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SF에 푹 빠져들지는 못한다. 그 세계와 현실과의 갭 사이 어디쯤에서 항상 서성인다. 테드 창과 김초엽의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작품에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공명 지점도 결국 SF 세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세계와 현실의 접점의 보편 정서가 얘기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아, 그런데 뒤늦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로켓의 여름이었다." 이런 문장 하나로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작가라니. 존 스칼지가  열두 살에 실물을 영접한 마법사 같은 작가로 레이 브래드버리를 회고한 서문은 이 책을 다 읽고 마무리로 맞춤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읽는 일은 아쉽게도 열두 살은 아니지만(그 때 이 마법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황홀할까) 마법사가 만든 마법의 왕국에 로켓을 타고 탐사를 다녀온 느낌이다. 허무맹랑한데 그냥 무작정 설득된다. 잠들어 있던 그 무엇이 하나하나 깨어난다. 올더스 헉슬리가 브래드버리를 시인이라고 칭하자 "그런 망할 일이."이라고 응답한 에피소드를 고백한 것은 겸손이 아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이야기가 맞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 화성의 연대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설계한 화성은 지구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지구인들의 탐욕과 오만, 질서, 차별 의식을 벗어던지고 남은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지구인들은 연이어 원정대를 보내고 그곳을 또 오염시키려 한다. 그들만의 공고한 관념과 욕망은 다시 삶의 음험한 두려움과 불안, 유한한 생의 한계를 불러온다. 그의 비판 의식은 언뜻 화성과 지구를 대척점에서 대비시키는 것 같지만 화성은 결국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삶과 생의 핵심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전환기의 공간으로 위치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허공에서 너무나 사소해져 버린 지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을 조망하듯 이 작가의 렌즈로 비로소 우리와 우리가 채운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화성 연대기>의 스물 여덟 편의 이야기는 연작처럼 묘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로 상정되는 기간은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다. 그것은 화성에 정착한 지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인들이 정착한 화성으로 떠나기 전의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화성에서 이미 전멸해 버렸다고 생각한 화성인과 노인이 재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환영과의 재회,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이야기, 돌이킬 수 없는 작별들을 송환하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한 편 한 편은 브래드버리의 서정적이고 다채로운 언어들로 직조되어 인류의 거대한 출항의 서사시처럼 들린다. 


브래드버리 자신의 이야기를 빌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과거로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이다. 미래의 이야기에서 그리운 빛바랜 과거의 향수를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은 특별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면 풍등은 천천히 빛을 품고 부풀어 올랐고,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친척들은 우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보내기 싫은 반짝이는 환영이었으니까. 풍등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풍등은 빛을 품은 채로 따스한 여름밤의 별자리 사이로 흘러갔고, 빨갛고 하얗고 파랗게 물든 눈들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아무말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레이 브래드버리 <풍등>


이 책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별빛 사이로 떠가는 풍등처럼 사라져 버린다. 다행히도 풍등을 떠나 보내는 마음은 사라져 버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와 무게로 바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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