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긍정적인 의미로 흥정과 타협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비행기의 같은 등급 좌석표도 타는 사람마다 다른 값을 지불하고, 같은 호텔 같은 등급의 방값도 개인의 구매방식, 시기, 능력 등에 따라 다르다. 같은 전화회사를 이용하여 장거리/국제전화를 걸어도 가입된 플랜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산업체에선 항상 정찰가를 다 지불하는 '묻지마고객'이 전체의 1/3이라 추정하며 비공식적으로 멍텅구리 (Sucker)라 부른다. 그들이 사실상 회사를 먹여살리는 주고객이지만 회사로부터 특별히 더 받는 서비스는 전무하며 오히려 각종 판촉행사와 할인판매에서 철저히 제외되는 처지에 있다.

맹목적 박리다매는 오늘날 더 이상 모든 회사들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이 아니다. ‘천사고객과 악마고객 (Angel Customers & Demon Customers)’의 공동저자이며 콜럼비아 대학 경영학 교수인 래리 셸든(Larry Sheldon)은 2년 전 전자제품 판매체인인 BestBuy 대표이사 브래드 앤더슨 (Brad Anderson)을 설득하여 32개 판매장을 4 종류의 천사고객에 맞게 재설계하였다.

그 천사들은 최첨단 전자제품을 줄줄 꿰는 젊은 청년층, 주로 가전제품을 구매하는 바쁜 극성엄마 (Soccer Mom), 오락 (Entertainment)을 남달리 추구하는 부유층, 그리고 경제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가정적인 가장이다. BestBuy는 악마고객들을 퇴치하기 위해 판촉물을 대폭 줄이고 반품 (Return)에 대해 재고비용 (Restocking Fee)을 물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가 높은 수익율로 이어져 올해엔 그 사업 아이디어를 68개 판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멍텅구리’라는 비공식 명칭은 ‘천사고객’이란 공식명칭으로 대체되며 정확히 구분하자면 진부분집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흥정과 타협의 전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학(원)생의 학점에 관한 간청은 대가없이도 종종 담당교수에 의해 선처되고, 정찰제가 철저히 지켜지리라 누구나 믿고있는 고급백화점에서도 매니저와의 간단한 면담으로 쉽게 할인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환자가 의사에게 의료비 할인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흥정이 통할 수 없는, 아니 흥정해서는 안될 것이 사회엔 분명히 존재한다. 조세제도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세평등에 관한 정의와 방법론적 시행세칙은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결정될 사항이지만 일단 정해진 조세법과 원칙 자체는 이념이나 특수계층의 이권과 무관하게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있다.

불행하게도 미국의 소득세법이 자국 내에서 ‘넝마’라 공공연히 불리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소신있는 조세전문가나 자성하는 몇몇 정치인들만의 넋두리는 더욱 아니다. 소득세 관련법은 그 분량이 이미 6만 쪽을 넘어섰고 (4만여 쪽에서 지난 9년 간 48% 증가) 매년 수 백건씩 변경/추가되는 각종 규정, 법규들에 대해 대다수 일반인들은 물론 적지않은 전문가들조차 무지한 상태다.

미국의 한 소비자잡지 통계에 의하면 2002년 개인소득세 납세자의 60%가 전문가에게 세금보고를 의뢰하였고 거기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거나 유료웹싸이트 등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자력으로 세금보고를 한 사람은 채 20%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세금보고를 한다하여 정확한 것도 아니다.

Money 잡지사는 1987년부터 매년 전국의 세무전문가들 중 참여를 원하는 50인을 선택하여 가상개인소득세맞추기 경시대회를 치루어왔는데 그 결과는 단 한 해의 예외없이 참가자 대다수의 망신살로 이어졌었다. 그들은 소득세로 생업을 영위하는 전문가들 중에서도 자신의 실력이 상위권에 속한다고 굳게 믿고있는 사람들로서 시험은 Take-home, Open-book 형식이었다.

1994년의 예를 들자면, 응답한 50인 중 10문제를 모두 맞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34명이 5문제 이상을 맞췄으며, 18명만이 Provisional Income (사회보장혜택에 세금을 부과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총개인소득)의 정의를 제대로 알고 있었고, 6명만 AMT (Alternative Minimum Tax: 주로 고소득층이 절세의 방편으로 소득의 일부를 면세나 감세혜택을 받는 투자를 통해 얻을 때 지나친 절세를 방지하여 최소한의 세금을 물리게 하려는 의도에서 도입한 규정으로 지금은 오히려 애매한 중산층이 피해를 보고 있어 개정이 불가피한 실정)에 관한 당해년 세법개정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오직 1명 만 면세부채권 (Tax-exempt Bonds) 이익(Gain)에 보통소득과 같은 세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늘 응답자 모두의 답이 각기 다르기 일쑤였다. 1990년엔 그들이 계산한 납부할 금액이 $6,807에서 $73,247까지 차이를 보였고 청구한 비용은 $375에서 $2,500까지였다. 또한 세무사의 비용이 정확성과는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와 고비용 세무사가 나을 것이라는 예상마저 해를 거듭하여 깨졌다.

2001년 5월 15일자 Wall Street Journal의 기사에 의하면 재무부 조사관 (Treasury Inspector General)의 감사결과 미국세청 (IRS: Internal Revenue Service)이 납세자에게 제공하는 도우미정보는 73%가 틀리거나 불충분한 것이었고 그에 반발한 IRS 자체감사를 인용하더라도 50%였다고 한다.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기관 자체에서도 제대로 답변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고 전문가들조차 헷갈려 하는 현세제에 대해 납세자가 신뢰감을 갖기는 불가능하며 그들에게 성실한 납세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인 것이다.

제각기 다른 이익집단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우후죽순처럼 제정된 법조항들로 조세평등의 대원칙은 무너지고 일관성 있는 법정신마저 실종되어 극도로 혼란스런 양상이다. 게다가 모순점을 상쇄한답시고 추가로 제정한 많은 법조항에 포함된 가산점 (Credits), 면제 (Exemptions), 예외조항 (Exclusions), 공제 (Deductions), 단계적 삭감 (Phase-out) 등의 규정들은 오히려 더욱 불공평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주로 상류층의 독점적인 합법적 탈세로 이어지는 허점 (Loopholes)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곧바로 잠재적 세수의 현격한 감소를 초래할뿐 아니라 부유층에서 중산층, 빈곤층으로 상대적 조세부담이 전가(轉嫁)되는 현상 (Shifting Tax Burden)으로 나타난다. 부유층의 실질적 소득 대비 소득세율이 중산층의 그것보다 별로 높지 않고 극상층 (Super Rich)은 오히려 낮은 기현상이 그러한 사실을 뚜렷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득세는 조정총과세소득(Adjusted Gross Income: 調整總課稅所得)을 기준으로 세율이 정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소득 납세자일수록 조정의 폭이 원천적으로 커지는 점을 고려하면 같은 세율이라해도 부유층의 실질세율은 낮게 마련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고 2000년 통계를 살펴보자. 상위 1%인 연소득 $313,000 이상의 부유층 1.3 million 납세자/가정은 전체 소득의 21%를 벌어들이고 개인소득세의 37%를 지불했다. 거기에 자동차 연료, 맥주 등에 붙는 특별세와 역진세의 성격을 띤 사회보장세, 그리고 상속세 (점진적으로 느슨해지다가 2010년에 완전 폐지) 등의 다른 연방세를 고려하면 상위 1%가 내는 세금은 25%까지 떨어진다. 즉, 실상은 무늬만 누진세이고 내막은 비례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제혜택으로 소득세를 거의 내지 않는 극빈층을 감안하면 중산층의 조세부담이 상대적으로 가장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평등한 세제의 두 가지 대표적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는 일반인이 알아낼 능력이 안되는 합법적인 탈세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일반대중을 이용한 기만적인 술법에 관한 것이다.

1. 빌 게이츠는 한 때 자신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을 매각하여 얻은 $200 million 차익에 대한 양도세 (Capital Gain Tax) $56 million 중 단 $1도 지불하지 않는 기교를 부렸었다. 그 수법은 여유있는 계층에겐 낯익은 공익신탁 (Charitable Trust)이었다. 즉, 자신이 설립하고 조정하는 자선단체에 소유주식을 기증하여 면세로 주식을 매각한 후 통상 받는 연 6%의 소득 대신 2년 간 연 80%씩 지불받는 편법으로 총 $192 million을 챙기곤 (첫 해에 $160 million, 그 다음 해에 $32 million) 곧바로 신탁을 해제함과 동시에 나머지 $8 million을 자선단체에 남기는 것이다. 결국 마지못해 기부한 $8 million조차 사실은 자기 돈이 아닌 포탈한 국세로 선심을 쓴 셈이다.

이런 사실이 수 년 후 전문기자들에게까지 소문이 나 대중의 무관심 속에 신문의 조그마한 공간을 장식할 때쯤 되면 극상층을 고객으로둔 유능한 조세전문변호사들은 이미 개발완료된 또 다른 비밀편법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절세를 돕고 있으며 IRS의 저급인력으론 법정에서 제대로 도전할만한 능력과 여유가 없는 실정이다.

2. 1986년 이전까진 모든 융자에 대한 이자상환액은 세금공제의 대상이라 그야말로 과소비가 미덕이었고, 1987년 이후 주택융자 이자상환금의 세금공제혜택 융자한도액은 $1 million가 되었다. 지금이야 대도시 근교에선 마을전체 주택평균가가 $1 million가 넘는 곳도 흔하지만 1987년 당시 통상 20%의 계약금 (Down Payment) 지불 후 $1 million 융자하여 살 수 있는 $1.2 million짜리 주택은 흔치 않았으며 그 어떤 이유로도 주택 구입시 정부의 감세혜택이 필요한 계층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집소유율을 높인다는 미명 하에 제정된 이 법안은 출발부터 극상층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모순점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소득세법엔 이런 식으로 중산층을 팔며 상류층이 최대의 수혜자가 되는 태생적 진의가 의심스러운 법조항이 부지기수다. 조만간 국회는 이 제한액수를 $1 million에서 $5 million나 $10 million쯤 아니 아예 제한자체를 없애는 규정을 슬며시 다른 법안 상정에 삽입하여 소문없이 통과시킬지도 모른다.

미국소득세제는 그 어느 기준으로도 뿌리부터 뽑고 다시 심는 일대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며 지금까지 그 대안으로 1994년에 제안된 간결하고 공평한 17% 비례세(Flat Tax)나 소득세 완전폐지와 병행한 23% 소비세(The Fair Tax) 등이 있다. 계산이 빨라 반대하는 상류층과 막연히 변화에 대해 불안한 중산층, 그리고 뭘 모르는 하류층에 의해 논의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대안들을 비롯하여 일반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증여/상속세(Gift/Estate Tax), 재산세 (Real Estate/School Tax), 양도세 (Capital Gain Tax) 등이 얼마나 불공평한지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주: 나는 세무전문가가아니며 경제/회계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이 글은 단지 일반 납세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미국에 거주하며 겪고 느낀점을 종합하여 밝힌 개인적 견해이며 통계수치와 사실적 인용은 진실에 입각한 것임을 밝힌다.

Copyright (c) 2005 가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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