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단 한 대의 피아노가 주인공이 되는 일대기.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사건도 없이 그저 400명의 노동자가 조연이 되어 묵묵히 일 년 가까이 88개의 건반과 240개가 넘는 현이 만들어 낼 소리의 잠재태를 위하여 투신하는 이야기.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음이 한없이 먹먹해지는 이야기. 
















저자인 [뉴욕 타임스] 기자인 제임스 배런은 K0862의 성격과 인격을 형성하는 스타인웨이 공장 노동자들 곁에서 피아노의 거대한 림을 만드는 출발점부터 조율을 거쳐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연주를 하는 '독립'의 피날레까지 전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기록했을 뿐 아니라 이민 노동자들 개개의 서사, 스타인웨이 가문의 전사까지 더불어 치밀한 태피스트리처럼 엮어낸다. 피아노를 만드는 과정은 기술의 혁신, 사람들의 관심사 변화와 더불어 많이 진화했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고전성을 수호하는 여전한 수작업과 오랜 시간 공력이 들어가는 지난한 시간의 경과를 화석처럼 품고 있고 이것은 다른 제조업 노동자들과는 다른 자부심을 각 공정의 노동자에게 불어 넣는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정형화된 자동 매뉴얼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 형태를 보고 그것을 체현하는 형태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하나의 악기의 분업화된 업무를 전수한다. 스타인웨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가족을 영입하기도 하며 하나의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부족처럼 끈끈해진다. 


효율과 능률과 IT 기술이 선봉에 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과는 거리가 먼 영역에서 여전히 느리고 진중하지만 과거의 가치를 믿고 수호하려 애쓰는 분투의 현장의 목격은 그 자체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렇게 완성된 K0862의 연주자의 이름이 낯익다.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의 언어는 마치 잘 다듬어진 선율처럼 독자를 설득한다. 그의 음악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근사한 연주회를 다녀온 듯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언어와 음악이 가지는 한계를 서로 상쇄하며 이루어내는 절대 경지의 표현과 소통의 처절한 앙상블이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손으로 꼽는 값진 경험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무리해서 배운 피아노다. 재능이 없는데 재능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던 엄마와 소곡집 연습만 해도 대단한 연주를 듣는 듯 감격했던 주변인들의 과장된 박수가 얼마 안 되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설명할 수 없는 증폭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 실현하지 못한 꿈들, 그리고 결국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손가락의 기억에 대한 신비로움이 한데 섞인 것이다. 울림 페달을 밟으면 나의 원래 실력보다 한 뼘쯤은 더 그럴듯하게 들렸던 그 기만의 연주에 취했던 그 어리석었던 과장의 시간들은  가감 없이 직시하는 현실의 황량함과 대비되어 언제나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