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주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68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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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하다기보다는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열세 살 소년 마르첼로는 자신의 남다름을 인지하고 괴로워한다. 이후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정상성에 대한 열망, 모두가 인정하는 일반적 규칙에 부합하려는 바람. ‘다르다’는 것이 ‘죄’를 의미하는 순간부터 그의 유일한 소망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남들과 같이 파시즘을 추종하며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정상’을 추구했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비정상으로 구성된 표면적인 정상이었다.(알라딘 책 소개글)


이 작가의 앞서 나온 책 <경멸>이 딱히 내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저 소개글 때문이었다.

정상성과 비정상의 비교와 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

그것이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와 연결되며 주인공의 삶이 펼쳐진다면 왠지 스펙트클하게 재밌지 않을까라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 그런데 알베르토 모라비아라는 이 작가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문학의 대표자라고 평가받는다는걸 그 새 또 까먹었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둔 책일 것이라는걸 망각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어디 그렇게 스펙터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앞뒤가 딱 맞아 들어가게 이해되는 삶은 또 어디 있을까?


앞에 봤던 <경멸>이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남자 주인공의 경멸스러운 행동이 정말 너무 경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내 독서인생 남자 주인공 중 찌질남 1위로 단번에 등극했으니까....

이 책 <순응주의자>역시 주인공이 정상성에 집착하게 되는 계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는 뭔가 남들과 다른 거 같아라는 강박을 경험하지만 또 모두가 그것에 집착적으로 시달리는건 아니다. 하지만 또 분명한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별거 아닌 경험이 어떤 이에겐 유난한 집착으로 남게 되는 경우 역시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의 강박은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어디 한 군데씩은 뒤틀려 있으니까.....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 정말 너무 이 인간 현실적이다.

정상성에의 집착으로 대세를 따라 파시즘 정부에 참여하고, 남들과 같이 결혼을 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싶어하고, 그 과정에서 뭔가 일탈인듯한 면이 보일 때마다 자신을 다잡고하는 모습을 보면 약간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드는 우리의 주인공!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이 놈 도대체 뭐야라는 생각을 하게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분명히 강박이라고 했는데, 한 눈에 반한 여성이 등장하자 자신의 그간의 정상성에의 집착을 모두 던져 버리고 바로 올인할 태세를 갖추어버린다.

심지어 거기에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말이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인간으로의 태세 변환이 이렇게 빠를 수가.....

그렇다고 그의 그 충격적인 사랑이 공감이 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주인공은 사랑을 말하는데 독자인 내가 느끼는건 지독한 자기애다.

그러므로 예기치 못하게 사랑이 끝났을 때도 주인공은 다시 정상성에 집착하던 자신으로 다시 확 돌아가버리니말이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매력은 눈꼽만큼도 안 느껴지고, 공감하기는 더더욱 힘들고,

그래서 책장은 점점 안 넘어가고.....

그런데 이상하게 안 읽히는 이 책을 중간에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도 바로 이 주인공에 있다.

그래 니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이런 기분이랄까?

파시즘이 끝장났을 때, 너의 인생이 뿌리부터 모두 흔들릴 때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할거니라는 궁금증에 결말까지 책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말은 좀 충격적이었다.

인생 한방에 갈 수 있어. 네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야라고 말하는 듯해서....


읽은 두권의 책이 이런데 내게 다시 이 작가의 책이 출간되면 읽을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네 읽겠습니다이다.

읽을 때는 주인공 욕을 바가지로 하며 읽고 있는데, 두고 두고 생각이 난다.

아 정말 인간이란......

저 말줄임표에 들어갈 수 있는 무수한 말들이 바로 이 작가의 뛰어난 점이라고 생각하면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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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1-04 02: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다른 소설에서도 보기는 했지만, 만화영화에서 본 사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거기에 나온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평범하게 사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해요 사람을 죽이면서 그 마을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어한달까 남 모르게 다른 사람을 죽이고 손만 가지고 다녀요 여성을 죽여요 사이코패스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사는 게 좋겠지 하는 건 사이코패스하고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래야 할까 하는 사람도 있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11-05 00:25   좋아요 0 | URL
왠지 으쓱하네요. 사람을 죽이고 손만 가지고 다닌다니.... ㅎㅎ
사람이란 언제나 남들과 다르고 싶어하면서도 또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동시에 꿈꾸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 간극이 지나치게 커지면 문제가 생기는거겠죠. 이 책의 주인공은 그런 간극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존재였다는 생각도 합니다.

붕붕툐툐 2021-11-04 07: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상한 매력이 있는 작가네요~ 다음책도 선택을 받았다니 너무 궁금하긴 한데, 또 한 편 손이 안갈 거 같은 느낌이 막 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어디 한 군데씩은 뒤틀려 있으니까....‘에 완전 공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게 결국은 자기애일 때가 많은 것도 공감이용~ 하~ 왠지 읽을 것 같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11-05 00:26   좋아요 0 | URL
툐툐님 말이 정답인듯합니다. 뭔가 헷갈릴때는 역시 읽는게 좋을듯요. 언젠가는 이 작가분이 최애작가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ㅎㅎ

새파랑 2021-11-04 0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인공이 좀 고구마 인가 보네요 ㅋ 전 경멸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도 욕이 바가지로 나오는 군요~! 기대됩니다~!!!

바람돌이 2021-11-05 00:27   좋아요 1 | URL
아 고구마랑은 좀 달라요. 본인도 본인의 생각에 갑갑해하지 않고, 그걸 극복하려는 생각도 없고, 읽는 사람도 딱히 이 인간이 변할거다라는 기대가 안생기고요. ㅎㅎ
재미있지는 않은데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는 이 미묘한 감정은 뭘까요 도대체.... ㅎㅎ

레삭매냐 2021-11-04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보셨다면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도 한 번 추천해
드립니다.

전 책을 보기 전에 영화를
만났는데 책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답니다.

바람돌이 2021-11-05 00:29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말씀 듣고 영화를 찾아봤는데요. 원작과 상당히 다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몇몇 장면의 문제가 아니라 마르첼로라는 인간에 대한 해석 자체가 다르지 않나 싶어요.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 보기 쉽지 않던데 그래도 조만간 찾아보겠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

scott 2021-11-04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 마르셀로의 모습을 영화에서는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 저도 추천!🖐^^

바람돌이 2021-11-05 00:30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에 이어 스콧님까지 추천하시니 진짜 안볼수 없겠네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찾아서 보겠습니다. ^^

coolcat329 2021-11-04 2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ㅋ 저는 찌질하고 이상한 인간들 나오는게 소설도 영화도 좋아요. 물론 현실에선 싫지만 소설속에서는 악인 찌질 비굴한 인간들에게 더 강하게 끌리더라구요.

제목이 왜 순응주의자인지 알겠네요.ㅎㅎ

바람돌이 2021-11-05 00:32   좋아요 0 | URL
원래 소설이나 영화가 찌질하고 이상한 인간들의 얘기죠 뭐.... 그런데 이 책속 인물은 진짜 현실로 옆에 있는 인물같기도 하고, 또 제 맘속의 어떤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래서 불편한 기분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별 매력은 없어서 또.... ㅎㅎ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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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느낄 때는 많지만 그걸 절감할 때가 장례식장에 갈 때이다.

고인에게 절을 하고 상주와 맞절을 한 후 상주는 으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말은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내지는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 말을 할 때마다 낯이 뜨겁다.

건네는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황망한 죽음을 앞에 둔 이들에게 너무도 형식적인 매뉴얼같은 말인지라 그렇다.

또한 장례식장의 상주에게 고인의 죽음이 너무도 황망하고 큰 슬픔일경우에는 도저히 저런 매뉴얼같은 말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어 어려울 때가 많다.


오래 전 친정 올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친정 부모님과 함께 문상을 갔다.

사돈어른의 연세가 돌아가시기에는 지나치게 젊어 황망한 죽음이었다.

절을 하고 눈물바람인 올케를 보며 어떡해야 하나 하는데, 절을 하고 난 친정 어머님이 한마디 말도 없이 올케의 어깨를 안고 다독이기만 하시는걸 보았다.

그 순간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불편할 수도 있는 관계를 넘어서 그냥 서로의 마음이 닿는구나

올케의 표정에서 진짜 위로를 받고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황정은 작가의 첫 에세이를 읽으며 내내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마디씩 남기는 말들


건강하시기를.

부디. (23쪽) 

이 평범한 문장에서 마음에 더 와닿는 것은 건강하시기를이 아니라 한 줄 더 만들어 덧붙이듯 건네는 '부디'라는 저 단어다. 

정말로 작가는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저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마음이 느껴지는거다.

앞의 글들을 읽으면서 아직 어두운 새벽부터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인사일수도 있고,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두에게 보내는 마음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책을 읽는 이 순간에는 나에게 보내는 인사로 와닿는것이다. 


세월호는 아마도 우리 세대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할 트라우마지만 언제나 현실의 나는 무력하고 그래서 더 참담하다.

목포를 갔다온 작가가 쓴 일기를 보면 딱히 한 일이 없다.

작가의 탓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서 누구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저 잊지 않음을 기억하려는 작은 노력일뿐이고 , 이 커다란 아픔 앞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만 더할 뿐....

나라면 그곳에서 자괴감만 잔뜩 안고 왔을 것 같은데, 그래도 작가는 

용기를 내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라고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그저 보이는 것들은 담담하게 쓰며 

"그런걸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왔다"(113쪽)라고 쓰고 있다.

그런걸에 담긴 그 마음이 와닿아 울컥하기도 했다.

중요한건 역시 마음, 진심이다.


작가는 이 일기 속에서 타인에게 던지는 연민과 공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아픔을 얘기할 때도 어렸던 자신에게,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자신에게 같은 연민과 공감을 표현할 줄 안다.

결국 내가 나를 보듬기 위해서도 타인에게 공감하고 연민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은 필요하다는 것을 작가의 글 전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내 옆의 타인을 사랑하는 것.

작가가 글로 오늘의 나를 위로해 주었듯, 글을 못쓰는 나는

나의 말과 나의 표정과 나의 몸짓으로  내 옆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음을,

그것이 나를 위로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온전한 방법임을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황정은이란 이 예민하고 섬세한 작가의 소설만이 아니라 에세이도 나의 최애작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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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04 0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이 글을 못쓰시다뇨
앞에 언급 하신 장례식장의 언어 표현 문제 정확하게 지적 해 주셨습니다

상대를 배려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언어를 어찌 표현 할지 모르고
SNS상에 외계어들만 써서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말 조차 나누지 못하는게 현실이네요


바람돌이 2021-11-04 01:20   좋아요 3 | URL
이 밤의 칭찬에 또 혼자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습니다. ㅎㅎ
하지만 문제를 지적하는건 잘했는지 모르지만 그걸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항상 뭔가 모자란다는, 그래서 늘 글이 맘에 안들어 막힌다죠. 느끼는걸 모두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작가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1-11-04 00: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작가 만큼 못쓰신다는 말씀인 거죠?ㅋㅋㅋ
바람돌이님 글 못쓰신다는 말에 저도 좀 놀랐습니다!!!
헌데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올케분은 시어머님의 포옹에 뜨거운 위로를 받으셨을 겁니다.두고두고 잊지 못하실 거에요.
제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는데 엄마와 각별하게 친하셨던 분들 그리고 내곁에 친했던 이웃집 언니들이 찾아와 말없이 포옹을 해주던데..아!! 정말 두고두고 고마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훗날 내 딸들에게도 나의 지인들이 찾아와 그저 안아주는 걸로 위로를 해주었음 좋겠다!!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바람돌이 2021-11-04 01:24   좋아요 3 | URL
설마요. 사실 아무 생각없이 황정은 작가처럼 글을 못쓰지만이라고 썼다가 후다닥 지웠습니다. 감히 어디다가 비교를 하면서 말이죠. ㅎㅎ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말이 또는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될지에 대해서는 좀 고민도 하고 노력도 하는거 같은데 저의 경우 여전히 안되는건 싫은걸 또 표현을 잘하는거요. 그거 고쳐야 되는데 좀 안돼요. ㅠ.ㅠ
우리 딸들에게 그렇게 위로를 전해줄 사람이 많으려면 부지런히 노력해서 제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죠? 열심히 착하게 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희선 2021-11-04 02: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장례식장에서는 무슨 말 못하겠습니다 말하기보다 가만히 손이라도 잡는 게 나을지... 바람돌이 님 친정 어머님은 그때 딱 맞는 위로를 하셨네요

다른 사람한테 위로가 되는 글은 그렇게 쓰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걸 그대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알려고 하면 조금은 알겠지요

이 책을 바람돌이 님이 에세이에서 최애작으로 여기신다니, 황정은 작가가 기뻐하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11-05 00:34   좋아요 0 | URL
황정은 작가님이 제 맘에 딱좋은 글을 계속 써주셔서 제가 감사하지요. ㅎㅎ
타인에 대해 완전히 안다는건 불가능하겠지만 이해하고자 노력하는게 중요한거겠지요.
 

그는 범죄를 대가로, 혹은 정당화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몰랐다면 범죄였을 것을 대가로 치르면서 가까스로 그렇게 했다.
그 자신에 관한 한 그는 그러한 정당화가 부족하지 않으리라고확신했다. 그는 또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을 확실하게 막아주는 콰드리의 죽음 덕분에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시민이될 것이며, 자신의 인생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느리지만 확실히분명하고 견고해질 거라 생각했다. - P371

다른 자들이란, 그가 알기로는 그렇게 살해를 범함으로써 복종했다고 생각한 정부, 정부가 구현하는 사회, 그리고 사회의지침을 수용하는 국가였다. "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명령에 따라 이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정당화가 오를란도 요원에게는 충분할지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부, 사회, 국가의 완전한 성공이었다. 외적인 성공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결정적인 성공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일반적으로 공통 범죄라고 생각되는 것이 필요한 방향으로 가는 긍정적인 조치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를 좌우하는 세력 덕분에 가치의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부정이 정의가 되고, 배신이 영웅주의가 되고, 죽음이 삶이 된다. 그는 이 시점에서 거칠고 신랄한말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할 필요성을 느꼈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 P372

"하지만 마르첼로, 우린 모두 순수했어. 나도 순수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순수성을 잃지. 그게 정상이야."
- P430

즉 리노를 만난 날 이후 추구해온 기만적인 신기루가아니라 이미 원죄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 하는 숨가쁘고 헛된 열망이 정상이었다.  - P431

그는 자발적으로 고집스럽고 어리석게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슬과 훨씬 더 무가치한 의무에 묶어두었는데,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정상성이라는 신기루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슬은 끊어졌고, 의무는 소멸되었으며,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 자유로 무엇을 할지 알게 되었다. 그 순간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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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놓았던 순응주의자를 이어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 책장이 안 넘어간다. 이 작가님 경멸도 그렇더니 이 책 역시...ㅠㅠ
그러다가 아래 문장보고 빵 터졌다.
정말 이상한 인간이야.
여자에게 구애하면서 저런 사랑의 정의라니...
백만번 차이고도 남을터다.

그는 오래 전에 자신의 구애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던 여대생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랑은 봄에 초원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암소와 그 위에 올라타기위해 뒷발로 서는 황소라고 비통하게 대답했던 일이 생각났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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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0-31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저는 패스한 책입니다.

바람돌이 2021-10-31 20:26   좋아요 1 | URL
ㅋㅋ 패스..
이게 잘 안읽히고 뭔가 저랑 안 맞다싶은데 또 패스하기엔 그냥 끌리는 뭔가가 있달까요?

붕붕툐툐 2021-11-01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람돌님~ 하이욤!!✋ 안 읽히는 책도 가끔 빵터지는군요!! 왠지 저도 진도가 안 나갈 거 같긴 합니당~~

바람돌이 2021-11-01 22:12   좋아요 1 | URL
이 작가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헷갈려요. 읽을 때는 힘든데 읽고 나면 묘한 여운이 오래 남는.... 방금 다 읽었는데 결말때문에 계속 생각이 날듯합니다.

붕붕툐툐 2021-11-01 22:21   좋아요 0 | URL
아~ 그럼 읽어야할 듯!ㅎㅎ 완독 축하드립니당~~😊
 

달도 아직 지지 않은 새벽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내려오는 열차를 생각하는일은 어쩐지 우주를 생각하는 일과 닮았다. 하지만 그건 우주의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애쓴다. 저 바깥에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지금 지나간다.  - P23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보건의료계 노동자들과 휴업 상태에서도 매월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자영업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2월 1일이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한파가 가장 심할 때부터 이어져온 청와대 앞 노숙 농성을 중단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 P41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 P76

 이를테면 2019년에 상자 속으로 팔을 넣어바닥에 남은 포스트잇을 꺼내 포장을 벗기면서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생생한 이 상품의 제작년도가 2003년, 2002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까.
썩지 않는구나.
정말 썩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포스트잇 플래그를 꺼내 쓴 뒤로는 가급적 연필로 표시를 남긴다.  - P88

원고 작업을 할 때마다 종이책을 받아들 때를 그 작업이 끝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종이책을 집에들이고 종이책이라는 결과물을 향한 작업을 하며 종이책을 읽는 동안 연필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지구 어딘가에서나무를 베고 썰고 분쇄해 끝장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라는것도 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내가 유해하다. 그래도 그래도.
- P95

는 비탈에 잠시 머물렀다. 아파트 바로 뒤편으로 820톤,
1000톤 골리앗 크레인이 솟은 비탈에서 삼호아파트를 등진 채 허사도 방향으로 서면 거기에서도 세월호는 보인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저기 항만에 거치된 녹슨 배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그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왔다.
- P113

그 장소의 현재에 잠시 섞여 과거를 생각하고 거기 살던 사람과살았을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시 현재를 생각하고내가 있던 장소를 생각하게 된다. 에밀 졸라는 많은 소설을그렇게 썼고 나는 그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특별한산보를 경험했는지, 그 산보들 덕분에 그의 소설을 새삼 특별하게 경험하게 된 것인지를 이제 구별하지 못한다.
- P127

한국계 미국인과 일본계 미국인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해 공격했다는 백인 남성의 범죄 소식을 인터넷 기사로보았다. 그 기사에 중국인도 아닌데 왜 공격하느냐는 댓글을 적은 한국인을 보고 저런 걸 쓸 수 있구나 생각하느라고 아침 시간을 보냈다.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들.
- P128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 P133

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어릴때 길을 잃어 길을 찾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뒤 길을 발견하고 길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뒤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길을 찾는 방법이 매번 그렇게 된다면 그건 매우 좆되는 길이라는 걸 왠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잃지 않기를.
천둥 사이에 빌고,
- P160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 P164

내 몸을, 내 성별을, 말하자면 내 몸이 여겨지는 방식을, 여자아이들은 그런 일을 겪는다. 일개인일 뿐인 내가 그것을 다어떻게 아느냐고? 여자아이들은 안다. 록산 게이의 말 대로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32면 - P177

 헝거는 추천사를 쓴 정희진 선생의 말 그대로 자서※이며, 어떤 종류의 자서에 자서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답신을 쓰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무심코 뒤적인 그 책에서 그 말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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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6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번째 인용하신 글을 읽으며 은하철도 999 생각 났었는데요..^^;;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황정은의 글은 처음인데 말이죠..

바람돌이 2021-10-27 08:47   좋아요 0 | URL
라로님 얘기 들으니 황정은 작가 이미지가 은하철도의 철이 캐릭터랑 겹쳐보이는데요. ^^
저는 이 책 너무 좋아서 책의 여운에서 못빠져 나오고 살짝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라로님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