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살아도 절대 모르는 영역이 있다. 구역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내가 차마 떠올릴 수 없는 삶의 비의를 가르쳐 줄 때가 있다. 


"그거 아세요? 미국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 총에 맞아 죽는지... 우리나라 하루 자살자가 몇 명인지...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하지만요. 지금 시급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평균 36명이 목숨을 스스로 끊어요."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아마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그 숫자가 충격적이면서도 그럴 수 있다, 그러 경우가 있다, 에 생각이 가 닿았던 것 같다. 매일이 축제인 사람이 있을까. 때로는 정말 버티기 힘들 때도 있다. 


















무거운 책이다. 우리가 쉽게 비난하고 쉽게 무시하고 너무 가까이 느껴서 그 권위를 종종 인정해주지 않는 경찰관, 젊은 여자 경찰관의 이야기다. 과학수사과에서 현장감식 업무를 담당하며 수백 명의 변사자를 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주변에서 비상식적인 대한민국과 사람들의 무서운 밑바닥을 봐버린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 무슨 사건인가 싶어 호기심 그득한 구경꾼들만 바글바글했던 현장에서 절망한 이야기다. 영화 <아바타2>를 꼭 보고 싶어했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못 보고 간다는 유서를 영화 개봉 3일 전에 남기고 간 이야기다. 상관의 실적 압박에 손님을 태우러 중앙선을 침범한 개인택시 기사에게 6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하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을 때로 희화화하며 그들에게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권한과 대우를 해줬나? 나도 그런 불신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지 않았나? 미국의 경찰들과 비교하며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그들의 소극적 대처를 입으로만 쉽게 성토하지 않았나? 


그러나 무엇보다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그 죽음 이전에 그 죽음이 완벽하게 실현되도록 연습까지 하는 그 절망을 삶의 의지 부족으로 치환해서 무조건 살아야 하고 내일에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쉬운 기만적 답안으로 교체했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삶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희망 그 자체를 꿈꿀 수 없는 그 바닥을 내가 감히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싶었던 순간과 죽음 그 자체를 결행한 사람들과의 그 간극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내가 속단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피어나는 곳에서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마음이, 그러나 여전히 그런 딸의 안부를 간절히 챙기는 아버님의 틀린 맞춤법이 사랑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여전하구나 싶은 체념어린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랑이다,는 희망이 아니다. 어쩌면 삶의 그 지독한 중독성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여전히 그 사랑을 기억하며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참으로 지독하다.

















여성 장례지도사인 김수이 작가의 글이다. 표지만큼 정갈하고 담백한 글들은 죽음 이후의 그 의례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것은 삶의 축제의 저 반대편에 가 있지만, 우리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결국 통과해야 하는 순도 백퍼센트의 통과의례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녀가 일했던 장례식장 풍경이 내가 가 있었던 그 장례식장과 너무나 닮아 있어 기시감이 들었다. 그 장례식장행 셔틀이 없어진 이유가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면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갔던 장례식장은 병원에 정차하고 마치 종점처럼 서곤 했으니까. 제목처럼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게 희망의 영역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엄연히 삶의 심연에 속한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꿈꿀 수 있을까. 청년들의 절망을 읽을 때마다 기성 세대로 가고 있는 나는 미안하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긍정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희망과 미래를 노래했던 우리 세대의 책임은 없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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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절대적인 선인도 절대적인 악인도 대체로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 조심스럽다. 인간은 무엇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그녀는 1927년에 이미 파리에 간 여성이다. 1934년에 남편과의 이혼 과정과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했다. 가부장제의 위선과 모순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것을 공론화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글은 지금 읽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로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급진적이었고 깨인 여성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태어나 독립적으로 대등한 부부관계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결혼 생활 등 그녀의 화려한 전반기의 인생은 그러나, 질병과 빈곤 등으로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나혜석의 인생 그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하나의 드라마다.


나혜석은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나문희 배우는 어린 시절 본 나혜석이 파킨슨으로 투병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적 재능이 흐르는 집안이었던 듯하다. 명배우 조카에게 남긴 마지막 기억이 안타깝다. 
















<경성에서, 정월>이라 했을 때, 나는 무심코 1월에 관한 나혜석의 글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정월'은 나혜석의 호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정체성에 관련된 나혜석의 글들이 실려 있다. 나혜석은 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의 필력도 대단하다. 주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 데 짧은 단편처럼 생생하고 풍성한 글로 장면을 그려낸다. 자신만의 논리를 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설득당해 버릴 정도다. 결혼생활에 관련한 그녀의 생각은 지금 시대에도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대목이 여전히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네 아이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진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뭐라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녀가 결국 벗어던지고 남은 정체성이 그녀 자신 그 자체로서 존중 받고 인정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모두가 침묵하고 체념하며 따랐던 정통 가부장 구조가 한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을 적시한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돌올한 나혜석의 유산이다. 그녀는 자기가 한 명의 '언니'로서 전인미답의 길에 발자국을 낼 것을 예감했다. 


아직 밝지도 않은 이 새벽에 누가 벌써 수레를 끌고 가는구려. 그 바퀴 구르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와 같이 내 귀에 들리오. 이 이른 새벽 깊이 든 잠에 몇 사람이 깨어서 저 바퀴 소리를 들었겠소. 이와 같이 만물이 잠들어 고요한 중에 그는 먼길을 향하고 일찍이 일어나서 튼튼히 발감개하고, 천천히 걸어가며 새벽하늘의 고운 빛을 노래하고 맑은 공기에 휘파람 불며 미소하리다.

-나혜석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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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2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문희 씨가 조카군요.
호가 정월이라니. 넘 불행한 삶을 살았던지라 어떨까 싶은데 이 책 관심이 가네요. 표지도 예쁘네요.^^

blanca 2024-02-28 09:44   좋아요 1 | URL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표지도 판형도 참 예뻐요.

등대지기 2024-02-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누구든 쉽게 비난하지 말자 싶어요. 다들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나혜석을 알게 되었을 땐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아갈수록 멋진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02-28 09:46   좋아요 0 | URL
자녀들에 대해서는 분명 무책임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선각자적 면도 있고 참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더라고요.
 

영화 <연인>이 개봉했을 때 난 그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라 볼 수 없었다. 대신 영화의 스틸컷이 실린 일종의 스토리북을 샀다. 그 이미지들로 <연인>이란 영화를 막연히 재구성했다. 그건 뒤라스의 원작도 아니었다. 나에게 <연인>은 성인이 되어 그런 금지된 너머를 마음껏 탐사할 수 있는 권한의 이정표로 역할했다. 


정작 영화도 그 원작 소설도 제대로 접하게 된 것은 훗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였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에로틱한 정서가 나는 뒤라스의 이야기의 핵심이라 여겼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뒤라스를 오독한 셈이었다. 뒤라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뒤라스는 연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숨겨진, 생략된, 함축된 그 무엇에 핵심이 있었고 거기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연인>을 읽기 전에 그녀가 이미 30년 전에 쓴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 뒤라스의 자전적인 기록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뒤라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그 정제되고 말하여지 않음으로 말하는 작법의 배경이 되어준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도발적이고 비관적인 그러나 숙명적인 이야기다. 주인공인 십대 소녀 쉬잔은 뒤라스의 분신이다. 프랑스령 식민지 캄보디아 남중국해에서 교사였던 어머니와 오빠 조제프와 살아가는 가난한 소녀는 어느 날 갑부 조 씨를 만난다. 그들은 아름다운 쉬잔에 끌리는 조 씨를 이용한다. 그를 통해 조제프가 갖고 싶어했던 번쩍거리는 축음기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얻어낸다. 그들은 조 씨의 초라한 외모와 유약한 심성을 비웃는다. 그러나 이런 가족의 위악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 되어버린 그 가족의 가난과 절망의 형상화일 뿐이다. 식민지 토지국의 기만으로 끊임없이 바닷물로 범람하는 불하지에 굴하지 않고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쌓으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억척스럽게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남매 곁에 살아 있는 한 남매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며 그녀의 조종을 받는다. 그들은 살기 위해 이 처절한 집착과 절망을 공유한다. 이들이 결국 어머니에 대한 "잔인하지만 숙명적인 저버림"을 달성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그것과 만난다. 그건 비단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결국 우리는 모든 희망을 놓고 떠나가야 한다. 삶 그 자체에 대한 희망과 집착까지 놓고 버려두고 퇴장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왜 울어요?" 쉬잔이 물었다.

"다시 시작될 테니까. 전부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포기하지 않는 희망은 가장 궁극적인 절망이다. 그게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희망은 절망보다 고통스럽다. 그 역설 가운데에 삶이 있다. 그리고 쉬잔과 자크의 어머니, 뒤라스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그 상징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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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2-19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주인공이 입었던 원피스와 모자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blanca 2024-02-20 08:30   좋아요 0 | URL
너무 강렬하죠. 저는 그 어울리지 않던 높은 굽의 구두도 생각나요. 영화와 소설이 다 강렬했던 추억입니다.
 

부모님들이 칠십 대를 넘어서니 이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 이 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감각이 더 가까이 왔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리 작별 연습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연습한다고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 더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인생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자꾸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라앉는다. 



시인 이제니의 <새벽과 음악>을 읽으니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지만 이전에 그녀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다. 유명한 시인이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인 줄만 알았다. 언젠가 이 젊은 시인의 시를 나도 읽어봐야지, 했다. 그러나 이 산문집을 읽으며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훨씬 많은 상실을 이미 겪었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시인의 산문집은 그녀가 직접 겪은 사고와 상실들과 시를 쓰는 과정의 그 지난한 여정과 그 과정의 감각과 느낌과 앎에 대한 산문시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벼리고 또 버리고 건져내고 닦아낸 한글 어휘들의 명징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은 아름답다고도 어렵다고도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놀라운 마주침과 각성의 순간들의 연장이다. 


시인이 시베리아로 떠났다 겪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극한까지 갔었던 체험과 그곳에서 마주친 고려인 여성이 몸에 새긴 그 문구의 대목으로 여는 이야기들은 보고만 있어도 그리웠던 어머니의 죽음과 그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남은,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에 대한 글과 그 플레이리스트로 이어진다. 그 플레이리스트의 큐알코드를 찍어 음악을 듣는 과정 자체도 이 이야기의 일환이다. 


인생은 짧은 것.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더욱 짧은 것. 그러니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꿈을 꾸고 타인의 인정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제 존재의 타고난 빛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낱 보잘것없는 먼지와도 같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슬프거나 아쉽지 않게.

-<새벽과 음악> 이제니


이제니 시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이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슬프거나 아쉽지 않게." 잘할 자신은 여전히 생기지 않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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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7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의 엄니도 연로하신데 한 달이 가고 1년이 가면 갈수록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평소 모녀지간이라도 그리 살가운 건 아니지만 언젠가 이별이 올 텐데 그땐 어쩌나 자꾸만 그래지네요.ㅠ

blanca 2024-02-17 19:27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하루하루 시간 가는 게 어린 시절과 달리 너무 착잡하다고나 할까요. 나이 먹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어요.
 

아이를 가지는 일에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귀여운 아기다. 임신하기 이전에 내가 아픈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거나 극심한 사춘기 반항아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임신, 출산뿐만은 아니다. 완벽한 인생의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현재 내가 겪는 일들을 비정상적인 것이나, 과도기적인 측면으로만 폄하하게 한다. 이 어려움만 지나가면, 다음에는 완벽한 이상향의 시기가 올 거야, 와야 마땅해 같은 생각. SNS에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타인들의 찰나의 이미지는 행복한 장면들 뿐이다. 인생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더 강화된다. 


아이를 낳았다. 귀엽기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낳으면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잠이 들 만하면 다시 반사적으로 일어나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줘야 한다. 이 시기만 끝나면 평화로울 거야. 그러나 이후 아이가 걷기 시작하며 사방의 모든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굴러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제 유치원에만 가면 나에게도 자유가 올 거야. 기관에 가면 평화로운 시간은 막간에 아주 잠깐뿐, 끊임없이 각종 집단생활 때문에 감염병에 걸려온다.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중요한 약속도 잡지 못한다. 아이가 드디어 학교에 간다. 드디어 본게임 시작이다. 사교육을 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온전히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도 괜찮았겠지만, 그러나 내 아이 앞에서 완벽하게 쿨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드디어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사.춘. 기. 내 생살 같았던 아이를 떼어 놓으려면 이 시기의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세상의 전부고 엄마 말이 전부라면 그 아이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반항도 하고 거부도 하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말만 쉽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합리함, 삶의 부조리를 가장 실시간으로 농축하여 체험하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선의를 가진다고 다 제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이 세 책에는 우리가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반경을 넘어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통점은 이 세 아이들이 아프기 전 모두 부모에게 기쁨을 주던 빛나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점과 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키우려 노력했던 부모들이 뒤에 있었다는 점이다. 바깥에서는 비난할 수도 있는 아이들의 모습 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아이가 자라나 다른 아이를 가해하거나 약물에 중독되거나 양극성 질환을 앓게 될 거라 상상하거나 생각하며 아이를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일은 우발적 사고처럼 일어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취약한 우발적 사건, 사고에 내 생살을 내어놓는 일과 다름 아니니까.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거나 아플 수 있다.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나를 으쓱하게 해줄 훈장으로 아이를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에고는 아이로 인해 부풀어 오를 것이고 인생의 본질적 취약성,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나의 성취를 나에게서 쉽게 떼어 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분리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 책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아팠다는 점이다. 바깥으로 드러내어 놓지 않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사춘기를 만나 발현된 아이들의 질환에 대한 대처 또한 어렵게 했다. 사람들은 비난하고 쉽게 비판한다. 때로는 심지어 예비 범죄자로 아픈 아이들을 대한다. 최근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로 이런 편견들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대한 부모의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쉽게 이야기할 대목이 아니다. 내 품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그 임계점을 상정하는 건,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어지는 그 부모, 자식 관계의 아이러니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고 부모에게는 그 화살의 경로를 강제로 수정할 어떤 권리도 힘도 없다. 아이가 질병을 얻어 방황하거나 심지어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인간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이가 준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따금씩 열어보는 보물상자로 간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아이 대신 삶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세 부모가 예상치 않았던 경로로 틀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을 통해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성장과 도약이 때로는 우리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는 심오한 깨달음을 공유하게 해주어 저자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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