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나이가 들면 현실적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치일수록 더 내 앞의 이 물리적 현실이 허깨비 같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를 가진 의식이 출현하여 '너'를 만나 때로 '우리'가 됐다 어긋나 헤어지거나 죽음으로 이별한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과정인가. 한때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스러져버리는 일이. 화성 탐사가 가능하고 손바닥 만한 전자기기에 세상 전부를 담을 수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 존재의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은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의 전설적인 SF 작가다. 폴란드 최초의 위성은 그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고 심지어 그의 이름과 작품명으로 명명한 소행성들도 있을 정도다. 몇 차례 영화화된 <솔라리스>의 원작자의 상상력은 이미 그가 2006년에 고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의 기술 발달과 그것과 충돌하는 인간들의 내적 갈등에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다. 그가 작품으로 형상화한 미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현재적이다. 우주 탐사,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마치 스타니스와프 렘의 명령어를 따르기라도 한듯 그의 이야기와 닮았다. SF가 허무맹랑한 우주 탐사나 이물감이 드는 로봇, AI에 대한 피상적 스토리에 불과하다 생각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편견을 일거에 깨부수는 개미지옥이 될 거라 장담한다.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잠시 내려놓고 스타니스와프 렘이 만든 세계의 낮은 허들만 뛰어넘는다면, 작가가 창조한 생생한 유니버스 안에서 내 내면 안 해소되지 않았던 각종 기억, 감정, 고민들이 언어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솔라리스' 행성 정거장에 탐사를 간 심리학자가 십 년 전에 자살한 연인과 조우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이 SF의 고전을 요약하기는 역부족이다. 솔라리스 행성에는 끊임없이 정형과 비정형의 온갖 형태를 만들어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유동하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이 바다와 접촉하기 위한 시도는 결국 주인공이 내면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무의식, 기억의 심연과 대면하는 일로 이어진다. 연인과의 재회는 내 기억 속 환상의 순환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 우주 정거장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의 외피를 입은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 내 환영일지도 모른다. 우주 탐사를 떠난 인간은 결국 내면 탐사의 지점으로 돌아온다.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인간의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가. 결국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불완전한 실패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신과 인간이 가지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의 마침표.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분량이나 재미로 볼 때 스타니스와프 렘의 입문서로 괜찮을 것 같다. 역시 미지의 행성 레기스 3에 착륙한 무적호 승무원들이 실종된 우주선 콘도르호를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험 이야기다. <솔라리스>의 바다의 역할을 떠맡은 미지의 형성물은 무생물의 진화로 확장된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흔히 생물, 그 중에서도 인간만이 문명을 만들고 진보한다,는 인간 중심설을 기본 대전제로 간주하지만, 죽음의 한계 바깥에서 건재하는 것은 물질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로봇과 물질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빚어질 비극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인공이 마지막 구조자의 임무를 떠안고 마침내 대면하고 마는 그 엄청난 비극의 형상은 거대한 아포칼립스에 실제 고립된 막막함을 추체험하게 한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내 내면의 투영이다. 나는 사방에서 내가 비친 거울을 본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 거울을 우주 반사경으로 보여주는 스토리 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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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라리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SF 라서 저는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알게된 솔라리스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셨다하지만,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명성이 자자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다락방 2025-03-12 10:58   좋아요 1 | URL
지금 땡투 누르고 사려다가 혹시 몰라 검색해봤더니 제가 2022년에 이 책을 샀다고 되어있네요 ㅠㅠ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5-03-12 13: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5-03-12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워낙 유명한 책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