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6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을 완독했다. 이로써 2012년 9월부터 시작됐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번역가 김희영 교수님의 번역 속도에 맞춘 10년여의 읽기였다. '오랜 시간'으로 시작한 책은 '시간 속에서'로 맺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을 중심으로 축조된 언어의 대성당이다. 침대에서 어머니의 밤인사를 기다렸던 소년은 어느새 '늙은 남자'가 되어 그때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자신이 평생을 바친 문학의 완성을 목전에 두게 된다. 그것은 사물의 감각을 향유함으로써 실재에 가닿게 되는 그 지난한 과정의 결실의 에피파니에 다름 아니다. 화자가 마침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뭉클하다. 시간 속에 살며 그 침식 작용과 붕괴에 대항할 수 없는 육체에 갇힌 우리들이 그것을 넘어가서 영원을 목격하게 되는 찰나를 선물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온생애를 바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에는 프루스트가 왜 이 어마어마한 시간의 연대기를 기획하게 됐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죽음 그 자체보다 이 문학작품의 완결을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는지에 대한 내밀한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주인공이 청년기에 선망해마지 않았던 게르망트 가의 귀족들이 시간 속에서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차 붕괴되어 가는 모습에 나타난 '시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그 잔인한 파괴력과 시간 바깥의 절대적인 실재의 발견으로 인한 전율의 아이러니한 대조는 프루스트가 예술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형상화다. 즉 사물의 바깥에서 구현하려 했던 의미와 사물의 이미지 앞에 놓여 있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개별의 삶들을 통해 길항하는 생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리지 않은 시간의 편린들을 모두 발견하는 찰나를 경험하게 된다.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의 각자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프루스트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발견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를 재발견해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사는 일에 바빠 놓친 그 수많은 개별적인 순간들과 빛나던 추억들의 세세한 풍경들을 연상시킴으로써 우리의 지나간, 잃어버린 삶을 재발견할 수 있는 거대한 지적 설계도를 펼쳐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홍차를 마들렌에 적실 때, 그가 사랑했던 알베르틴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샤를뤼스의 기행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그와 유사하거나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우리의 잃어버린 순간들을 재발견하고 마침내 우리 자신을 다시 읽게 되며 삶의 의미를 재발명하게 된다.
중년의 남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잠시 누군가 기억을 더듬다 비로소 나보다 두 살이 어렸던 동기의 얼굴을 떠올랐다. 나는 내가 이미 그 집단에 속하고 오히려 그 집단보다 더 늙었다는 사실을 타인을 통해 자각하고 내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깨달음에 순간 아연해졌다. 이것은 마치 마르셀이 게르망트 가의 연회에 가서 그 수많은 늙음을 목격하고 그제서야 자신이 고정적으로 일관적으로 인식했던 동일한 젊은 시절의 자기가 더이상 아님을 깨닫는 순간과도 만난다. 알베르틴이 살아있었다면 그 소녀 시절의 빛나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사정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대신 질베르트와 생 루이의 열여섯 살의 딸이 마르셀이 추억 속에 간직한 첫사랑의 소녀들의 그 과거를 정확히 환기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 소망들은 세대를 가로질러 반복될 것이다. 존재는 시간 속에 현현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영속한다. 그 시간의 바깥에서 그것을 스케치하려했던 작가는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의 소재로 승격시켰고 그것을 번역한 번역자는 비로소 우리 읽는 이들에게 그 작가의 의도와 노력의 결실을 건네 주었다.
지금 나의 순간들이 무의미로 흩어지지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책.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