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관심 있었던 강의의 강사 프로필을 확인하다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꽤 친밀했다
어떤 계기로 너무나 멀어져 버린, 과 동기였다. 

내가 그 강의를 듣게 되면 그녀가 나를 보며 강의를 하고 나를 평가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배철수가 언젠가부터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면서 행복해졌다는 얘기를 들먹이며 나도 더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오만하게
지껄여 댔던 그 지점에서 바로 얼어붙었다. 질투, 시기심, 자기비하, 열패감이 끈적끈적 들러붙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중 

  

마침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야금야금 읽고 있었다. 그래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결국 준거집단의 성공을 감내하기 힘든 그 치사한 심리는 인간의 본성인 것인가. 되짚어 보면 정말 예리한 지적이다. 왜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고 동창회만 다녀오면 설겆이를 전투하듯 하며 죄없는 그릇에 화풀이를 하고 항상 나무늘보처럼 게을렀던 우리의 모습을 유독 그날 더 발끈하며 못 참아내며 성토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하필 왜 그녀였음에 더 강한 심리적
충격과 열패감에 사로잡혔는지도 설명이 된다.  



보통의 책을 선물받은 사람이 다시 그 책을 나에게 줬었다. 아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였나 보다. 추측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안읽고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해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적인 것에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지루함, 사변적 분위기, 공감할 수 없는 부르주아 분위기 같은. 누군가 건네준 책을 고맙게 받고 잘 읽지 않는 묘한 습성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나에게 온 그것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애초 출발지인 그 사람마저 멀게 느끼게 될까봐 움찔하면서 피하게 된다. 역설이다. 책을 사랑하면서 책 선물받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대신 도서상품권으로 부탁하는 너절한 센스까지 가지고 있다. 

그의 책을 읽게 될 줄 몰랐다. 정말 우연하게 대형서점에서 소설가가 이런 '불안'이라는 정서에 천착한다는 게 놀라워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불안이라니. 나는 충분히 불안하니 읽을 명분이 대충 섰다. 

이 책에서의 불안은 사회에서의 지위의 위계의 틀 안에서 넘치는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그 불안을 얘기한다. 즉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드리워지는 그 불쾌한 패배감이다.  세상의 눈은 물론 속물근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시선이다. 속물근성에도 재미있는 유례를 덧붙인다.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옥스퍼스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 옆에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은 관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sine nobilitate)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이 속물이란다. 명쾌하고 씁쓸한 정의다. 

불안이 결국 현대의 야망의 하녀라는 고찰은 예술이 삶의 비평을 통해 그것을 수정 보완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결국 보통은 자기가 쓰는 소설을 옹호하고 싶었지 않나 싶게 조금 뻔한 결론이 김빠지기는 했어도 사회가 사람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에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든 그의 예리한 기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런 추상적이고도 지루하기 십상인 재료를 가지고 이다지도 흥미롭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그도 분명 속물근성의 기준에서 보면 성공한 축에 속에 속할 것같다. 

중간중간 삽입된 사진들과 그림이 흑백이라 그다지 내용의 이해에 큰 도움이 안되어서 아쉬웠지만(원서는 어떤지 궁금하다), 그가 제시한 각종 도표와 상징화된 도식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로 보였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p.268 

보통의 얘기를 빌리자면 우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향수에 휩싸여 장성해서도 세상이 주는 사랑을 찾아간다. 두번째 사랑은 그 사랑의 기준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은밀하고 부끄럽다. 돈과 명예, 권력을 탐하는 것도 결국은 세상이 돌려주는 기립박수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애정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얘기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나의 얘기로. 그 강사는 그녀가 아니었다는 조금은 안심되는 얘기를 들었고 (동명이인) 그럼에도 사회적 잣대로 성공한 수많은 그녀들을 단지 더 친밀했고 나와 더 비슷했기 때문에 때로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나의 옹졸함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숙명이라는 데에 많이 절망했으며 체념하게 됐다. 안그러려면 욕망을 줄이고 속물근성을 떨어낼 도리밖에 없는데
지난하고 요원한 과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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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글이네요.
인간의 속물근성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blanca 2010-03-04 13:43   좋아요 0 | URL
그죠? 그래도 좀 덜 속물적이려는 노력은 계속 해보려구요^^

프레이야 2010-03-0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절한 질투에 너절한 센스요? 아뇨. 전혀 너절해보이지 않아요^^
질투도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말을 배우 이미숙이 했던가요.
비슷한 준거집단에서 일어나는 감정, 질투에서 보통의 불안까지, 마음에 와닿는 페이퍼에요.
질투가 긍정의 에너지로 소모되는 그날까지, 아자!

blanca 2010-03-04 13: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의 낭독의 의미를 깨닫고 지금 감동받았습니다. 아...너무 아름다운 일이다. 나도 흉내좀 내야겠다고 결심도 해보고요^^ 저는 앉아서 부러워하고 질투만 하다 세월 다 갈 것 같아요. 정신좀 차려야 겠어요--;;

저절로 2010-03-0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은 언제나 저를 쏘옥 빨아당기는 군요^^.
보통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다,여기서 맞딱드리네요..저 파리한 눈빛으로 '불안'을 얘기했다니, 음..궁금해지는군요.

blanca 2010-03-04 22:15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 저도 괜히 피해다녔는데 이 책은 재미도 있고 소장가치도 있고 여러 모로 마음에 들더라구요. 다만 여기서 반값행사하는 것도 모르고 사 버린게 쓰릴 뿐입니다. 철학을 전공한 소설가라 그런지 박학다식하면서도 센스도 있고 그렇더라구요.

루체오페르 2010-03-0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생활 속의 철학적이고 느낌있는 글 정말 좋습니다.^^

blanca 2010-03-04 22:16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감사합니다. 사실 철학은 잘 모릅니다.-..- 철학적이고 싶어할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