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역주행이다. 사십 대에 갑자기 김연수의 <스무 살>을 ,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는 일. 이십 년도 넘게 지난 스무 살의 정서는 이제는 과거완료형이다. 그럼에도 나는 더 깊이 더 풍부하게 주인공들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완결되고 나서야 뒤돌아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인생의 많은 일들과 스무 살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그렇다. 하나의 사건 같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넘어지고 구르는 일, 모두가 빛난다고 최고라고 하는 시기를 통과하며 전혀 그렇다고 느낄 수 없는 그 거리감에 한없이 추워하면서도 내가 과연 서른 살과 마흔 살을 기다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더 시간들.

















정말 놀라운 것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쓴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결국 오늘날의 하루키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인간의 심연, 삶의 비의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ㄱ 심플한 문장들이 하루키스러운 그 무엇의 강렬한 울림을 더 원색적으로 제공한다. 스물한 살의 남자애가 또래 여자애와 나누는 그 살아 있는 대화들, 갑자기 튀어 나오는 너무 무겁고 진지한 삶의 이야기들은 불협화음처럼 들려야 하는데 또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우리도 그랬다. 뜬금없이 스무 살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식. 삶의 모든 철학적 진의를 이미 다 알아버린 듯한 허세. 스무 살은 그런 부조화와 모순과 불협화음의 결정체여야 스무 살 답다. 논리적이고 담담하고 겸손하다면 그건 스무 살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다. 마땅히 지워버리고 싶은 많은 부분을 품고 있어야 제법 스무 살 답다. 내 생각은 그렇다.


김연수의 <스무살>의 친구 재진과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친구 쥐는 크게 닮은 점이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재진은 온순하고 사회의 정형화된 틀에 맞는 성공의 코스를 성실히 답습한다. 쥐는 그렇지 않다. 반항하고 도망친다. 둘은 각각 주인공의 청춘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주변인으로 그려지지만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있던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결국 김연수도 하루키도 화자가 아니라 재진과 쥐를 그려내기 위해 단지 나의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을 빌려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이러한 것을 이미 우리는 다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스무 살에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아.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녀석은 아무 데도 없다구. 모두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집어 먹고 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시늉만이라도 좋아. 안 그래? 강한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종내는 고장나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향한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다. 다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숨기기도 하고 잊기도 한다. 이미 그걸 우리는 아주 어려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잊어 버리고 욕망하고 시샘하고 절망한다. 청춘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상실과 직시함으로써 제대로 복기할 수 있다.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 찰나를 복원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여전히 유효하다. 노인이 되어서 다시 스무 살의 이야기를 읽는다 해도 여전히 나는 또 가슴 뭉클할 것이다. 너무 멀어져 버려서, 너무 가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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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13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아무 생각 없이 써야지 좋은 작품이 나오나 봐요. 전 하루키 작품 중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참 좋아했거든요. ㅎㅎ

blanca 2021-07-14 08:01   좋아요 1 | URL
저 이거 얼마전에 읽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진짜 힘이 쫙 빠진 담백한 서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