 이거 타면 무서워!" 

그 한 마디에 바로 미니미는 놀라는 시늉까지 하며(능청은 ㅋㅋㅋ 평소 잘만 타면서) 되돌아온다.
까무잡잡 유쾌하게 생긴 아홉살의 그 언니는 할아버지의 허리에 매달려 콧소리로 과자를 사달라며
다리를 질질 끌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온다. 미니미는 언니가 맘에 들었는지 연신 되돌아 보고 좋아한다.
무엇보다 슈퍼가서 과자 사달라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반가웠나 보다.
더 웃긴 것은 폭풍의 언덕 아래받이에서 오버하며 미끄러지는 그 언니의 모션과 거의 동일한 시점에
미니미도 같이 넘어지며 더없이 즐거워하는 것.
한 마디로 가관이었지만 두 마디 더 얹으면 참 귀여운 풍경이었다. 

그 아이 덕분에 나의 아이와 실갱이를 벌이지 않아도 될 수 있어 좋았다.
둘째가 아니라 항상 그 연배의 미니미를 귀여해 주는 첫째가 어디서 뚝 떨어지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항상 언니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혼불이 왔다. 누군가 나에게 혼불을 구해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갔다
정말 기적처럼 혼불을 적당한 가격으로 만났다.
새 책이나 진배없는 상태에 안티 링클 팩까지 동봉해 준 그 센스에 감동받아 당장 수령확인을 했다. 

이제 나의 상반기 책 구입과 독서는 이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제발 그랬으면)
그 옆의 쿤데라의 <농담>과 보통의 <동물원에 가기>는 좀 뒤로 미루어 두고.
차근차근 깊게 젖어들며 그녀가 끌로 새기듯 엮어냈다는 이야기들에 묵주신공을 바치듯
짚어가고자 한다. 

잘 할 수 있을지 독서가 고행이 되지나 않을런지 우려도 되고.
하이드님 신간마실에서 자꾸 읽고 싶은 책들이 튀어나오니
괴롭고 그런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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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1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워더링 하이쯔에 사시는군요.^^
혼불~ 아직 읽을 준비가 안돼서 책구입도 못해요.
하지만 오래전에 KBS스페셜을 보고 언젠가는 꼭 읽고 말리라 다짐했어요.
구간은 글씨가 작아서 저는 읽기 힘들어요. 이젠 글씨 작은 책은 내겐 '쥐약'같아요.ㅜㅜ

blanca 2010-03-17 14:1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무슨 운명 같이 학교란 학교는 죄다 언덕. 집이란 집도 다 언덕입니다. KBS스페셜이 정말 대단했나봐요. 블로그마다 다 그 얘기가 있던데. 꼭 찾아 보고 싶어요. 안그래도 저는 벌써 ^^;;그래서 2009년도판으로 구했는데 너무 읽기 편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조정래샘 책들과는 달리 책 한 권의 분량이 적은 편에 속해서 되레 금방 읽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이드 2010-03-17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원에 가기는 아주 술술 넘어갈텐데.. 눈깜짝할 사이에 읽어버릴꺼에요. 읽으면서 막 페이퍼거리가 우수수 떨어질지도. 아, 이런거, 아 이런거. 하면서요.

그간 신간마실이 좀 모였으니, 내일 정도에는 페이퍼 쓸지도 모르겠네요. 서점도 다녀올꺼구요. 새로나온 푸엔테스의 책. 책 안 사는 와중에도 덥썩 샀던 책이에요. 그 책 정도면 블랑카님이 혹하실지도.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 (먼산)

전 이제 막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을 끝내고, 오늘은 안나 카레니나나 읽다가 자려고 합니다.


blanca 2010-03-17 14:19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을 신간마실만 보면 장바구니가 터질려고 합니다. 안나 카레니나 드뎌 시작하셨군요.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다 읽고 나면 심장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더라구요.(제가 과장이 심한 건 아시죠?ㅋㅋㅋ)

푸엔테스의 책이라구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하이드님 아니었으면 저한테 안기지 않았을 그 수많은 완소책들을 둘러보니(정말 하이드님은 지름신) 또 동할 것 같군요.

어제 <그녀에게 말하다>에서 출판디자이너 정병규 얘기를 읽으며 하이드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마쓰오카 세이코 얘기도 하고.

마녀고양이 2010-03-17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불,, 구입하셨군요. 전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지금 급히 읽을 책에 밀려서 당분간 포기인데. ㅠㅠ
여하간 책이 많이 쌓여있는거... 행복하지 않으세요?
혼불 읽고 리뷰 꼬옥~ 네?

blanca 2010-03-17 14:20   좋아요 0 | URL
근데 주르륵 열 권 꽂혀 있는 거 보면 괜히 해야 될 숙제 쌓여있는 것 같아 괜히 부담스러워집니다. 1권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 있어요. 지루하다는 평이 좀 있어서. 오히려 이게 책 값을 줄일 수 있는 편법일지도 모르겠어요. 당분간은 책을 사지 못할테니까요^^;;

기억의집 2010-03-17 19:32   좋아요 0 | URL
당분간 책을 사지 못할텐데요, 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마 블랑카님 손이 근질근질할걸요. 책주문도 가만보면 마약중독처럼 끊을 수 없나봐요. 전 진짜 안 사야지 책 사야지 했는데, 그래서 한 며칠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큰 건 저지른걸요. 정경화 40주년 기념박스세트로요!

흑흑 저야말로 미친X 지 뭐예요! 아무래도 중독치료 센터를 들어가던지 해야겠어요.

요즘은 택배 사고가 많아 경비실에 맡겨두라는 추세잖아요. 저의 애아빠는 알라딘이든 뭐든 무조건 경비실에 맡기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10권은 집앞까지 배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힘드셨겠어요!

마녀고양이 2010-03-18 09:22   좋아요 0 | URL
ㅋㄷㅋㄷ, 책 사기는 중독이라는 말씀 절대 공감합니다.
이상하단 말이예요, 도박, 술, 담배 이런 중독은 안 걸리는데... 커피와 책 구매 중독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중독은 보통 순간 충동 조절 실패라는데.. 에공. 그래도 이런 중독 한두개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것도 없다면, 인생을 무슨 재미로~ ^^

기억의집 2010-03-18 10:13   좋아요 0 | URL
하긴 그래요. 중독된 것이 책이 아니고 옷이였다면 아마 파산했을 거에요. 어제 학부모총회 있어서 옷 좀 사 입었는데 옷은 티쪼가리에 하나에 만원도 넘더라구요(좀 이쁜 티요!). 좀 비싼 책도 있긴하지요. 요 며칠 눈독 들이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건 3만원 후딱 넘어서 현재 망설이고 있어요. 사실 남들 눈에는 종이쪼가리일 뿐인데...... 왜 제 눈에는 책이 보물단지로 보이는지..이걸 콩깍지라고 하나봐요.

blanca 2010-03-1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커피와 책 중독 알라디너들의 공통점이 아닐까요? 그걸로 살아가는걸요. 그중독이 아님 다른 나쁜 중독들에 또 빠졌을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살아갑니다.^^

꿈꾸는섬 2010-03-2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불, 정말 좋겠어요. 저도 보고 싶은데 아직은......님 읽으신거 보면서 마음 동하면 저도 사서 볼거에요.^^

blanca 2010-03-23 22:12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저 2권까지 보고는 10권까지 읽을 자신이 없어졌었는데 지금 완전히 빠져서 마지막 세 권 아까워서 읽지도 못하고 있답니다. 정말 정말 아... 다 읽고 말씀드릴게요.^^;;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다음 날, 그 분의 마지막 길을 흐느끼며 배웅하듯 끄느름한 날씨 속에서
아이 손을 잡고 걷다 보니
낯선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얘는 말을 잘 하나요?
사물을 가리키면 그걸 알아차리나요? 
정확히 몇 개월입니까?

이런 조금 황당하고 직설적인 질문들.
그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어쩌면 손주중의 하나가 발달지연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곧잘 우리는 비슷한 누군가는 어떤지를 궁금해하며 위로도 받고
걱정도 더하고 그러면서 고민의 모서리를 다듬는다. 
 

몇 개월 후 가게 될 어린이집 탐방후 아이는 거기에 있겠다고 집에 안가겠다고 서럽게 울어댄다.
어린이집에 안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집에 있겠다고 우는 아이를 보니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벌써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는 건지, 엄마와의 시간이 만족스럽지 못해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거기에서 커다란 눈을 끔벅이던 귀연 제또래 남자애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집 앞 조그마한 미용실. 딸애의 한 줌도 안되는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예의 미용사 아주머니가 포상격으로 주던 사탕이 없자
황당해하며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고 사탕을 하나 사서 빨려 줬다.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받이 또 비슷한 연령의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얘는 누구를 닮았나요?
아빠를 닮았다구요? 내 딸도 아빠 판박인데.
그래서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안되도 왜 안되는지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고 그래야지, 어쩌겠어.
왜냐, 자식이니까.
내 딸은 이십대 후반이 되서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하더라구.
근데 왜 시집을 안가지?
이제 서른 네 살인데. 

저랑 동갑이네요! 

그러자 갑자기 시작되는 말
즈 앞으로 아파트도 있는데 말이야.   

아빠를 고대로 닮아 고집을 피울 그러나 이제는 조금 유순해졌으나
시집을 안 간다는 나랑 동갑의 아가씨가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야무지고 사랑스러울 것 같다.

집에 와서 안자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재워 놓고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조금 읽는다.
서른 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아넣고 자살했다는 그녀.
테드휴즈의 아내이기도 했던 그녀의 빛나던 소녀 시절 그 시적이고 찬란한 어구들을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다보면 또 맥락없이 프레이야님 서재에서 본 최명희의 그 명징하고 유리알 같은
문장들이 생각나 <혼불>을 구해야한다는 강박에 중고서점을 뒤지게 된다. 

기적처럼 갑자기 나타난 <혼불> 세트. 밀란 군데라의 <농담>도 보퉁의 <동물원에 가기>도
김혜리의 <그녀에게 말하다>도 아니 실비아의 일기도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절판되기 전에
법정스님의 <일기일회>도 읽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주문해 놓고 역설적으로 제발 판매자가
천천히 배송해 주기시를 기대하며 숙제하듯 그러나 또 아껴가며 실비아의 일기를 읽는다.    

법정 스님의 유언처럼 결국 글을 쓰는 것도 말빚을 지는 일일텐데.
말하고 쓰는 일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어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쓰고 하고 마는 얘기들이 남기고 갈 의도되지 않은 그 부스러기들에 대한 우려와 연민이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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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0-03-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정스님의 <일기일회> 주문하셨군요.^^ 부러워요~
제가 보고싶은 책들은 거의 판매중단이고 일시품절입니다.ㅜ.ㅜ

blanca 2010-03-13 22:45   좋아요 0 | URL
벌써 그렇군요...아직 일기일회 주문은 못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3-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서른 넷이군요.

blanca 2010-03-13 22:45   좋아요 0 | URL
만으로는 서른 둘입니다.^^;; 노자님 나이도 궁금해지는데요.

후애(厚愛) 2010-03-14 07:53   좋아요 0 | URL
저두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4 15:14   좋아요 0 | URL
아니...왜들 이러시나...호기심 많은 누나들!

비로그인 2010-06-0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권에 대해 비슷한 마음이 들어 잠시 눈 감았다가 갑니다. ^^

blanca 2010-06-02 09:1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제 옛날 글에 왔다 가셨네요.^^ <혼불> 때문에 오셨는가, 싶네요. 저는 유일하게 소설을 읽고 그 등장인물이 살아 있다고 느낀 책이 <태백산맥>,<혼불>,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지금도 제 가슴 속에 그 몇몇이 살아 있어요. 특히나 <태백산맥>이랑 <혼불> 등장인물은 서로 만나기도 합니다.ㅋㅋ
 

정말 지금까지 저 기다렸어요?
 

소개팅날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사람치고는 너무나 뻔뻔스럽게 그는 싱글거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시간이나 배회하며 처음 대면할 가능성에 목매단 여자가 된 나는 그런 그의 천연덕스러움과
미남형과는 거리가 멀게 처진 눈꼬리에 매달린 장난기어린 웃음이 싫지 않았다. 

쉘 위 댄스 봤어요? 안 봤으면 같이 봐요.
우리집 현관 층계참 그는 다짐이라도 받아두려는 듯 계속 쉘 위 댄스를 연호했다.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바로 그 첫날.
그리고 그 후 우리는 오년하고도 한 달이 모자란 그 날 부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퇴근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지요. 부지런히 뛰어가 총총히 길을 걸어 내려가는
당신을 따라잡았습니다. 눈이 온 날이었습니다. 습기에 젖은 당신의 머리칼이 곱슬거렸습니다. 설마 동의할까 싶으면서도
나는 춤추러 가자고 제안했지요.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와이 낫", 좋다고. 담백하게. 1947년 10월 23일이었습니다.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중    
 

 

누구나 사랑을 시작할 수는 있다. 성적인 이끌림에 대한 기대, 환상 같은 화학적 흥분의 보조제가 분비되며 우리를 독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지나 자잘한 삶의 고충들에 뒤덮이고, 급작스런 고난으로 뭉그러지기도 하며 노년의 길목에 다다랐을 때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의 얘기는 넘쳐나도 반세기 이상을 해로한 노부부의 사랑에 대한 얘기는 하는 데도 들어 주는 데도 인색해지게 된다.  

삼인칭의 타자로서 내 앞을 가로막는 '그'를 이인칭의 상대인 '너'로 전환시키고, 그 너에 다시 '나'를 포개서 내 안에 그와 너가 공존하면서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김 훈 

김훈이 한탄하며 부러워했던 이런 사랑의 주인공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언론인, 사회생태주의학자인 앙드레 고르가 여든두 살의 생일을 앞둔 불치병에 걸린 아내 도린에게 보내는 이 연서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죽음을 앞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사랑에 대한 애달픈 복기와 그 사랑이 생명 그 자체의 연대에 대한 소망으로까지 확장되어나가는 경로를 짚어나가는 과정에 대한 보고다.  

정념에 이끌린 감각적이고 짜릿한 유효기간을 준수하지 않으면 부패해 버리고 마는 허약한 사랑 대신 그들이 가치관을 공유하고 서로의 약속을 준수하며 서로의 내면에 서로의 공간을 내어준 엄격한 사랑은 지속가능한 사랑에 대한 하나의 범례 같다. 

사르트르와 교유하고 실존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에 천착했던 이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은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일상의 독립적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년 간 간호하게 된다. 

집 안 식구를 (처음 나를 만나던 날 나를 두 시간넘게 기다리게 했던 그 사람도 포함하여)이 모두 잠 든 자정 그 시간. 이 얇은 책자의 마지막 대목 앞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감히 울지 못했다. 이렇게 옮겨둘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이상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느 리뷰어의 얘기처럼 감히 리뷰도 쓸 수 없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p.89~90

그는 약속을 지켰다. 2007년 9월 22일 이 부부는 잠자듯 나란히 침대에 누워 함께 주사를 맞아 삶을 마감한다. 그가 쉘 위 댄스로 와이 낫을 얻어낸 지 육십 여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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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3-12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과 사르트르 얘기에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을 수 없어 달지 못했어요.
여전히 할 말을 찾진 못했지만 이번엔 한마디 달아야 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3-12 22:04   좋아요 0 | URL
댓글이 가슴을 울리네요. 잘 읽었다,는 말이 힘을 나게 합니다.

프레이야 2010-03-1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감동적이에요.
아세요? 님의 글은 늘 이렇게 마음 저 깊은 곳을 울려요.^^

blanca 2010-03-12 22:0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저는 오늘 프레이야님 따라 열심히 혼불 뒤지다 득템했답니다. 오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지만 몸 재계하고 있는 책 다 떨어내고 혼불 독서에 열중하려구요. 프레이야님 같이 읽어요. 외롭지 않게요^^;; 혼자 대하소설 읽는거 넘 외로워요.

후애(厚愛) 2010-03-1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감동받았어요.^^
전 1년 연애 그리고 결혼 13년이에요.
다음주가 13년 되는 날이거든요.ㅎㅎ
주말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blanca 2010-03-13 13:27   좋아요 0 | URL
우와! 후애님 결혼연차를 들으니 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 되었습니다^^;; 미리 결혼 기념일 축하드려요. 낭만적인 이벤트를 준비중이신지도 궁금하네요. 행복한 후애님 부부도 다사로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랄게요^^

후애(厚愛) 2010-03-13 14: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나가서 외식을 하기로 했어요.
이벤트는 제가 한국 나가서 알라디너 분들과 하려고요.^^
아직 멀었지만 제가 이벤트 할때 참여해 주실거죠?

마녀고양이 2010-03-1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노트북>이 생각나는 리뷰네요. 노트북의 노부부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펑펑 울었는데, 이 책도 그렇군요.
긴 인생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자박자박 걸어갈 동반자가 있다는거 너무 행운인거 같아요.

blanca 2010-03-16 20:43   좋아요 0 | URL
노트북이 정말 감동적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보려고 했었는데 다운만 받아놓고 미처 못봤네요. 부부애라는 것에 다시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노력해야지요.

stella.K 2010-03-1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저도 봤는데.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ㅠ
그래서 브랑카님은 그분과 지금 몇년째 살고 계신가요?(이런 거 물어봐도 되려나...ㅋ)

blanca 2010-03-19 14:5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스텔라님. 제 세례명이 스텔라여서 반갑습니다.(물론 냉담중이지만요--;;) 물어보셔도 됩니다. 오년째 살고 있습니다.^^;; 얼추 십년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네요.

stella.K 2010-03-19 15:10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그러니까 정말 반가운데요?
전 개종을 해서 쓸 일이 없는데 인터넷 개정을 하려다 보니 그만...찔끔.
스텔라를 세례명으로 쓰는 사람 많지 않을 것 같은데..그렇지 않나요?^^

순오기 2010-03-1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특종 당선~ 축하해요!
쉘 위 댄스~ 암, 안 봤으면 말을 말아야지요.^^

blanca 2010-03-19 20: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적립금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당신이 녹음해 준 그 편지를 듣곤 하지. 당신은 참 친절한 여자야. 그 친절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데 당신 그것 알아요? 요새 나한테 썰어주는 고기가 너무 큰 것 말이야. 점점 나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인데..." 

그녀는 절대로 그가 볼 수 없는, 하지만 기억은 할 지 모를 사랑스럽지만 서글픈 눈웃음을 지으며 이미 몸의 반쪽이 마비되고
눈마저 멀어버린 이 지성의 권화 같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더듬거리며 흘리며 그녀가 잘라주는 음식을 되는 대로 집어넣고 까페의 배경음악과 걸맞지 않아 한없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그 경련들까지 동반한 그의 쇠락한 모습이 그녀의 그에 대한 오마주를 전혀 침범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1년이 채 안 되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그 기괴한 노인과 젊은 금발의 총명하고 도발적인 이 여인의 기묘한 저녁식사를 열흘마다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수군댔다. 

"아무래도 사르트르가 노망이 든 것 같아요. 저번에는 글쎄 클로즈리 데 릴라에서 음식을 질질 흘리며 아기처럼 손으로 사강이 잘라준 고기를 먹으면서 큰 소리로 웃고 있더라니까요."  

                                                                                                          용서하세요! 사르트르와 사강! 이 졸저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흠뻑 빠져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 경의를 바치는 장면에 배석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오마주를 받은 그 누군가를 궁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이기도 하지만 나도 그에게 사로잡힐 수 있을까, 하는 재미있는 시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한 나는 그들에게 붙어다니니라. 붙잡을 수 없고 이름없는 그 존재로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현존하리라. - 사르트르의 <말> 중

이 세상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산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내. 장 폴 사르트르. 오늘날 그를 얘기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을 논하기란, 지성인의 행동과 사회참여를 주장하기란 분명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우리는 그를 읽고 그를 말하면서 그가 언어로 변환되어 영생하는 그 길목에 서 있다. 그가 그렇게나 기다렸던 내일, 독자들의 눈과 귀와 입 속에 자신이 현현하기를 바랐던 순간은 그가 얘기했던 2013년이 훨씬 안되어서 실현되었다.  

 <말>은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자마자 바로 거부하고 또한 문학과의 고별식을 거행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던 작품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의 하나로 공인된다는 이 작품은 사르트르가 읽고 쓰는 데 있어 유물론자이자 서사석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연원을 유년시절을 복기하며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 순례는 우려와는 달리 그의 의외의 발랄한 기지와 투명한 관조로 더없이 유쾌하고 인상적이고 반짝이는 도정이었다. 유년시절의 삽화들은 하나의 흥미로운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자기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그가 사람이 제게 차지하는 자연스러운 자리를 결정하는 유년시절에 천착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유년에서 출발하여 생애 전반을 좌우한 긴 그림자는 생후 1년이 안 돼 죽어버린 아버지의 부재와 그를 대신하여 허약하면서도 세속적인 문인의 위임장을 쥐어주었던 외할아버지의 권능이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법칙이다. <...>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효도의 예시로 인용)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서 미처 내 아버지 노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p.22 

그는 스스로에게 초자아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가 권력이라는 암에 걸리지 않은 것도 기실은 부자 관계에서 복종을 강요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알맞게 죽어주었다고 표현하는 그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경멸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그리움은 가족 관계에서 체험되는 그 오류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위계에 대한 그의 감정과 같다. 싫지만 경멸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가정에서 습득한 원시적인 그 양식들과 의례들에 집착한다. 그것이 없어서 그가 훌륭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고독하게 파고들었는 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비교적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귀재였다고 자인한다. 우리는 안다. 아이 만큼 사랑받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또 기억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남용하기도 했음을. 누구나 어른들의 기호에 맞는 그 역겹지만 무용하지 않았던 연극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과도한 남에 보여지는 타자적 자아에 대한 인식이 유년시절부터 있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요조도 연극에 빠진다. 어른들을 웃겨주기 위하여 익살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것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통과의례인 성장의 관문이 되겠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남에게 보여지는 자기를 의식하며 연극 배우가 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반부의 '읽기'와 후반부의 '쓰기'로 나뉘어진 이 책의 구성이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로 유년시절 외가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살아가며 외가의 그 허식적이고 모순된 가풍에 어떻게 적응해 갔는지의 얘기와 성전처럼 보였던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미친듯이 읽고 쓰며 언어로 사물을 포획하는 일에 매료되었던 작은 사내애의 생활들에 대한 반추다.  그 반추는 우리의 유년을 같이 짚어가는 것으로 병행된다. 사르트르가 할아버지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가 안기고 보봐리 부인의 마지막 장들을 씹어넣다시피 하며 정독하고 온갖 영웅소설을 짜집기해 그 환타지의 주인공에 자신을 싣고 달리는 모습들은 또 우리의 유년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자연과 사물을 직접 체험하기 전에 언어로 그것들을 둘러싸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이 오류가 지배하는 관념론적 인식의 습관에서 탈피하기 힘들었다는 고백에서 우리와 조금 다른 기차를 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랬기에 그가 뱉어낸 그 수많은 언어들이 우리의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언어들과는 다른 우월한 위계에 안착하게 된 것일테지만 말이다. 

"깜깜해도 쓸 수 있을 거야." 어두운 방에서 끼적이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그가 던진 장난기 어린 장담은 슬픈 예언이 되고 만다. 그는 말년에 완전히 실명한다. 그리고 쓰지 못한다. 다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도 공기 중에 흩어져 갔던 바로 그 날. 사강은 되뇌인다. 정말 사랑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 정말 아픈 이별의  바로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말. 그를 만나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을 동정하면서도 부러워한다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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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관심 있었던 강의의 강사 프로필을 확인하다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꽤 친밀했다
어떤 계기로 너무나 멀어져 버린, 과 동기였다. 

내가 그 강의를 듣게 되면 그녀가 나를 보며 강의를 하고 나를 평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배철수가 언젠가부터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면서 행복해졌다는 얘기를 들먹이며 나도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오만하게
지껄여 댔던 그 지점에서 바로 얼어붙었다. 질투, 시기심, 자기비하, 열패감이 끈적끈적 들러붙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중 

  

마침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야금야금 읽고 있었다. 그래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결국 준거집단의 성공을 감내하기 힘든 그 치사한 심리는 인간의 본성인 것인가. 되짚어 보면 정말 예리한 지적이다. 왜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고 동창회만 다녀오면 설겆이를 전투하듯 하며 죄없는 그릇에 화풀이를 하고 항상 나무늘보처럼 게을렀던 우리의 모습을 유독 그날 더 발끈하며 못 참아내며 성토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하필 왜 그녀였음에 더 강한 심리적
충격과 열패감에 사로잡혔는지도 설명이 된다.  



보통의 책을 선물받은 사람이 다시 그 책을 나에게 줬었다. 아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였나 보다. 추측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안읽고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적인 것에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지루함, 사변적 분위기, 공감할 수 없는 부르주아 분위기 같은. 누군가 건네준 책을 고맙게 받고 잘 읽지 않는 묘한 습성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나에게 온 그것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애초 출발지인 그 사람마저 멀게 느끼게 될까봐 움찔하면서 피하게 된다. 역설이다. 책을 사랑하면서 책 선물받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대신 도서상품권으로 부탁하는 너절한 센스까지 가지고 있다. 

그의 책을 읽게 될 줄 몰랐다. 정말 우연하게 대형서점에서 소설가가 이런 '불안'이라는 정서에 천착한다는 게 놀라워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불안이라니. 나는 충분히 불안하니 읽을 명분이 대충 섰다. 

이 책에서의 불안은 사회에서의 지위의 위계의 틀 안에서 넘치는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그 불안을 얘기한다. 즉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드리워지는 그 불쾌한 패배감이다.  세상의 눈은 물론 속물근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속물근성에도 재미있는 유례를 덧붙인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옥스퍼스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 옆에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은 관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sine nobilitate)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이 속물이란다. 명쾌하고 씁쓸한 정의다. 

불안이 결국 현대의 야망의 하녀라는 고찰은 예술이 삶의 비평을 통해 그것을 수정 보완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결국 보통은 자기가 쓰는 소설을 옹호하고 싶었지 않나 싶게 조금 뻔한 결론이 김빠지기는 했어도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에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든 그의 예리한 기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런 추상적이고도 지루하기 십상인 재료를 가지고 이다지도 흥미롭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그도 분명 속물근성의 기준에서 보면 성공한 축에 속에 속할 것같다.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들과 그림이 흑백이라 그다지 내용의 이해에 큰 도움이 안되어서 아쉬웠지만(원서는 어떤지 궁금하다), 그가 제시한 각종 도표와 상징화된 도식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로 보였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p.268 

보통의 얘기를 빌리자면 우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향수에 휩싸여 장성해서도 세상이 주는 사랑을 찾아간다. 두번째 사랑은 그 사랑의 기준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은밀하고 부끄럽다. 돈과 명예, 권력을 탐하는 것도 결국은 세상이 돌려주는 기립박수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애정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얘기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나의 얘기로. 그 강사는 그녀가 아니었다는 조금은 안심되는 얘기를 들었고 (동명이인) 그럼에도 사회적 잣대로 성공한 수많은 그녀들을 단지 더 친밀했고 나와 더 비슷했기 때문에 때로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나의 옹졸함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숙명이라는 데에 많이 절망했으며 체념하게 됐다. 안그러려면 욕망을 줄이고 속물근성을 떨어낼 도리밖에 없는데
지난하고 요원한 과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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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글이네요.
인간의 속물근성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blanca 2010-03-04 13:43   좋아요 0 | URL
그죠? 그래도 좀 덜 속물적이려는 노력은 계속 해보려구요^^

프레이야 2010-03-0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절한 질투에 너절한 센스요? 아뇨. 전혀 너절해보이지 않아요^^
질투도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말을 배우 이미숙이 했던가요.
비슷한 준거집단에서 일어나는 감정, 질투에서 보통의 불안까지, 마음에 와닿는 페이퍼에요.
질투가 긍정의 에너지로 소모되는 그날까지, 아자!

blanca 2010-03-04 13: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의 낭독의 의미를 깨닫고 지금 감동받았습니다. 아...너무 아름다운 일이다. 나도 흉내좀 내야겠다고 결심도 해보고요^^ 저는 앉아서 부러워하고 질투만 하다 세월 다 갈 것 같아요. 정신좀 차려야 겠어요--;;

저절로 2010-03-0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언제나 저를 쏘옥 빨아당기는 군요^^.
보통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다,여기서 맞딱드리네요..저 파리한 눈빛으로 '불안'을 얘기했다니, 음..궁금해지는군요.

blanca 2010-03-04 22:15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 저도 괜히 피해다녔는데 이 책은 재미도 있고 소장가치도 있고 여러 모로 마음에 들더라구요. 다만 여기서 반값행사하는 것도 모르고 사 버린게 쓰릴 뿐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소설가라 그런지 박학다식하면서도 센스도 있고 그렇더라구요.

루체오페르 2010-03-0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생활 속의 철학적이고 느낌있는 글 정말 좋습니다.^^

blanca 2010-03-04 22:16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감사합니다. 사실 철학은 잘 모릅니다.-..- 철학적이고 싶어할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