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금까지 저 기다렸어요?
 

소개팅날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사람치고는 너무나 뻔뻔스럽게 그는 싱글거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시간이나 배회하며 처음 대면할 가능성에 목매단 여자가 된 나는 그런 그의 천연덕스러움과
미남형과는 거리가 멀게 처진 눈꼬리에 매달린 장난기어린 웃음이 싫지 않았다. 

쉘 위 댄스 봤어요? 안 봤으면 같이 봐요.
우리집 현관 층계참 그는 다짐이라도 받아두려는 듯 계속 쉘 위 댄스를 연호했다.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바로 그 첫날.
그리고 그 후 우리는 오년하고도 한 달이 모자란 그 날 부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퇴근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지요. 부지런히 뛰어가 총총히 길을 걸어 내려가는
당신을 따라잡았습니다. 눈이 온 날이었습니다. 습기에 젖은 당신의 머리칼이 곱슬거렸습니다. 설마 동의할까 싶으면서도
나는 춤추러 가자고 제안했지요. 당신은 대답했습니다. "와이 낫", 좋다고. 담백하게. 1947년 10월 23일이었습니다.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중    
 

 

누구나 사랑을 시작할 수는 있다. 성적인 이끌림에 대한 기대, 환상 같은 화학적 흥분의 보조제가 분비되며 우리를 독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지나 자잘한 삶의 고충들에 뒤덮이고, 급작스런 고난으로 뭉그러지기도 하며 노년의 길목에 다다랐을 때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의 얘기는 넘쳐나도 반세기 이상을 해로한 노부부의 사랑에 대한 얘기는 하는 데도 들어 주는 데도 인색해지게 된다.  

삼인칭의 타자로서 내 앞을 가로막는 '그'를 이인칭의 상대인 '너'로 전환시키고, 그 너에 다시 '나'를 포개서 내 안에 그와 너가 공존하면서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 김 훈 

김훈이 한탄하며 부러워했던 이런 사랑의 주인공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언론인, 사회생태주의학자인 앙드레 고르가 여든두 살의 생일을 앞둔 불치병에 걸린 아내 도린에게 보내는 이 연서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죽음을 앞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사랑에 대한 애달픈 복기와 그 사랑이 생명 그 자체의 연대에 대한 소망으로까지 확장되어나가는 경로를 짚어나가는 과정에 대한 보고다.  

정념에 이끌린 감각적이고 짜릿한 유효기간을 준수하지 않으면 부패해 버리고 마는 허약한 사랑 대신 그들이 가치관을 공유하고 서로의 약속을 준수하며 서로의 내면에 서로의 공간을 내어준 엄격한 사랑은 지속가능한 사랑에 대한 하나의 범례 같다. 

사르트르와 교유하고 실존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에 천착했던 이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은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일상의 독립적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년 간 간호하게 된다. 

집 안 식구를 (처음 나를 만나던 날 나를 두 시간넘게 기다리게 했던 그 사람도 포함하여)이 모두 잠 든 자정 그 시간. 이 얇은 책자의 마지막 대목 앞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감히 울지 못했다. 이렇게 옮겨둘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이상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느 리뷰어의 얘기처럼 감히 리뷰도 쓸 수 없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p.89~90

그는 약속을 지켰다. 2007년 9월 22일 이 부부는 잠자듯 나란히 침대에 누워 함께 주사를 맞아 삶을 마감한다. 그가 쉘 위 댄스로 와이 낫을 얻어낸 지 육십 여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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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3-12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과 사르트르 얘기에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을 수 없어 달지 못했어요.
여전히 할 말을 찾진 못했지만 이번엔 한마디 달아야 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3-12 22:04   좋아요 0 | URL
댓글이 가슴을 울리네요. 잘 읽었다,는 말이 힘을 나게 합니다.

프레이야 2010-03-1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감동적이에요.
아세요? 님의 글은 늘 이렇게 마음 저 깊은 곳을 울려요.^^

blanca 2010-03-12 22:0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저는 오늘 프레이야님 따라 열심히 혼불 뒤지다 득템했답니다. 오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지만 몸 재계하고 있는 책 다 떨어내고 혼불 독서에 열중하려구요. 프레이야님 같이 읽어요. 외롭지 않게요^^;; 혼자 대하소설 읽는거 넘 외로워요.

후애(厚愛) 2010-03-1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감동받았어요.^^
전 1년 연애 그리고 결혼 13년이에요.
다음주가 13년 되는 날이거든요.ㅎㅎ
주말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blanca 2010-03-13 13:27   좋아요 0 | URL
우와! 후애님 결혼연차를 들으니 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 되었습니다^^;; 미리 결혼 기념일 축하드려요. 낭만적인 이벤트를 준비중이신지도 궁금하네요. 행복한 후애님 부부도 다사로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랄게요^^

후애(厚愛) 2010-03-13 14: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나가서 외식을 하기로 했어요.
이벤트는 제가 한국 나가서 알라디너 분들과 하려고요.^^
아직 멀었지만 제가 이벤트 할때 참여해 주실거죠?

마녀고양이 2010-03-1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노트북>이 생각나는 리뷰네요. 노트북의 노부부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펑펑 울었는데, 이 책도 그렇군요.
긴 인생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자박자박 걸어갈 동반자가 있다는거 너무 행운인거 같아요.

blanca 2010-03-16 20:43   좋아요 0 | URL
노트북이 정말 감동적이라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보려고 했었는데 다운만 받아놓고 미처 못봤네요. 부부애라는 것에 다시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노력해야지요.

stella.K 2010-03-1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저도 봤는데.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ㅠ
그래서 브랑카님은 그분과 지금 몇년째 살고 계신가요?(이런 거 물어봐도 되려나...ㅋ)

blanca 2010-03-19 14:5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스텔라님. 제 세례명이 스텔라여서 반갑습니다.(물론 냉담중이지만요--;;) 물어보셔도 됩니다. 오년째 살고 있습니다.^^;; 얼추 십년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네요.

stella.K 2010-03-19 15:10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그러니까 정말 반가운데요?
전 개종을 해서 쓸 일이 없는데 인터넷 개정을 하려다 보니 그만...찔끔.
스텔라를 세례명으로 쓰는 사람 많지 않을 것 같은데..그렇지 않나요?^^

순오기 2010-03-1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특종 당선~ 축하해요!
쉘 위 댄스~ 암, 안 봤으면 말을 말아야지요.^^

blanca 2010-03-19 20: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적립금은 언제나 달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