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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평점 :
책의 표지는 아련하게 찬란하다. 해가 저무는 중일 수도 있고 해가 뜨기 전일 수도 있다. 레이스 커튼의 아랫단은 자기 그림자와 만날 듯 말 듯하다. 표지가 제목인 <참담한 빛>과 더불어 이야기에 진입한다. 이 역설은 언제나 그래왔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슬며시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할 감정, 기억, 언어는 오곤 한다. 그게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숨을 쉰다. 정합과 논리는 이론의 지지대지 현실의 완충 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백수린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읽지 않았다. <중국인 할머니>부터 시작했다. 중국인 새할머니의 죽음에서 역주행한다. 가족은 핏줄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애초의 출발이 그런 것이 아닐 때 조금씩 서걱거린다. '나'는 거기에서 출발했고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 끝낸다. 머뭇 머뭇 과하지 않게 딱 좋은 곳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기민하게 조절한다. 새할머니, 새외삼촌, 새사촌. 그들과 감동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랬으면,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 새할머니와 교감한 '나'만의 비밀이 진실이든 왜곡이든 그것을 밝히며 그녀를 애도한다. 빛나는 달을 보며 아직 다 크지 않은 '나'를 두고 중국인 할머니가 중국 민요를 불렀던 장면, '덧없이 짧은 한 순간' 이었지만 중국인 새할머니와 당신이 데리고 온 아들이 낳은 사촌 진운이와 그렇게 셋은 잠시 '가족'을 느꼈었던 기억은 그녀 안에 쌓여 기억을 이루고 그게 삶의 과거를 만든다. 서늘하고 찬란한 이야기였다.
만난다. 낯선 이를. 그것은 우연한 조우지만 공유되는 시간의 충실성은 그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다. 충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기대는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고 실망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시차>에서 외국으로 입양 간 사촌과의 조우도 그러했고, 아버지의 몰래 한 사랑이 낳은 딸과의 만남을 그린 <북서쪽 항구>도 그러했다. 표제작인 <참담한 빛>에서 남자와 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함께 한 잠깐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소통은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지 않지만 양자를 변화시킨다. 작가의 문장은 몹시 담담하다.
영원할 듯 빛나던 순간은 사라지고 모두 종국에는 늙고 병들어 종료되는 것이 삶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사람들은 피로한 얼굴로 묵묵히 집에 차오른 물을 양동이 가득 퍼서 창밖으로 버렸다.
-<높은 물때> 중
환상은 없다. 러시아 문학 스터디를 주관했던 근사했던 첫사랑 선배도 생업에 찌들어 영업을 하고 <첫사랑> 촉망 받던 미술학도는 머나먼 타국에서 불법 민박을 운영하며 늙어간다.<높은 물때> 그러나 종국에 이 모두를 훓고 지나가도 남는 것에 대한 응시가 작가의 이야기다. "어렴풋한 빛"이 떨어지고 살아남는 이야기에 다시 표지로 돌아온다.
바람이 불고 커튼은 흔들리며 자기를 투영해 내고 자기를 응시하고 그 공간 안에 우리 시선은 떨어진다. 찰나에 아련한 과거와 두려운 미래가 중첩되며 남기는 어딘가의 현재에 발을 담근다. '참담한 빛'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통과한다. 참담해도 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