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아직 지지 않은 새벽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내려오는 열차를 생각하는일은 어쩐지 우주를 생각하는 일과 닮았다. 하지만 그건 우주의 일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이 애쓴다. 저 바깥에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지금 지나간다.  - P23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보건의료계 노동자들과 휴업 상태에서도 매월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자영업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2월 1일이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한파가 가장 심할 때부터 이어져온 청와대 앞 노숙 농성을 중단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 P41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 P76

 이를테면 2019년에 상자 속으로 팔을 넣어바닥에 남은 포스트잇을 꺼내 포장을 벗기면서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생생한 이 상품의 제작년도가 2003년, 2002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까.
썩지 않는구나.
정말 썩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포스트잇 플래그를 꺼내 쓴 뒤로는 가급적 연필로 표시를 남긴다.  - P88

원고 작업을 할 때마다 종이책을 받아들 때를 그 작업이 끝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종이책을 집에들이고 종이책이라는 결과물을 향한 작업을 하며 종이책을 읽는 동안 연필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지구 어딘가에서나무를 베고 썰고 분쇄해 끝장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라는것도 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내가 유해하다. 그래도 그래도.
- P95

는 비탈에 잠시 머물렀다. 아파트 바로 뒤편으로 820톤,
1000톤 골리앗 크레인이 솟은 비탈에서 삼호아파트를 등진 채 허사도 방향으로 서면 거기에서도 세월호는 보인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저기 항만에 거치된 녹슨 배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그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걸 보고 왔다.
- P113

그 장소의 현재에 잠시 섞여 과거를 생각하고 거기 살던 사람과살았을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시 현재를 생각하고내가 있던 장소를 생각하게 된다. 에밀 졸라는 많은 소설을그렇게 썼고 나는 그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특별한산보를 경험했는지, 그 산보들 덕분에 그의 소설을 새삼 특별하게 경험하게 된 것인지를 이제 구별하지 못한다.
- P127

한국계 미국인과 일본계 미국인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해 공격했다는 백인 남성의 범죄 소식을 인터넷 기사로보았다. 그 기사에 중국인도 아닌데 왜 공격하느냐는 댓글을 적은 한국인을 보고 저런 걸 쓸 수 있구나 생각하느라고 아침 시간을 보냈다.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들.
- P128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 P133

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어릴때 길을 잃어 길을 찾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뒤 길을 발견하고 길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뒤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길을 찾는 방법이 매번 그렇게 된다면 그건 매우 좆되는 길이라는 걸 왠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잃지 않기를.
천둥 사이에 빌고,
- P160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 P164

내 몸을, 내 성별을, 말하자면 내 몸이 여겨지는 방식을, 여자아이들은 그런 일을 겪는다. 일개인일 뿐인 내가 그것을 다어떻게 아느냐고? 여자아이들은 안다. 록산 게이의 말 대로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32면 - P177

 헝거는 추천사를 쓴 정희진 선생의 말 그대로 자서※이며, 어떤 종류의 자서에 자서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답신을 쓰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무심코 뒤적인 그 책에서 그 말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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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6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번째 인용하신 글을 읽으며 은하철도 999 생각 났었는데요..^^;;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황정은의 글은 처음인데 말이죠..

바람돌이 2021-10-27 08:47   좋아요 0 | URL
라로님 얘기 들으니 황정은 작가 이미지가 은하철도의 철이 캐릭터랑 겹쳐보이는데요. ^^
저는 이 책 너무 좋아서 책의 여운에서 못빠져 나오고 살짝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라로님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