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을 때 당신이 녹음해 준 그 편지를 듣곤 하지. 당신은 참 친절한 여자야. 그 친절을 받을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데 당신 그것 알아요? 요새 나한테 썰어주는 고기가 너무 큰 것 말이야. 점점 나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인데..." 

그녀는 절대로 그가 볼 수 없는, 하지만 기억은 할 지 모를 사랑스럽지만 서글픈 눈웃음을 지으며 이미 몸의 반쪽이 마비되고
눈마저 멀어버린 이 지성의 권화 같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더듬거리며 흘리며 그녀가 잘라주는 음식을 되는 대로 집어넣고 까페의 배경음악과 걸맞지 않아 한없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그 경련들까지 동반한 그의 쇠락한 모습이 그녀의 그에 대한 오마주를 전혀 침범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1년이 채 안 되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그 기괴한 노인과 젊은 금발의 총명하고 도발적인 이 여인의 기묘한 저녁식사를 열흘마다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수군댔다. 

"아무래도 사르트르가 노망이 든 것 같아요. 저번에는 글쎄 클로즈리 데 릴라에서 음식을 질질 흘리며 아기처럼 손으로 사강이 잘라준 고기를 먹으면서 큰 소리로 웃고 있더라니까요."  

                                                                                                          용서하세요! 사르트르와 사강! 이 졸저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흠뻑 빠져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 경의를 바치는 장면에 배석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오마주를 받은 그 누군가를 궁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이기도 하지만 나도 그에게 사로잡힐 수 있을까, 하는 재미있는 시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한 나는 그들에게 붙어다니니라. 붙잡을 수 없고 이름없는 그 존재로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현존하리라. - 사르트르의 <말> 중

이 세상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산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내. 장 폴 사르트르. 오늘날 그를 얘기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을 논하기란, 지성인의 행동과 사회참여를 주장하기란 분명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우리는 그를 읽고 그를 말하면서 그가 언어로 변환되어 영생하는 그 길목에 서 있다. 그가 그렇게나 기다렸던 내일, 독자들의 눈과 귀와 입 속에 자신이 현현하기를 바랐던 순간은 그가 얘기했던 2013년이 훨씬 안되어서 실현되었다.  

 <말>은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자마자 바로 거부하고 또한 문학과의 고별식을 거행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던 작품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의 하나로 공인된다는 이 작품은 사르트르가 읽고 쓰는 데 있어 유물론자이자 서사석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연원을 유년시절을 복기하며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 순례는 우려와는 달리 그의 의외의 발랄한 기지와 투명한 관조로 더없이 유쾌하고 인상적이고 반짝이는 도정이었다. 유년시절의 삽화들은 하나의 흥미로운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자기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그가 사람이 제게 차지하는 자연스러운 자리를 결정하는 유년시절에 천착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유년에서 출발하여 생애 전반을 좌우한 긴 그림자는 생후 1년이 안 돼 죽어버린 아버지의 부재와 그를 대신하여 허약하면서도 세속적인 문인의 위임장을 쥐어주었던 외할아버지의 권능이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법칙이다. <...>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효도의 예시로 인용)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서 미처 내 아버지 노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p.22 

그는 스스로에게 초자아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가 권력이라는 암에 걸리지 않은 것도 기실은 부자 관계에서 복종을 강요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알맞게 죽어주었다고 표현하는 그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경멸과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그리움은 가족 관계에서 체험되는 그 오류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위계에 대한 그의 감정과 같다. 싫지만 경멸하고 싶지만 우리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가정에서 습득한 원시적인 그 양식들과 의례들에 집착한다. 그것이 없어서 그가 훌륭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고독하게 파고들었는 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비교적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귀재였다고 자인한다. 우리는 안다. 아이 만큼 사랑받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또 기억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남용하기도 했음을. 누구나 어른들의 기호에 맞는 그 역겹지만 무용하지 않았던 연극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과도한 남에 보여지는 타자적 자아에 대한 인식이 유년시절부터 있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요조도 연극에 빠진다. 어른들을 웃겨주기 위하여 익살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것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통과의례인 성장의 관문이 되겠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남에게 보여지는 자기를 의식하며 연극 배우가 되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전반부의 '읽기'와 후반부의 '쓰기'로 나뉘어진 이 책의 구성이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로 유년시절 외가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살아가며 외가의 그 허식적이고 모순된 가풍에 어떻게 적응해 갔는지의 얘기와 성전처럼 보였던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미친듯이 읽고 쓰며 언어로 사물을 포획하는 일에 매료되었던 작은 사내애의 생활들에 대한 반추다.  그 반추는 우리의 유년을 같이 짚어가는 것으로 병행된다. 사르트르가 할아버지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가 안기고 보봐리 부인의 마지막 장들을 씹어넣다시피 하며 정독하고 온갖 영웅소설을 짜집기해 그 환타지의 주인공에 자신을 싣고 달리는 모습들은 또 우리의 유년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자연과 사물을 직접 체험하기 전에 언어로 그것들을 둘러싸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이 오류가 지배하는 관념론적 인식의 습관에서 탈피하기 힘들었다는 고백에서 우리와 조금 다른 기차를 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랬기에 그가 뱉어낸 그 수많은 언어들이 우리의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언어들과는 다른 우월한 위계에 안착하게 된 것일테지만 말이다. 

"깜깜해도 쓸 수 있을 거야." 어두운 방에서 끼적이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그가 던진 장난기 어린 장담은 슬픈 예언이 되고 만다. 그는 말년에 완전히 실명한다. 그리고 쓰지 못한다. 다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도 공기 중에 흩어져 갔던 바로 그 날. 사강은 되뇌인다. 정말 사랑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 정말 아픈 이별의  바로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말. 그를 만나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을 동정하면서도 부러워한다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p.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