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상실을 겪고 해거름이 지면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심장이 따갑고 쓰렸다. 둘숨마다 날숨마다 알알이 아팠다. 여지없이 해가 지면 그렇게 아팠다. 물속에 빠져 영원히 허우적댈 거라 생각했는데 삶이란 놀라웠다. 1년의 시간이 흐른뒤 나는 박차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그때 겨우 아홉 살이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영웅적인 행위보다 그러한 상실을 이겨낸 조그만 내가 대견하다. 그대로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회복기제나 계기가 어떤 것이었을까? 정확히 답할 수 없다. 거기엔 어떤 신비한 요소가 분명 있었다. 삶의 골목마다 많은 사람들이 앓았다. 잘 해낼 것 같은 사람도 그렇게 보이지 않던 이들도 다 외부적인 계기든 내면적인 것이든 상실에는 주춤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잘 해내는 사람도 많았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삶의 지축을 흔드는 일을 경험하고 때로는 그것에 송두리째 무릎꿇기도 한다는 것. 그러한 일은 살아가는 일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다. 유한한 삶 자체가 이미 상실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미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모험일 것이다. 사랑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두려워서 시작도 안 한다면 그것 또한 삶 자체를 살지 않기로 결심하는 모순을 예고하는 것일 거다.

 

이 책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책이다. 동시에 성장시키는 책이다. 생명과 삶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어두운 요소를 응시하고 파헤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다. 지금 아픈 사람도 그것을 통과한 사람도 혹은 그런 사람 곁에 있는 사람도 아니 차라리 이러한 고통 자체에 대한 경험과 이해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은 반드시 읽을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우울증을 통과하고 그 우울증에서 걸어나온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울증 자체에 대한 의학적, 사회심리학적, 정치적, 역사적 이해를 도모하는 개괄서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하고 철학적 이해에 대한 설득력 있고 현실감 있는 사례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숱한 상실, 해체, 붕괴를 균형감 있게 관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어떻게 통합하여 걸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역치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저마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품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한 각자의 삶의 서사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이러한 단순한 깨달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면 타인의 고통이 보인다. 눈물은 안 흘리고 가면 편하지만 흘리면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빛나는 것이 남는다.

 

 

 

당신이 우울증을 겪으며 보내는 순간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이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겨우 숨만 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참을성 있게 견뎌 내면서 그 견딤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우울증 환자들에게 주는 중요한 조언이다. 시간을 꽉 붙들어라. 삶을 피하려 하지 마라. 금세 폭발할 것만 같은 순간들도 당신의 삶의 일부이며 그 순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p.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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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2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블랑카님의 리뷰도 너무나 좋은데 인용문도 참 좋네요.

blanca 2016-09-27 18:1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에서 좋은 대목이 너무 많아서 그 부분만 다 체크해서 다시 읽기를 해도 한 권의 읽기가 될 정도였어요.

세실 2016-09-27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숨마다 날숨마다 알알이 아프다는 표현이 제 가슴에 콕 박힙니다...전 제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편이거든요. 아닌척, 괜찮은척...
각자 삶의 영웅이란 표현 굿!

blanca 2016-09-28 12:36   좋아요 0 | URL
길을 걸어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르게 보여요. 그 많은 상실, 결핍을 다 견뎌내고 저 나이까지 이른다는 게 그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Conan 2016-09-2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작에 사놓고 아직 못읽은 책입니다.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6-09-28 12:38   좋아요 0 | URL
Conan님, 여러 다른 책과 함께 조금씩 천천히 읽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중간 이론적인 부분은 조금 지루한 대목도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책을 읽는 일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묵직한 느낌이 오더라고요...

clavis 2016-09-29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친구가 해 준 말..어두울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둠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서서히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래요 그러면서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되더라고..blanca님의 글을 읽으니까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