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입적하신 다음 날, 그 분의 마지막 길을 흐느끼며 배웅하듯 끄느름한 날씨 속에서
아이 손을 잡고 걷다 보니
낯선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얘는 말을 잘 하나요?
사물을 가리키면 그걸 알아차리나요? 
정확히 몇 개월입니까?

이런 조금 황당하고 직설적인 질문들.
그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어쩌면 손주중의 하나가 발달지연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곧잘 우리는 비슷한 누군가는 어떤지를 궁금해하며 위로도 받고
걱정도 더하고 그러면서 고민의 모서리를 다듬는다. 
 

몇 개월 후 가게 될 어린이집 탐방후 아이는 거기에 있겠다고 집에 안가겠다고 서럽게 울어댄다.
어린이집에 안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집에 있겠다고 우는 아이를 보니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벌써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는 건지, 엄마와의 시간이 만족스럽지 못해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거기에서 커다란 눈을 끔벅이던 귀연 제또래 남자애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집 앞 조그마한 미용실. 딸애의 한 줌도 안되는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예의 미용사 아주머니가 포상격으로 주던 사탕이 없자
황당해하며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고 사탕을 하나 사서 빨려 줬다.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받이 또 비슷한 연령의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얘는 누구를 닮았나요?
아빠를 닮았다구요? 내 딸도 아빠 판박인데.
그래서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안되도 왜 안되는지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고 그래야지, 어쩌겠어.
왜냐, 자식이니까.
내 딸은 이십대 후반이 되서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하더라구.
근데 왜 시집을 안가지?
이제 서른 네 살인데. 

저랑 동갑이네요! 

그러자 갑자기 시작되는 말
즈 앞으로 아파트도 있는데 말이야.   

아빠를 고대로 닮아 고집을 피울 그러나 이제는 조금 유순해졌으나
시집을 안 간다는 나랑 동갑의 아가씨가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야무지고 사랑스러울 것 같다.

집에 와서 안자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재워 놓고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조금 읽는다.
서른 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아넣고 자살했다는 그녀.
테드휴즈의 아내이기도 했던 그녀의 빛나던 소녀 시절 그 시적이고 찬란한 어구들을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다보면 또 맥락없이 프레이야님 서재에서 본 최명희의 그 명징하고 유리알 같은
문장들이 생각나 <혼불>을 구해야한다는 강박에 중고서점을 뒤지게 된다. 

기적처럼 갑자기 나타난 <혼불> 세트. 밀란 군데라의 <농담>도 보퉁의 <동물원에 가기>도
김혜리의 <그녀에게 말하다>도 아니 실비아의 일기도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절판되기 전에
법정스님의 <일기일회>도 읽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주문해 놓고 역설적으로 제발 판매자가
천천히 배송해 주기시를 기대하며 숙제하듯 그러나 또 아껴가며 실비아의 일기를 읽는다.    

법정 스님의 유언처럼 결국 글을 쓰는 것도 말빚을 지는 일일텐데.
말하고 쓰는 일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어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쓰고 하고 마는 얘기들이 남기고 갈 의도되지 않은 그 부스러기들에 대한 우려와 연민이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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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0-03-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정스님의 <일기일회> 주문하셨군요.^^ 부러워요~
제가 보고싶은 책들은 거의 판매중단이고 일시품절입니다.ㅜ.ㅜ

blanca 2010-03-13 22:45   좋아요 0 | URL
벌써 그렇군요...아직 일기일회 주문은 못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3-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서른 넷이군요.

blanca 2010-03-13 22:45   좋아요 0 | URL
만으로는 서른 둘입니다.^^;; 노자님 나이도 궁금해지는데요.

후애(厚愛) 2010-03-14 07:53   좋아요 0 | URL
저두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4 15:14   좋아요 0 | URL
아니...왜들 이러시나...호기심 많은 누나들!

비로그인 2010-06-0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권에 대해 비슷한 마음이 들어 잠시 눈 감았다가 갑니다. ^^

blanca 2010-06-02 09:1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제 옛날 글에 왔다 가셨네요.^^ <혼불> 때문에 오셨는가, 싶네요. 저는 유일하게 소설을 읽고 그 등장인물이 살아 있다고 느낀 책이 <태백산맥>,<혼불>,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지금도 제 가슴 속에 그 몇몇이 살아 있어요. 특히나 <태백산맥>이랑 <혼불> 등장인물은 서로 만나기도 합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