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논문은 아니고,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또는 하버마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 중에서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시간이 더 있고 지면의 여유가 좀더 있었다면 한 2-3명의 정치철학자들을 더 보태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 3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 -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20세기 유럽 정치철학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유럽 정치철학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상이한 응답의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펴볼 3명의 정치철학자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정치적 지배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들은 모두, 근대 정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정치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근대 정치 구조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결과라는 고발로 제시되거나(조르지오 아감벤), 정치란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자크 랑시에르), 또는 모든 정치 투쟁, 모든 권리에 대한 옹호 투쟁은 인정을 둘러싼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규범적인 원리의 정초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악셀 호네트).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 사회이론이 가능한지, 또 지배자들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평가해보기 위한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준다. 현실의 가장 민감한 지점, 가장 깊고 예민한 상처를 진단하고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하위분과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현실의 마주침, 철학과 현실의 상호침투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이들의 작업은 오늘날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매우 드문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묵시록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1941~)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배출한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정치철학자로서 아감벤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과 발터 벤야민의 종말론적인 폭력의 비판을 밑바탕에 두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권력론,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 등을 비판적으로 전유하여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정치적 주체의 본성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 근대정치철학의 규범적 기초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로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벌거벗은 생명”이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켜 서양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비오스bios”와 “조에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비오스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여기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신의 법에서 배제),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인간의 법에서 제외), 그의 삶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 “조에”, 호모 사케르가 법적ㆍ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과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결합하여 󰡔인권선언󰡕(1789)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이 제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할 때의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벌거벗은 생명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푸코가 말하듯 생명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룬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아감벤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인간은 주권적 권력에 포섭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철학의 규범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로 주권자의 생명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예속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그는 주권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준거로 삼고 있다. 그가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이다. 우선 첫째,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조에”와 “하플로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수용소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장소 역시 일종의 수용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법적 기관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에 참사를 빚은 여수의 외국인보호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수용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의 작업은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토대인 인권의 원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혁신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그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기초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법과 폭력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와 현대의 서구 자유주의를 본질적으로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현대의 난민 보호소 등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과연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 가능할까, 또 어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악셀 호네트와 인정 투쟁


  아감벤이 근대성(또는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비판이론의 제 3세대 대표자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1949~)의 “인정투쟁Kamp um Anerkennung” 이론은 반대로 근대성이 이룩한 핵심적인 성과, 곧 계몽주의 이래 서양 사회가 이룩한 합리적ㆍ도덕적 진보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가 제안한 이론적 전회, 다시 말해 주체 중심적인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출발한다. 곧 이들에게 주체는 타인들과의 관계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며, 주체가 지닌 언어적ㆍ실천적ㆍ반성적 자율성은 상호주관적 규준들을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된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이 지나치게 보편적 화용론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규범적 토대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곧 주체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 및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실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사회적 투쟁들 속에 담겨 있는 규범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 이론의 이러한 난점 내지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이래 호네트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인정투쟁 이론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철학자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호네트의 출발점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서나 사회가 성립하는 데서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데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이 개인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ㆍ발전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그는 인정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한다. 곧 한편으로는 엄마와 아이나 연인들 간의 사랑과 상호배려에서 표현되는 정서적 차원의 인정의 관계가 있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성원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적 인정의 관계가 존재하며, 분업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 내부에서 동료들에 의한 사회적 평판이라는 인정 관계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인정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들의 정체성 형성에는 역시 독립된 주체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상호주관적인 사회화의 조건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관계의 정치적ㆍ사회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주목하는 것은 인정의 반대, 곧 무시의 경험이다. 인정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으로 개인이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시가 특수한 한 개인에 대해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에 대해 구조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가령 식민지 주민들이 정복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소수 인종, 소수 종족들이 한 사회의 지배 인종, 종족들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것,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멸시와 차별대우, 따돌림 등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때 인정투쟁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합당한 규범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해줄 수 있으며, 역으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도 제시해줄 수 있다. 각각의 사회 성원들이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 또는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사회는 병리적이고 부당한 사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가령 영미권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발전시킨 “인정의 정치학”보다 좀더 규범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론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의 맥락에 따라 전개된 인정의 정치학과 달리 적절한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이는 초역사적ㆍ초문화적인 규범적 기초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의 화용론 중심의 상호주관성 모델을 인간학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부정적 경험을 자신의 비판이론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비판이론이 지닌 해방론적 함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호네트 자신은 인정투쟁 이론이 지닌 정치철학적 측면들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인정투쟁 이론의 규범적인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호네트의 작업에서는 인정투쟁 이론이 사회구조 또는 사회제도들의 형성과 개조, 변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이 비판이론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보완ㆍ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호네트는, 스승인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어두운 측면, 곧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해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얼마간 맹목적이다. 한나 아렌트 이래 또는 비판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래 현대 철학자들 중 상당수가 근대성에 내재한 도착성의 뿌리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정투쟁 이론이 정치철학으로서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 점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원리로서 정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철학계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스승인 알튀세르에 대한 지적 반역을 감행한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1965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에 공저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을 했던 만큼 이러한 평판은 얼마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1980년대부터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1987), 󰡔불화La mésentente󰡕(1995) 같은 독창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알튀세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곧바로 현대 철학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통찰, 곧 정치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통찰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la politique”와 “치안/통치la police”를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치안/통치는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인 내지 철학자와 대중 사이의 근원적인 불평등을 가정한다. 반면 정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누구나 다 동등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심지어 지적인 능력에서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은 한 사회의 구조와 성립 근거를 밝히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해명하는 것, “치안/통치”를 확립하는 것, 곧 위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모순이며,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통치”,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와 근원적인 불평등의 질서 중에서 우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을 가정하는 “치안/통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를 지배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지배자와 근원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를 자신의 존립의 기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잘못/왜곡tort”이라는 중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치안/통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평등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동등성 때문에 비로소 “치안/통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치안/통치”의 질서는 사회 성원들에게 자원과 권한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안/통치”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전복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용어, 곧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통치”가 조우하는 장소, 곧 “치안/통치”의 잘못과 왜곡이 드러나는 장소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치안/통치”의 균형잡힌 질서를 뒤틀고 균열을 낼 때, 그것의 잘못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고정된 불변의 장소,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등장할 때마다, “치안/통치”의 도덕적 잘못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 존재론적 질서의 왜곡을 보여줄 때마다 형성된다. 아니 그러한 보여줌의 사건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계급인지 여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자유 빈민들(“데모이demoï”)이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나섰을 때 그들이 곧 정치적 주체였으며, 또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1968년에 학생-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 역시 정치적 주체들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주체란 어떤 존재론적 규정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 따라 규정된 존재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탈정체화”, “탈분류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의회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탈민주주의post-démocratie”라고 부른다. 곧 “치안-통치”의 “잘못/왜곡”을 드러내줄 수 있는 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정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산술적 합의(“선거”)로 환원되는 곳, 전문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또는 근대성) 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감벤이나 알랭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긍정적인 함의들을 인정하는데, 이는 이 제도들이 바로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도들 덕분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제도, 어떤 특정한 정치유형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정치 제도 속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적 원리로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처럼 혁명적 전통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정치를 사회적 질서와 대립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에 관한 사고를 실재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와 근본적으로 절연시키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의 철학이 지닌 중대한 문제점 중 하나다. 게다가 이는 민주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도 얼마간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제도들에 대한 객관적 규정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itournelle 2007-05-1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명의 철학자 모두 알고 있어서 반갑네요. 아감벤과 랑시에르는 최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호네트는 그의 스승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그닥 끌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에로이카 2007-05-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랐는데 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국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요즘 이 생각 저 생각 많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 "훌륭한!" 글입니다.)

질문 하나만 드릴께요.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다룬 부분에서, 인정투쟁의 존재는 한 사회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발마스님의 해석인가요, 아니면 호네트의 말인가요?

노무현 정부 이후 더욱 활성화된 우파들의 정치적 동원도 나름대로 무시에 대한 '인정투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렇게도 볼 수 있다면, 인정투쟁의 존재가 사회의 정의로움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이건 반민주화 세력이건 "시민(-주체)"라면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상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독재 시대의 끄나풀들이 상대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인정투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에 참여한다면, 이것은 그 사회의 정의로움 여부와는 별 상관 없는 것 아닌가요?

분명 제가 든 이 "우파들의 준동"은 극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정투쟁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고, 이는 발마스님의 글에서 말씀하신 논지를 지지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제가 "인정투쟁"이 뭔지 잘 몰라 무식한 질문을 한 것일 지도 모르지만,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

balmas 2007-05-1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나무님/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아감벤과 랑시에르를 좋아하는 분들은 하버마스나 호네트를 좀 덜 좋아하는 경향이 있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구요. ㅎㅎ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들 모두 중요한 이론적 작업을 하고 있고 또 그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는 없겠죠. ㅋㅋ 너무 "모범답안"인가요? ^^;;
에로이카님/ ㅎㅎ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훌륭한 글"이라는 말씀은 그냥 주례사 같이 들리는데요. ^^;
그리고 적절한 질문을 제기해주셨는데요, 사실 그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죠. 그래서 호네트도 최근 출간된 논문집에서 이 문제를 실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에로이카님의 질문을, 인정투쟁이라는 기준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니냐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질문에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보편적인 원칙일수록 얼마간 구체적인 쟁점들에서는 형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겠죠. 가령 "인권"이라는 원리 역시 지극히 다양한 정치적 목적들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죠. 이건 인정 또는 인정 투쟁이라는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적인 남용이나 오용의 문제를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죠. 요컨대 "그릇된" 인정과 "참된" 인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호네트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인정에 대한 요구에서 제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부당한 무시를 당했다고 말하는지, 그들이 인정을 요구하면서, 또는 타인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제시하는 기준이나 원리가 실제로 제대로 지켜지거나 충족되고 있는지 평가해보면 된다는 것이죠. 가령 반민주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인정의 권리를 주장할 때 무엇을 주장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죠. 표현의 권리를 이야기한다면, 과연 그들의 표현의 권리가 침해를 당했는지 따져보면 될 것이고, 이런저런 정치적 억압에 대해 불평한다면, 과연 그들이 부당한 억압을 당했는지 살펴보면 되겠죠.
반대로 자본가들 또는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이나 자신의 직원들을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 동원하면서 제시하는 약속이나 보상 같은 게 있을 텐데, 이것 역시 "인정"의 한 형태가 되겠죠. 이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약속한 것들이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그것이 노동자들이나 직원들의 정체성 실현을 위해 충분하고 정당한 조건들이 되는 것인지 따져볼 수 있겠죠. 만약 그것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들이 제기하는 인정이라는 것은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인정, 그릇된 인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는 인정의 원리가 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ㅎㅎㅎ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을 텐데요, 그건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에로이카 2007-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 맞아요. 말씀하신대로 제 생각에는 "그릇된" 인정과 "참된" 인정의 구분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양자의 구분이 초기 알튀세르식의 과학(참)/이데올로기(거짓) 같은 분할과 같은 형태로 가능한가 하는 거거든요. 인정 요구의 진정성을 "따져보는" 과정 끝에 내리는 답이 이렇게 투명할 것 같지는 않고, 또 그 투쟁에 얽혀 있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지 않을테구요. 그 과정 자체가 정치적 투쟁(특히 서로 다른 진리-주장들 간의 충돌)을 동반하는 것 아닌가요? 이걸 인정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 간의 구분은 상대적, 정치적인 것이 다시 되어버리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요... 제 머리 속의 원을 나선형으로 바꿔주실 수는 없을지? ^^

아, 또 이렇게 질문 드릴 수도 있겠네요. 인정투쟁이 없는 사회도 있는가? 없다 있다가 아니라, 적다 많다로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훌륭한" 글이라고 한 것은 주례사 아니구요... 정말 이 글을 보니까, 철학 공부를 해야할 필요와 욕망이 느껴져서요... 철학 쪽은 아주 오랫동안 안 봤거든요. 그런데 이 댓글 쓰면서, 무척 머리가 아파져 과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네요... ㅎㅎ

balmas 2007-05-1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ㅎㅎ 마지막 질문부터 답변을 해보자면, 인정투쟁이 자아들의 정체성 형성과 분리할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면, 정의상 인정투쟁이 없는 사회는 없겠죠.

그런데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왜 그냥 "인정"이 아니라, "인정투쟁"일까? 다시 말해 "인정"이 상호주관적인 사회성의 필연적인 형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화롭게(?), 조화롭게 서로서로를 인정해주는 사회를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인정투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호네트의 답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곧 "인정"이 아니라 "인정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그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갈등적"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갈등, 투쟁을 통해서 인정의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성은 오히려 긍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갈등이나 투쟁이 동등한 두 주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도 있지만, 또한 비대칭적인 주체들,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갈등이나 투쟁의 필연성의 이유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에로이카님은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의 구분을 과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구분과 비교하셨는데, 글쎄요, 알튀세르의 구분법에 관한 논의는 차치해둔다고 하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을 “확연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죠. “확연히” 구분한다는 것을, 모든 당사자들이 객관적 또는 중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제 3의 기준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인정투쟁은 대개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척도나 규범을 상정한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에, 인정의 요구들이 정당한지 아닌지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있겠죠. 물론 이러한 평가를 거부하고 강압적으로 인정의 요구들을 억누르거나 무시할 수 있을 텐데, 상당수의 인정투쟁이 폭력적인 갈등을 동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겠죠.

성흘기님/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그런데 아이디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 글쎄요, 이 사람들이 현대 철학의 거물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좀 다른 의견이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랑시에르와 부르디외를 비교하는 Nordmann의 책은 저도 읽어봤는데, 불과 15매 정도의 분량에서 굳이 부르디외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들르시길. :-)

에로이카 2007-05-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연이은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세요.

비로그인 2007-06-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아...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글 이기에 읽다가 졸뻔 했다..;;

위험해...;;ㅎ
 

그동안 알라딘 나들이가 너무 뜸했습니다.

다들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벌써 리용 생활이 다섯 달이 지나고 6개월째로 접어들었군요.

돌이켜보니 지난 5개월 동안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요리실력만큼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과연 내가 요리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 여기까지 왔던가 ...  -_-+

(그래도 하나라도 늘면 그게 어딥니까 ... 라고 자위해봅니다만 ;;;)

 

그동안 소식이 뜸했던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할 일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 2월 말까지 끝내기로 작정했던 글이 하나 있는데, {프랑스 철학과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공동 저작에 수록될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론에 관한 글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여태 이걸 끝내지 못하고 지지부진, 우왕좌앙, 좌불안석, 백팔번뇌(?)에 빠져

있습니다. 이걸 마쳐야 다른 일들도 순조롭게 진행이 될 텐데, 왠일인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쓰는둥마는둥 하고,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또 조만간 마쳐야 할 다른 번역일을 하면서,

심란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알라딘에는 영 접속할 마음이 나지 않아서

그동안 본의아니게 소식이 뜸했습니다. 어쨌든 이번 주 안으로는 이걸 끝내서 보내줘야

속도 편하고, 다른 일들도 순조롭게 진행이 될 텐데, 걱정입니다. ;;;;;;;;;;

 

요즘 프랑스, 특히 리용은 눈부신 햇볕이 쏟아지는 완연한 봄날입니다. 한낮에는 20도 넘게

기온이 올라가서 반팔로 다니지 않으면 더울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몇년 동안 지낸 후배의  말을

들으니, 예년에는 이맘때쯤이면 남녀 할  것 없이 젊은이들은 웃통을 벗고 잔디밭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긴다고 하더군요. 11월 말부터 4달 넘게 햇볕을 거의 보기 힘들다가 이맘때부터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해서, 겨울 동안 습기에 쩔어 퀴퀴해진 몸을 말리기 위해서라나뭐라나요.

어쨌든 후배에게는 젊은 아가씨들이 웃통 벗고 발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삶의 낙의 하나였다던데,   

올 겨울은 예년보다 훨씬 포근하고 날씨도 대개 맑았기 때문에, 올해는 그 진풍경을 보지 못해서 못내

섭섭해하더군요. (여자 후배들은 또 다른 이유로 섭섭하겠죠??)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날씨가좋아지는 와중에 한 가지 경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다름아닌

알레르기 경보!! 마침 오늘 TV 뉴스에서도 알레르기 경보를 발령한다는 소식을 전하더군요. 다른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프랑스에서도 4월 중순 또는 말부터 6월 초까지는 꽃가루가

심하게 날려서 알레르기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여기 사는 여자 후배와 남자

후배 하나도 이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하더군요. 계속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흐를 뿐만

아니라, 여자 후배는 과일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과일 알레르기로

옮겨가서 그렇게 됐다고 하네요. 사실 여기는 과일값이 비교적 싸고 종류도 많아서 자주 사먹게

되는데, 과일을 못먹는다면 식탁이 너무 빈곤해져버립니다. ;;;   

저는 한국에 있을 때는 알레르기는 없었는데, 후배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혹시 나도 여기서 생기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꽃가루 없는 곳으로만 다닐 수도 없고 ... 덜덜덜 ~~~

 

지지부진한 글쓰기에 신음하는 가운데 하나의 낙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책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과연 낙일까?) 한국에 있을 때도 인터넷으로 꽤 많은 책들을 샀지만, 여기서는

헌책방이나 아니면 다른 인터넷 할인 매장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어서

모처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연 보람일까 ??) 리용에는 파리만큼 헌책방이 많지 않은데,

제가 자주 (한달에 한 두 번 정도. 사실은 더 자주 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도중에 짐싸서 돌아가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 가는 헌책방으로는 "디오젠느Diogene"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사진을 찍어서 올린다올린다 하면서도 여태 사진을 못찍었군요 ;;;) 

구리용의 유원지에 있는 서점인데, 인문학 전문 헌책방이어서 그런지 규모에 비해 꽤 쓸 만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나 얼마 전에 나온 새 책을 약 60-70 % 가격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오캄의 {논리학 대전} 3권짜리를 이곳에서 구입했고, 라이프니츠나 유명한

주석가들의 책도 싸게 샀습니다.

아직도 사야 할 책들, 찜해 둔 책들이 수없이 많은데, 과연 저 책들이 팔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지,

과연 내게 앞으로 저 책들을 살 만큼 돈이 남아 있을지, 걱정입니다. 휴 ~~~

 

제가 주로 책을 사는 또다른 루트는 인터넷 할인매장입니다. http://www.priceminister.com/라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메모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유럽 지역에만 배송이 된답니다.

ㅋㅋㅋ ) 이곳은 책 이외에 음반이나 디비디, 옷가지 등을 함께 사고파는 곳인데, 아마존이나

다른 인터넷 대형서점들보다 종수는 많지 않지만, 할인율을 훨씬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잘만

고르면 얼마 전에 나온 새 책도 반 값 이하에 구할 수 있죠. 여기서도 상당히 많은 책을 샀고,

아직도 보관함에는 150권 가량의 책들이 간택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_-+)

 

아,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오늘부터 공식 선거전에 돌입했습니다. 조만간 후보자들의

TV 토론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유세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뉴스에 따르면

유권자들 중 약 40 %가 아직 후보자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총 12명의 후보 가운데

현재 선두권에는 집권 여당의 니콜라 사르코지와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그리고

공화국 연합에서 갈라져 나온 프랑스민주동맹(UDF)의 프랑수아 바이루 등이 있고, 악명높은 

극우파 민족전선의 장-마리 르펜이 바이루를 바짝 추격하고 있지요. 22일날 치러지는 1차 투표에서

과연 누가 결선 투표에 진출하게 될지, 과연 답보 상태에 있는 세골렌 루아얄이 막판에 선전해서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또 지난 대선처럼 장-마리 르펜이 의외의 성과를 거둘지 지켜볼 만합니다.

저는 다른 일들 때문에 이것저것 챙겨볼 형편이 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좌파쪽에서 선전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     

주요 후보자들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니콜라 사르코지



(우리나라로 치면 이명박과 정형근을 합쳐 놓은 듯한 인물이죠. 왠지 노무현과 유시민을 합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

 

세골렌 루아얄




(50대 중반이지만, 40대 초반처럼 보이는 미모의 정치인이죠. 덕분에 젊은 층에서는 인기가 많은데,

구좌파 정치인들은 "여자 블레어"라고 무시하고 경원하죠 ...)

 

프랑수아 바이루


(서민적인 이미지와 중도 노선으로 돌풍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주춤한 상태 ...)

 

장-마리 르펜



(프랑스의 극우 파시시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민족전선의 당수입니다 ...)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7-04-10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님. 글쓰기의 고통에서 어여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물론 평생 업고갈 일이겠지만요.

기인 2007-04-10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마슈레의 문학론! ㅋ 안 그래도 얼마전에 마슈레를 읽고 난 후에 더욱 고뇌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맑스주의는 과연 대화가능할까.. 라는 의문도 들고, 대화가능이 중요한 것일까 등등 ㅎ 저도 5월말 6월초에 프랑스 빠리 놀러가는데 ㅋ 서유럽은 처음 가보는 거라서 기대되네요~ ^^

balmas 2007-04-10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하늘바람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제가 한번 엄살을 부려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님 덕분에 조만간 해방될 듯한 느낌이 팍 드네요. ^^;;;
기인님/ ㅎㅎ 맑스주의 문학론 세미나 하시니까 마슈레에 관심이 많으시겠군요. 맑스주의가 대화 가능한가? 다른 문학론과 대화 가능한가라는 물음이시죠? 그럼요, 가능하죠. ㅎㅎ 오히려 대화는 필연적이라고 해야겠죠. 다만 '대화'가 꼭 화기애애할 필요는 없겠죠. :-) 그런 의미에서는 "communication"이라는 개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한창 좋을 때 놀러오시네요. 사실 저도 4월 말쯤 파리에 가려고 했는데, 작업이
지지부진해서 언제쯤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_-+

Chopin 2007-04-1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통을 벗고....
저도 그런 곳에 가 보고 싶네요...
어케 사진이라도 찍어주심 안 될까요? ㅋㅋㅋ

Chopin 2007-04-1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세골렌 아줌마 괜찮은 것 같네요...
ㅋㅋㅋ

마늘빵 2007-04-1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여요 발마스님 와락.

balmas 2007-04-1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팽님/ 요즘은 안벗는데요. 겨울에 날이 좋아서 ... ^^; 세골렌 루아얄을 좋아하시는 걸 보니, 님도 젊긴 젊은가 봅니다. :-)
아프락사스님/ 좀 거시기한데요. ㅎㅎ 하기야 여기 사람들은 "비즈"라고 해서
남자들도 친한 사람 만나면 서로 양쪽 뺨을 부벼댑니다.ㅋㅋ

가을산 2007-04-1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몰라요~~
하필 '지지부진, 우왕좌앙, 좌불안석, 백팔번뇌' 읽을 때 한입 가득 커피를 물고 있다가
자판하고 모니터에 다 튀어버렸어요.
웃음폭탄 경고라도 좀 해주시지..... ^^

어쨌든 반갑습니다. ^0^

chika 2007-04-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실력이 늘었다는 건 정말로 기쁜소식,이라고 생각함 - 앞으로 계속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잖슴까!
멋진 날씨를 누릴 수 있다는 기쁨,은 행복하다라고 할 수 있슴다. 오옥~ 다 벗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출범위가 넓어지지 않겄슴까? (전 한여름에도 온통 싸매고 다닙니다마는 ㅡ,.ㅡ)
글쓰기가 끝나면 ㅃ ㅏ ㄹ ㅣ 에서의 대따 멋진 휴식을 보내실 수 있을겁니다. ㅎㅎ
- 요즘 뜬금없는 긍정치카. ^^
(근데 사진이 너무 편파적이예요! 아줌마가 젤 잘나왔잖아요~ ^^;)

자꾸때리다 2007-04-1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아가씨들이 웃통 벗고 발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삶의 낙]
흐흐흐... 저도 올 여름에는 독일 여행 가볼 생각인데 발마스님 말씀을 들으니
프랑스가... 프랑스 가면 정말 볼 수 있는거예요? ㅋㅋ 루아얄 사진을 보니 프랑스
여성들은 중년도 예쁜 것 같은데(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하튼 저는 발마스 님의
익서스 850에 기대하고 있을께요.ㄲㄲㄲㄲㄲㄲㄲㄲ

근데 유령들하고 리오따르 책은 과연 언제쯤?(부담X100 주기ㅋㅋ)

울보 2007-04-1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지내고 계시는것 같네요,

stella.K 2007-04-1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는 것 같구만요. 근데 맨위의 남자 좀 재수없게 생겼네요(너무 직설적인가?). 저 여자 멋있네요. 근데 너무 심했다. 40대로 보이는구만, 50대까지는 좀...그러고 보니 발마스님이 육체 나이 보다 마음의 나이가 어려 그렇게 보시는가 봅니다. ㅋㅋ. 암튼 모처럼만의 봄볕 만끽하시길...!^^

클리오 2007-04-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비에서 님 이름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답니다. 유명인을 알고 있어서 반가워요~ ^^ (아니, 엉뚱한 댓글 같지만 반갑다는 말이여요.. ㅎㅎ)

2007-04-10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07-04-1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소식 전합니다. 지난 주에 결혼했습니다.

balmas 2007-04-10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ㅎㅎㅎ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미리 경고를 해드릴게요. ^^;
치카님/ 그럼요, 좋은 일이죠. 날씨도 너무 좋아서, 막 돌아다니고 싶어요. ㅎㅎ 얼른 글을 끝내야 할 텐데 말예요. ㅋㅋ 사진이 잘나온 탓도 있지만 실제로도 원래 세골렌 루아얄이 인물이 제일 좋답니다.
므라빈스키님/ 올 겨울은 날씨가 포근해서 웃통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안보이네요. ㅎㅎ 프랑스 여성들이 모두 예쁘다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맞습니다. ^^
유령들하고 리요타르 책도 빨리 내야죠.
울보님/ 예, 잘 지내고 있답니다. 스트레스 받는 거 빼면 ... ^^;
울보님도 잘 지내시죠? 요즘 통 울보님 서재도 못가보고, 죄송해요.
스텔라님/ 오랜만이세요. :-) 사르코지는 인상이 좀 권위적이고 차갑죠. ㅎㅎ 세골렌 루아얄은 정말 50대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에요. 고맙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클리오님/ "담비"가 뭐예요??? 유명인이라니, 갑자기 으쓱해지네요. ^^;; 저도 반갑습니다. 유찬이는 잘 크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
속삭이신 아영엄마님 ㅋㅋ, 감사합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은근히 신경 쓰이네요.
님도 안녕하시죠? ^^
마립간님/ 헉, 저런 축하드립니다. 지난 주에 결혼하셨으면 완전 새신랑이시네요.
신부님도 멋진 분이시겠죠? 정말 축하드려요. 행복하게 잘 사세요. :-)

부리 2007-04-1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실력이 느셨다구요 님의 요리는 왠지 철학이 깃든 요리 같아요^^ 글구.. 책을 싸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군요....외국은 울나라보다 더 비싼 줄 알았거든요....헌책방 같은 게 잘되어 있군요 으음.

balmas 2007-04-1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부리님, 감사합니다. ㅋㅋㅋ 그냥 끼니 거르지 않고 밥 챙겨먹게 됐다 그 이야기지, 무슨 철학이 깃들어 있겠습니까? ^^;;; 예, 파리에는 헌 책방들이 꽤 많이 있는데, 리용에는 사실 별로 없습니다. 다만 인터넷에는 꽤 헌책방들이 많은 편이죠.

클리오 2007-04-1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담비' 사이트 모르시나요... http://www.dambee.net/ 인데요...
"상상적 관계가 인간의 사회적 삶의 기초다" - 진태원 박사,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시도 "
이런 제목으로 리뷰가 나왔던데요... ^^

yoonta 2007-04-1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코지라는 분...관상도 별로 맘에 안드네요. 지난번 아랍계 사람들의 폭동사태를 처리하는 모습도 영 맘에 들지 않았고.

balmas 2007-04-12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그렇군요. 그런 곳이 다 있었군요. 감사 ^^
윤타님/ ㅎㅎ 사르코지는 좀 교활한 이미지가 있죠 ...
 

쇼팽님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생각이 나서 책 한 권을 소개하렵니다.

책의  제목은 {생각하는 나의 발견-방법서설}이고 저자는 김은주 씨입니다.

이 책은 아이세움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나의 고전읽기"에서 6번째로 출간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대한 입문서입니다.

 

최근 불어닥친 논술의 열풍 덕에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퉈 논술 교재 시리즈를 많이 출간하고 있던데,

"나의 고전읽기"도 그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방법서설}에 관한 이 책만큼은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철학 일반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국내에는 이 책 이외에도 데카르트에 관한 해설서나 입문서들이 제법 소개되어 있습니다. 에드윈 커리

(원래는 에드윈 컬리(Edwin Curley)라고 읽는 게 좀더 정확하겠지만, 번역자가 "커리"로 번역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겠습니다)의 {데카르트와 회의주의}(고려원, 1993)나  안쏘니 케니의 {데카르트의 철학}

(서광사, 1991)  같이  상당히 전문적인 연구서에서부터 케빈 오도넬의 {30분에 읽는 데카르트}나 톰 소렐의

{데카르트}처럼 쉬운 입문서들에 이르기까지 참고할 만한 해설서들이 꽤 있습니다. 이 책들은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고, 특히 커리나 케니의 책들은 영미권에서는 꽤 유명한 연구서들입니다.

 

하지만 이 책들은 모두 외국의 독자들을 상대로 씌어진 책들인 데다가, 대개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가운데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의 독자들,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 학부생들을 비롯하여, 전공자는  아니지만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쉽게 이야기하려다가 보면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들을 빠뜨리거나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점에 비춰보면, 이 책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매우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매우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방법서설}을

소개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지만, 데카르트의 생애에 대한 소개에서 시작해서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데카르트의 만년의 저작들에 이르기까지 데카르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충실하고 균형있게 잘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데카르트 저작의 원문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방법서설}을 읽어보려는 분들에게는 더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들을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지닌 또다른

장점입니다. 가령 데카르트 시대의 학문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인용하는 구절이나 {방법서설}이 지닌 "자서전"으로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황순원의 {소나기}나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같은 텍스트를 비교하고 있는 대목, 또 데카르트의 학문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사무소 직원을 비유하고 있는 대목 등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이 책의 잠재적인 독자들인 고등학생들이나 대학 학부생 또는 일반 교양 독자를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좀처럼 쉽게 양립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 장점들이 성공적으로 어울린 덕분에, 이 책은 청소년 독자들이나

교양대중에게 {방법서설}만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철학 전반, 아니 더 나아가 근대 철학 전반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몇 편의 독자서평들이 이 점을 실제로 입증해줍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철학에 관심은 있었는데, 철학자들의 책을 직접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논술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이나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

학부생이나 일반 교양 독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책의 내용을 고려해봤을 때

고등학생을 위한 논술교재 보다는 대학 학부생을 위한 교양철학 강의교재로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을 본격적인 데카르트 연구서로 보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렵겠지만, 그런 류의 책들이 하기

 힘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적지 않다고 봅니다.

한 권씩 구입해서 읽어보시죠. :-)    

 

덧붙임:

이 책은 사실 저와 절친한 후배가 쓴 책입니다. 지금 프랑스 리용에서 스피노자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지요. 작년 11월 리용에 도착했더니, 이 책의 원고를 거의 다 마무리했다면서 저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책이 나오면 소개를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이렇게 페이퍼를 씁니다.

잘 아는 후배의 책에 대해 추천을 글을 쓴다는 게 다소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 책이 잘 나간다고 해서

저에게 동전 한닢 돌아오지 않을 텐데 (후배가 야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ㅎㅎ) 주저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페이퍼를 써봤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후배 부부가 공동으로  번역한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유명한 스피노자 연구서인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도 덧붙여둡니다.

아마도 이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일 텐데, 이 책이 번역된다면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대하시길.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4-1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영풍문고서 봤어요. 아이세움에서 꾸준히 교양 고전서들이 나오더라구요. 관심갖고 있습니다.

Chopin 2007-04-1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balmas 2007-04-1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전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다른 것들도 이 책 정도의 수준을 유지한다면, 교양서로서 꽤 괜찮겠더군요.
쇼팽님/ ㅎㅎ

포월 2007-04-1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트롱의 책이 출간되는군요. ^^ 기대됩니다.

자꾸때리다 2007-04-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니의 책을 읽기전에 이 책을 함 봐야겠군요!
근데 케니의 번역서는 상태가 좋은지 걱정이네요.

rtour 2007-04-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롱의 책이 ^^ 그참 이렇게 정보가 느려서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두 분이 상당히 수고 하셨겠네요. 그 두꺼운 책을 번역하다니.. 원래 공부는 빚지면서 하는 거지만, '정말' 빚지면서 공부하는 기분이네요. 마슈레의 책을 번역한 발마스님께도 그렇고.

rtour 2007-04-10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dler 의 책도 국내 출판사에서 판권을 사서, 번역을 맡긴 것 같긴 하던데. 어느 분이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다 좋은 일입니다. :-)

해적오리 2007-04-1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에 문외한이라서 뭔가 입문서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괜찮을 것 같네요. 전 대학때 뭐했는지 모르겠어요..^^;;

balmas 2007-04-10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월님/ ㅎㅎ 예 기대하세요.
므라빈스키님/ 예, 한번 읽어보세요. 케니의 책은 번역이 괜찮습니다.
rtour님/ ㅎㅎ 본인들이 이야기를 안하면 모를 수밖에 없지요. 마트롱이 직접
한국어판 서문까지 따로 써준다니 더 뜻깊은 번역본이 될 듯합니다. Nadler 책은
아마 스피노자 전기 말씀이시죠?
해적님/ ㅎㅎㅎ 예,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거예요. 데카르트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에 알라딘에 책 8권을 주문했는데,

어제 우편함을 보니, "접근 문제가 있어서" 소포를 전달하지 못하니 (-_-+)

우체국에 와서 받아가라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내가 사는 건물은 수위가 따로 있어서, 오전과 저녁 시간에

근무한다. 수위가 근무하는 시간에  우편물이 도착하면 작은 것은 우편함에 넣어주고

큰 것은 자기가 보관했다가 나를 만나면 직접 전해주는데, 12시에서 5시 사이에는

수위실이 비어 있으니까, 그 때 우체국에서 다녀가면 항상 저런 쪽지가 달랑 놓여 있다.

(궁금한 건, 현관문이 잠겨서 소포를 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현관문 안에 있는

개인 우편함에 저 쪽지를 넣을 수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_-;)

내가 사는 동네는 슈퍼마켓이나 우체국 같은 편의시설이 거의 없어서

슈퍼마켓을 가려면 집에서 걸어서 15분 내지 20분을 가야 하고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가려면 30분을 가야 한다. 이  동네 주민들도 이것 때문에

불만이 많은 것 같던데, 뭐 나야 운동 삼아 걸어다니면 되니까 별 불만은 없다.

그런데 오늘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찾아왔더니 소포 포장이 좀 너덜너덜했다.

왠지 불안한 징조다 싶어서 포장을 뜯어보니, 아니나다를까 8권 중 4권이 비에 젖어서

우글쭈글해지고 속 페이지들이 서로 들러붙어 있다.

이 책들을 보시라.

 



 







2권은 좀 많이 젖었고 2권은 좀 덜하지만, 권당 9천원의  배송료를 냈는데 (EMS 해외배송은 무게에 따라

배송비가 달라지는데, 권당 800g으로 잡고 9천원씩 배송비를 지불한 다음, 실제 배송비가 적으면

그 다음달에 예치금으로 환불해준다. 이번에는 실제 배송비가 55,700원이다)

이런 책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책이 이렇게 젖은 건, 바로 포장 때문이다. 오늘 받아온 소포의 포장이 이렇다.







국내 배송할 때 쓰는 것과 똑같은 포장박스에 공기방울 포장지 2개로 위를 덮은 게 전부다.

 해외배송은 거리도 멀거니와 여러 사람을 거치기 때문에 포장에 좀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책이 훼손되기 쉽다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점인데, 

왜 이렇게 허술하게 포장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아마존을 비롯한 외국 서점들은 포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특히 아마존은 박스 속에

비닐 진공포장을 해서 방수에 만전을 기하던데, 알라딘도 좀 따라했으면 좋겠다.

포장비를 따로 받더라도 해외 배송의 경우는 포장에 좀더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오늘 젖은 책 교환 신청을 하긴 했는데, 과연 어떤 답변이 올지 ......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2-15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읏. 이건 '유감'정도가 아닌데요! 함께 분노하며 글 퍼가고 추천합니다. 알라딘, 이건 아니잖아요~~

기인 2007-02-15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퍼갈까 했는데 약간 오바라서 ^^; 추천만 합니다. 그런데 정말 저러면 짜증만땅이죠.

Chopin 2007-02-15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화나시겠네요~
저같으면 화가나서 잠을 못 잘듯,
최소한 방수필름으로 2중포장은 해야 했을 듯 싶네요,
알라딘에서 이 페이퍼를 읽으면 뭔가 조치가 있을 것 같네요~
참, 저 같으면 쫒아가지는 못하고, 아~~~ 제가 갑자기 열이 받네요~ 내 책도 잘 못해서 저렇게 될 걸 생각하면

Chopin 2007-02-15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도 궁금한 건, 제가 택배회사에서 일해 본 바로는 물건을 막 던지면서 물건이 부서지거나 포장이 뜯기는 경우가 있긴해도 배송지에 따라 나누고 다시 옮기고 하는 작업을 다 비를 안 맞는 택배회사의 지점의 창고같은데, 그러니까 비를 맞지 않는 곳에서 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네요~마치 웅덩이에 푹~ 담근 것 같아보이기도 하구.
물론 허술한 모 택배회사는 자체 작업,선별장이 없어서 야외에서 하는 경우도 봤지만은 물건의 상태로 봐서는 비를 맞아서 그런건 아니고, 분명 운송과정의 과실같습니다.
솔직히 알라딘도 문제지만, 여하튼 그 책임업체를 가려내기가 힘드네요~ 복합운송이라 운송자가 한 사업자도 아닐테고, 한 사업자면 그 회사만 물고 늘어지면 될텐데~

Chopin 2007-02-1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건강이 최고예요~
몸 조심하세여`

balmas 2007-02-15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ㅎㅎ 처음에는 좀 화가 났는데, 금방 풀렸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다음부터 좀 잘하면 좋겠는데 ... ^^;
쇼팽님/ ㅋㅋㅋ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잠까지 못잘 것 까지야 ... 저는 좀 신경이 무딘 편이라서 잠 잘잡니다. ^^;; 글쎄 왜 비에 젖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오늘 오전에 비가 온 건 사실인데, 오늘 비를 맞은 건지, 아니면 파리 같은 데서 비를 맞은 건지 ... 어쨌든 감사합니다. 님도 잘 지내시길 ...

Mephistopheles 2007-02-1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고객센터입니다..
다음부터는 꼭 비가 안오는 날을 골라 배송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변이 오진 않겠죠 설마...^^

Kitty 2007-02-1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메피스토님 깜짝 놀랐잖아요 -_-;;;;
에구 속상하시겠어요. 아마존은 정말 튼튼하게 와서 오히려 뜯기도 어렵던데 -_-;
빨리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chika 2007-02-1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메피스토님, 최고예요! ^^

비를 맞은것이 아니라 물에 젖은거 아닐까요? 전 우편물 분실이 많다는 과테말라에 시디를 보낼때도 망가지지 않았더랬는데 말이지요...
(알라딘의 포장이 허술하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알라딘 탓만은 아닐것같은....아, 저 알라딘의 개미주주 아님다. ㅡ,.ㅡ)

암튼, 곧 설인데... 떡국은 드시나요? ^^ (저 아는 신부님이 영국에서 멜 보내왔는데 떡국도 못먹는다고 엄살을 부리셔서;;;;;;)

balmas 2007-02-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ㅋㅋㅋ 알라딘에 취직하신 줄 알았습니다. ^^
키티님/ 저도 깜딱 놀랐습니다. ㅎㅎ 해결이라기보다는 뭐, 그냥 앞으로 좀 잘해라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올려봤어요. :-)

balmas 2007-02-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새 치카님이 댓글을 다셨네요. :-)
글쎄, 물에 젖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바닥에 물이 고인 곳에 잘못 놓여졌다거나
그랬을 수도 ;;; ㅎㅎㅎ
떡국 먹어야죠. 맛있게 냠냠 ... ㅋㅋ

stella.K 2007-02-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정말 속상하시겠어요. 지금쯤 만족할만한 답변을 받으셨나요? 요즘 알라딘에 제가 너무 익숙해졌는지 좋은 것 보단 웬지 마음에 안 드는 게 눈에 들어오고 있어 유감인 때가 종종 있어요. 이러면 안될텐데...그래도 정말 배송은 알라딘이 좀 더 신경 써야겠군요!

날개 2007-02-1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배송받는다 치더라도 교환해야 하는것 자체가 성가신 일이죠...ㅡ.ㅡ
담번엔 잘 싸서 보내겠죠? 설마..

Chopin 2007-02-15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아니죠~ 비에 맞았다면 박스포장이나 책이 비교적 골고루 비에 젖어야 할텐데,
이건 분명히 고인물에 담가졌거나, 임시로 소포를 보관한 곳에 물이 서서히 스며서 그런걸 겁니다.

마노아 2007-02-16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유감인 장면이네요. 이후로는 신경을 팍팍 써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그런데 참 너그러운 고객이십니다6^^;;;

balmas 2007-02-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예, 답변 받았습니다. 프랑스로 다시 보내기는 어렵고, 한국의 집으로 보내든가 아니면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연락해주면 교환해주겠노라고 하네요. 사실 프랑스로 4권을 또 보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그런데 예전에 "반스 앤 노블"에서 주문했을 때에도 책이 젖어서 우글쭈글하게 됐다고 말하니까, 똑같은 책을 그냥 보내주던데 ... ^^;;)
날개님/ 다음에는 좀더 신경써서 포장하겠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두고 봐야죠. :-)
쇼팽님/ 그런 것 같아요. 어디 물이 고인 데에 놓여 있었던 듯 ...
마노아님/ ㅎㅎㅎ 너그럽긴요. 사실 앞으로는 알라딘에서 다시는 주문하지 않으려고요. ㅋㅋㅋ

rtour 2007-02-16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써먹는 방법인데, 젖은 책 깔끔하게 재생시키는 방법....일단 빨리 냉동실에 넣어서 얼립니다. 그러면 종이가 팽창되면서 깔끔하게 펴지거든요. 그리고 그 책을 꺼내 무거운 책 아래 깔아두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면 나름 말짱해지답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이 방법을 이용해 보시길.. 배송에 문제가 있는 경우 말고도 물 마시다가, 차 마시다가, 어쩌다...책에 물 쏟는 경험은 가끔 일어나니까요...저는 사실 목욕탕에서 책 보다가 책을 종종 물에 빠뜨리거든요..대형사고죠 ㅋㅋ ^^;;

balmas 2007-02-16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잖아도 네이버 지식인을 검색해보니까 그 방법을 권하길래 저도 한번 해봤는데, 잘 안되네요. 왜 그러지 ??? -_-;;;

짱꿀라 2007-02-1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반대 balmas님 다시 배상해 달라고 하세요. 알라딘 진짜루 너무하네요.

자꾸때리다 2007-02-1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tour 님 방법으로 저도 몇번 시도해 봤으나 Orz....

비로그인 2007-02-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발마스님 즐찾한 기념으로 글 남김니다~

balmas 2007-02-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ㅎㅎ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바꿔준다는데요, 뭐.
No-No님/ 글쎄, 저도 잘 안되는데, 또 잘 된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구요.
테츠님/ 앗, 반갑습니다. :-) 종종 뵙기로 해요.

rtour 2007-02-2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젖자마자 빨리 냉동실로 직행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꽝꽝 얼려야 하죠. ^^
신속한 행동력과 인내심이 나름 필요하답니다. ㅋ

balmas 2007-02-2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tour님/ 그게 그렇군요. 젖자마자 빨리 ... 이번 책은 완전 쭈글쭈글해져서 볼 만합니다. ㅎㅎ 다음에 혹시 또 책이 젖게 되면 한번 해볼게요. :-)
 

얼마 전에 발간된 [근대철학] 창간호에 수록된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원래 제 학위논문에서 좀 미진하게 다루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쓴 것인데,

쓰다가보니, 책 한 권으로 확장해도 괜찮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 잘 발전시켜보면 철학사적으로, 또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대한 연구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당분간은 다른 주제에 매달려야 할 처지라서 당장 이 문제를 진척시키기는

좀 어렵겠지만(사실 참고해야 할 역사적인 문헌들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가까운 장래에 본격적으로 논의를 발전시키고 싶군요.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했던 글을 좀 다듬은 것인데, [근대철학]에는

분량 제한이 있기 때문에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논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근대철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1. 머리말


  이 글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스피노자가 이를 주로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notiones communes 개념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번역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notio communis 또는 “공통 통념” 개념1)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인식론”의 측면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개념은 {윤리학} 2부에서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것, 또는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합리적으로 개조하고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목표라면,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 공통 통념은 이러한 이행을 성취하는 데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leuze 1969 17장 참조)

  따라서 우리는 공통 통념이라는 개념이 그의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체계적으로 규정되고 여러 번 사용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볼 것처럼 그의 저작에서 이 개념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개념이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되는 {윤리학} 2부 정리 37에서 40의 논의 역시 공통 통념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을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윤리학} 2부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좀더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2) 이러한 재구성은 네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notio communis 개념의 철학사적인 유래를 해명해볼 생각인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특성과 용법이다. 데카르트는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notio communis 개념을 근대 철학사에 새롭게 복권시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다른 개념이나 문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비판하고 재구성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공통 통념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논의를 좀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4절에서는 공통 통념 개념의 특성과 형성 과정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재구성해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차이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3)


2.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notio communis의 의미


  notio communis는 에피쿠로스 또는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특히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키케로는 {아카데미아 학파에 대하여Academici Libri}에서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다음과 같이 소묘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들의 원천이자 심지어 그 자체가 감각들과 동일한 것인 정신은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사물들로 정신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은 어떤 인상들visa을 곧바로 사용하기 위해 포착하는 반면 다른 인상들은 저장해두는데, 여기에서 기억이 생겨난다. 하지만 정신은 나머지 우리 인상들을 유사성에 따라 조직하며, 이러한 [조직된] 인상들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그리스인들이 때로는 엔노이아이ennoïai라고 부르고 때로는 프롤렙시스prolêpsis라고 부르기도 한)이 생겨난다ex quibus efficiuntur notitiae rerum. 이성적 추론과 증명, 셀 수 없이 많은 사실들이 보태지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perceptio/katalêpton)이 나타나며, 점차 개선되어 지혜에 이르게 된다.(Cicero 2005, pp. 19-20) 


  키케로에 따르면 프롤렙시스는 “정신 안에서 선취된 사물들에 대한 일종의 표상이며,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4)(Cicero 1978, p. 54-55)는 것으로, 그는 이 용어를 에피쿠로스가 고안해냈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곳) 에피쿠로스가 과연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5), 적어도 이 용어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키케로는 이 인용문에서 엔노이아이와 프롤렙시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는 아에티우스Aetius의 단편에서는 두 개념의 차이가 좀더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날 때 영혼 안에 어떤 것이든 기록할 수 있는 종잇장 같은 중추부hēgemonikon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위에다 자신의 관념들 각각을 새겨 넣는다. 첫 번째 기록방법은 감각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것, 예컨대 하얀 것을 지각했을 때, 이 하얀 것이 사라진 뒤에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많은 기억들이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을 갖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유사한 인상들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적으로 일어나며, 다른 것들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자가 “프롤렙시스”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엔노이아”라고 불린다.(Long & Sedley 1987, p. 238)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사이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헬레니즘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점 중 하나지만6),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두 개념을 등가적인 것으로, 곧 notio communis 개념의 이론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에티우스의 단편(그리고 앞서 인용한 키케로의 구절)의 중요성은 오히려 스토아학파에서 공통 통념이 지닌 경험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키케로나 아에티우스 모두 공통 통념을 우리의 정신에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습득되고 더 많은 경험과 교육을 통해 강화, 향상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는 공통 통념을 일종의 본유 관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발현되는 소질이나 능력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키케로가 말하는 프롤렙시스의 특성, 곧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초월적이거나 초월론적 원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7) 


3. 데카르트의 notio communis 개념


  스토아학파에서 체계적으로 사용된 이후 중세철학 내내 notio communis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또는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등에 의해 스토아주의가 복권되면서 다시 이 개념도 철학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8) 립시우스를 비롯한 신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이 고전 스토아학파에서 사용된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데카르트는 이 개념에 대해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활용하고 있다.


1) 공통 관념의 특성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9) 이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지도규칙}에 나오는 “단순 본성”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규칙 6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 대한 정의와 함께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규칙 8에서 이 개념에 대한 좀더 명확한 규정이 나온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실재 자체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의 실재 자체란 지성의 접근이 가능한 한에서만 고찰되는 실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를 가장 단순한 본성과 복합적인 것 혹은 합성적인 것으로 나눈다. 단순한 것 중에는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아니면 이 두 가지에 모두 속하는 것이 있고, 끝으로 합성적인 것 중에는, 지성의 판단이 이것에 대해 어떤 것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음을 지성이 경험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또 지성 자신이 합성한 것도 있다.(AT X, 399; 이현복 I, 62-63쪽)


규칙 12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정신적 또는 순수하게 지적인 단순 본성은 “정신의 어떤 빛을 통해 또 그 어떤 물질적인 상의 도움 없이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인식, 의심, 무지, 의지의 작용”과 같은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물질적 단순 본성은 “오직 물체 속에만 있다고 인식되는 것”으로, 모양, 연장, 운동 등이 있다. “끝으로, 공통적인 것이란 때로는 물질적인 것에, 때로는 정신적인 것에 구별 없이 귀속되는 것이다. 존재, 단일, 지속 등이 그런 것이다.”(AT X, 419; 이현복 I, 86쪽)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 본성들은 “모두 그 자체로 알려지는per se notas 것이고 어떠한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AT X, 420; 이현복 I, 87쪽) 왜냐하면 단순 본성들은 단순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러한 단순 본성에 조금이라도 도달한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순 본성은 우리가 어떤 판단이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초 인식이다.10)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단순 본성에 공통 관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여기에 공통 관념이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단순 본성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연결선vincula과 같은 것으로, 추론에서 도출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제삼자와 같은 것은 서로 같으며, 제삼자와 같은 방식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서로 상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등은 공통 관념의 명증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공통 관념은 순수 지성에 의해 인식되거나, 아니면 순수 지성이 물질적 상을 직관함으로써 인식된다.” (AT X, 419; 이현복 I, 86쪽) 따라서 공통 관념들은 단순한 것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명증한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연의 빛을 지니고 있고, “똑같은 자연의 빛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notions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본유적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은 단순성명증성, 본유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후기 저작에서 단순 본성이라는 용어는 드물게 출현하는 편이며,11) 따라서 공통 관념도 단순 본성과 연계되기보다는 공리나 영원진리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예컨대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 말미에 나오는 기하학적 증명에는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 axiomata sive notiones communes”라는 표제 아래 10개의 명제들이 제시되고 있다.(AT VII 164-66)12) 또한 {철학원리} 49항에서 “공통 관념 또는 공리communis notio sive axioma”(AT VIII-1, 24/원석영, 41쪽)라고 말하고 있고13), {뷔르만과의 대화}에서는 영원진리를 공통 관념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영원진리들을 공통 관념들이라 불리는 것eas, quae communes notiones vocantur으로 이해한다.”(Descartes 1981, p.103)

  공리 또는 영원진리로서의 공통 관념들에 대해 데카르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 [...] 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모두 나열하기가 쉽지 않다”(AT VIII-1, 23-24; 원석영, 41)고 말하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든가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명제 또는 “사고하는 것은 사고하는 동안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49항)는 것, “무는 어떠한 속성이나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52항) 등이 그것들이다.14) 또한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에 나오는 10개의 공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결과 안에 있는 것들 중, 유사한 또는 좀더 상위의 형태로 원인 안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관념들 안에 단지 표상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성이나 완전성 전체는 그 원인들 안에서는 형상적으로 또는 탁월하게 실존해야 한다.” 

 

2) 공통 관념의 단순성


 데카르트는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서 notio communis에 대해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이는 데카르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문제다. 가령 장 라포르트Jean Laporte에 따르면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은 “단순 본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연결선들vincula 또는 필연적 관계들을 보편적인 용어들로 번역한 것”(Laporte 1988, p. 305)이며, 따라서 이는 초기 저작에서 말하는 단순 본성들과 다르지 않다. 강조점이나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역시 장 라포르트와 마찬가지로 공통 관념은 “단순 본성들로 간주된 실재들res 사이의 연결선들로 사용되는 단순 본성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다(Gouhier 1987, p. 274). 반면 앨런 하트Alan Hart는,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공통 관념과 후기 저작에서 사용되는 공통 관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 다른 단순 본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이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서 지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앨런 하트의 논거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다음 구절이 그가 제시하는 주요 전거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런 모든 공통 관념이 이와 같은 운동에서 유래하고, 이것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제 3의 것과 동등한 두 가지는 서로 같다”는 것과 같은 공통 관념을 우리 정신 안에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나에게 가르쳐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운동은 개별적인 것particulares인 반면에 공통 관념은 보편적인 것이고 운동과는 어떠한 유사성도, 어떠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AT VIII-2, 359-60; 이현복 II, 191-92쪽) 그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공통 notions 또는 공리들은 운동들과 관련되지 않지만, 단순 notions의 경우는, 운동들이 정신이 단순한 본유 관념들을 현실화하는 기회가 되는 한에서, 물질적 운동들과 관련되어 있다”(Hart 1970, p. 120―강조는 하트)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단순 관념들은 물질적 운동을 기회로 현실화되는 반면, 공통 관념들은 운동과 무관하며,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릇된 주장이다. 첫째, 그가 인용한 구절에서 데카르트는 단순한 notions과 공통 notions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의 논점은 레기우스의 경험론적 주장에 맞서 모든 notions은 다 “성향 내지 잠재성dispositione sive facultate”이라는 의미에서 본유적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데카르트가 운동의 개별성과 공통 notions의 보편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는 단순 notions과 달리 공통 notions은 단순 notion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 기회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이 지닌 존재론적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으로 라포르트나 구이에의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연결선”으로서의 공통 관념이 단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들은 이 점에 관해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제라르 시몽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공리들의 단순성은 그것들이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상이한 존재자들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각각의 물체들이 그것들의 독특성 속에서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Simon 1996, p. 131) 곧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공통 관념들은 논리학적이거나 수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유일한 한 가지 주제, 곧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 무의 불가능성, 실체의 필연성 사이의 연계라는 주제만을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공통 관념의 사례들이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과는 무관한 존재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이 지닌 단순성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함의에서, 곧 각각의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몽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의 성격을 좀더 일관성 있게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관성을 좀더 정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4.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


  공통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에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초기 저작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체계적인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초기 저작에서 이 용어는 단 두 번 사용되는데, 한 번은 올덴부르크의 반론에 답변하면서 스피노자가 그의 반론의 요점을 정리하고 있는 곳에서16), 다른 한 번은 메이으르(Lodewijk Meyer)가 스피노자를 대신하여 작성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이다.17)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후기 저작에서도 notio communis라는 용어 자체는 드물게 출현하며, {윤리학}에서는 6번18), {신학정치론}에서는 5번 사용될 뿐이다19). 하지만 특히 {윤리학} 2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4절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도 바로 2부에 나타난 공통 통념 이론이다.20)

  데카르트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은 두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notio 개념이 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카르트와 달리 notio는 더 이상 단순성과 명증성, 본유성으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상상의 notio와 이성의 notio로 분화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인식론적 갈등 내지 분화의 소재가 된다. 이는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애매성은 인간학적인 삶의 양식의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notio communis에 대한 규정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데카르트와 달라진다. 데카르트에게는 notio communis가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윤리적 실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이론은 이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인 요소들로 지니고 있다.


1) notio의 애매성


  이 단락에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이 개념에 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notio, 곧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나는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 통념들notiones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원인들, 곧 어떤 공리들 내지는 통념들의 원인들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해보면 유익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어떤 통념들이 다른 통념들보다 유익하며, 어떤 통념들이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G II 120―강조는 스피노자)


곧 그에 따르면 통념들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통념, 곧 공통 통념이 있고, 그 이외에 “또다른 통념들”도 존재한다. 이 구절 바로 뒤에서 이러한 또다른 통념들의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통념들quas secundas vocant”21)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통념들”이 예시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 중 특히 두 가지 통념의 형성 원인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중 하나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distincte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 용어들이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면 보편 통념들은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긴다. 따라서 보편 통념들은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보편 통념은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보편 통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보편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매우 신랄하고 비판적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 notio는 훨씬 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단순하고 자명한 것, 본유적인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는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와 2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명확히 구별하며, 전자를 후자로 대체하는 것, 또는 후자에 기초하여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 역시 notio가 누구에게나 명석하게 인식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선입견이 그러한 인식을 가로막기 때문이다.(AT VIII-1 24; 원석영 42)22)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카르트에게 notio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이 존재하며,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이를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하나의 notio가 아니라 두 개의 notio가 문제가 된다. 이는 그가 notio를 상이한 인식의 종류의 문제설정, 따라서 상이한 삶의 종류라는 문제설정 속에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40의 두 번째 주석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mutilate, confuse,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23)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모호한 경험에 의한 인식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이라 부른다. (II)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recordemur,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contemplandi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opinio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의 종류는, 우리가 조금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모든 점에서 서로 대립하고 전면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거짓의 유일한 원인”(E II P41)인 한에서 개조되고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인식의 종류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삶의 종류, 삶의 양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통념의 애매성이라는 문제는 데카르트에서처럼 단지 선입견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곧 상상적인 notio는 하나의 선입견의 결과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삶(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상상의 이론, 또는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존재하는 데 반해 데카르트에게는 그러한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로 notio에 대한 양자의 관점의 차이가 생겨난다.


2) 공통 통념의 의미


  notio 개념의 차이로 미루어볼 때 notio communis라는 개념 역시 상이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선 공통점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처럼 스피노자도 notio communis를 때로는 공리로 제시하며, 때로는 이를 “단순한 것”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가령 {윤리학} 1부 정리 8의 주석 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실체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 이 정리[1부 정리 7]는 모든 사람에게 공리이며, notiones communes 중 하나로 간주될 만하다.”(G II 50) 하지만 notio communis는 {윤리학}에서 이런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학정치론} 6장의 주석 6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통 통념을 단순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의 본성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통 통념들이라 불리는 지극히 단순한 어떤 통념들quasdam notiones simplicissimas, quas communes vocant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G III 253)

  또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거듭 공통 통념은 “우리의 추론의 기초”(E II P40s1)라든가 “이성의 기초”(E II P44c2d), 심지어 “철학의 기초”24)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을 추론이나 이성 또는 철학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notio communis의 근거 또는 대상을 속성 및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notio communis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이성의 기초가 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notio communis는 “자연의 빛” 덕분에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 그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따른 notio communis에 대한 고유한 용법은 {윤리학} 2부 정리 37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곧 여기에서 notio communis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관념들ideas 또는 통념들notiones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우리에게 적합하게, 곧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notio communis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획득하고 구성해나가야 하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실재의 특성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물체들은 단 한 가지 점에서만 일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가령 상이한 두 인간의 신체는 연장의 일부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조직화된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하며,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처럼 일치점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얻을 수 있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의 범위도 다양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3)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1) 두 가지 공통 통념


  이제 공통 통념들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2부 정리 38과 39에서 제시되고 있는 두 가지 적합한 인식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8과 39에서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25)


인간 신체와, 인간 신체가 통상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어떤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고유한 것은 이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며, 이것에 대한 관념 역시 정신 안에서 적합하게 존재할 것이다.26) 


마르샬 게루 이후 관행적으로 각각 “보편적 공통 통념notion commune universelle”과 “고유한 공통 통념notion commune propre”이라고 불리는27) 이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곧 보편적인 공통 통념에서 고유한 공통 통념으로, 또는 역으로 후자에서 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공통 통념 이론의 재구성에서 핵심 과제가 된다.

  먼저 “보편적 공통 통념”의 경우를 보면, 스피노자는 이것의 대상을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사례는 스피노자가 정리 37이나 정리 38의 따름정리에서 지시하고 있듯이 「자연학 소론」 보조정리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조정리 2

모든 물체는 어떤 것들에서 합치한다in quibusdam conveniunt.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단 하나의 동일한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같은 2부의 정의 1에 의해). 그리고 때로는 좀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좀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운동할 수 있고 때로는 정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바로 “속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실재들은 그것이 속하고 있는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물체들에 공통적인 연장 속성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 성격을 띠는 인식은,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적합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28) 아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인식은 세부적인 동일성과 차이, 대립들을 정확히 식별할수록 구체적인 데 반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연장 속성은 차이 없는 동일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또한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추상적이다. 스피노자에게 부적합성에서 적합성으로의 이행은 항상 실천적ㆍ윤리적 이행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 실천, 곧 능동화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들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 대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보편적인 공통 통념은 그만큼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적은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른, 좀더 구체적인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리 39의 대상이다. 앞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정리 38과 달리 정리 39에서는 인간 신체와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한 고유한 것이 인식의 대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통 통념, 곧 “고유한”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부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부적합한 관념들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2부 정리 24에서 정리 31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부적합한 관념들의 본성 및 형성에 관한 제일 체계적인 논의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따름정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quoties ex communi naturae ordine res percipit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confusam tantum & mutilatam habere cognitionem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정신은 (2부 정리 23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은 (2부 정리 19에 따라)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체를 지각하며, 마찬가지로 (2부 정리 26에 따라)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들을 지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 정신은 (2부 정리 29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7에 따라)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5에 따라)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2부 정리 28 및 그 주석에 따라) 단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공통의 질서ordo communis naturae”라는 개념이다. 이는 “공통 통념들”과 마찬가지로 “공통의communis”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인식의 종류들의 분류에서 공통 통념들은 제 2종의 인식, 곧 적합한 인식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반해, 스피노자는 여기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인식을 부적합한 인식으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왜 “공통의”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양자는 각각 부적합한 인식과 적합한 인식으로 나누어지는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따름정리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석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신은, 내적으로 규정될 때마다, 곧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될 때마다가 아니라non quoties interne, ex eo scilicet, quod res plures simul contemplatur, determinatur ad earundem convenientias, differentias, et oppugnentias intelligendum,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곧 그것이 외적으로, 다시 말해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마다quoties externe, ex rerum nempe fortuito occursu, determinatur ad hoc, vel illud contemplandum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G II 114) 스피노자는 이번에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의 일반적인 대비를 바탕에 깔고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을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곧hoc est”이라는 접속사는 의미론적 동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 각각에 대해 독특한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곧 그에 따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리 29의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여러 개의 실재들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이것 또는 저것”을 개별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실재들이 우리의 신체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줄 때마다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즉자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따라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자연의 실재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E II P18s)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우리에게 외부 물체들의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습성이나 기질을 더 많이 반영하는 지각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고 부를까? 샤를르 라몽Charles Ramond이 잘 보여주었듯이29) 바로 이 점에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는 표현의 역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이는 자연의 실재 질서를 가리킨다.(E IV P57s) 2부 정리 7에서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나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의 객관적 질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존재하는데, “자연의 공통의 질서” 역시 그 중 한 가지이다.30) 따라서 모든 것에 공통적인 특성들에 대한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를 둔 인식으로서 공통 통념들에 의한 인식은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인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실재적인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을 낳는다. 왜 이러한 역설이 생길까? 그것은 우리가 자연 전체로서 이러한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곧 수동적인 상태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3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지각, 인식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만을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 일반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의 차이점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의 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는 2부 정리 14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학 소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정리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온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의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능동적인 능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32)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리 29에서 말하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대신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은 이러한 능동적 능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러한 정신은 신체가 매우 적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는 능력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실재들 또는 (정리 17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미지들을 동시에 지각하지 못하고 실재들에 대한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과 다른 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를 이를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으로, 곧 “정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으로 부르면서, 부적합한 지각 또는 인식과 다른 적합한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과 공통 통념들의 형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41에서 1종의 인식과 2종 및 3종의 인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 정리의 증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리 40의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1종의 인식에는 부적합하고 혼동된 모든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2부 정리 35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 그는 여기서 1종의 인식이 오류의 유일한 원인인 이유를 이 인식이 “부적합하고 혼동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또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이나 정리 35의 용어법대로 말하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 곧 부적합한 인식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오류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인식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일까? 이는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각이다.33) 이러한 인식은 정신이 “외적으로 규정”될 때, 곧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 형성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단편적 인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이는 2부 정리 40의 주석 2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한데 뭉뚱그려서 상상할 때 생겨나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를 혼동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기 때문에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대립”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으며, 각각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기질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된 인식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반면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2종의 인식은 이처럼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인식을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에 따라 개조하는 인식이다. 다시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내적으로 규정되는”,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인식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34)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는 데카르트와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스피노자의 용법의 고유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닐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의 의미를 해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논의가 주로 {윤리학} 2부에 국한되어 있을 뿐 {윤리학} 5부나 {신학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공통 통념의 용법과 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정치론}은 {윤리학}과 달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합리적인 삶의 규칙에 따라 우중(愚衆)을 인도하기 위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공통 통념 개념이 지닌 실천적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전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정치론}에 대한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notio를 “개념”이나 “관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후속 논문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참고 문헌



1. 고전 저자의 문헌


Cicero, Marcus Tullius(1978). De natura deorum/Vom Wesen der Götter, München: Heimeran.

      (2005). On Academic Scepticism, ed. & trans., Charles Brittain, Indianapolis: Hackett.

Descartes, Renée(1964-1974). eds., Oeuvre de Descartes, C. Adam & P. Tannery, Paris: Vrin(AT로 약칭).

      (1981). Entretien avec Burman, ed. & trans. Jean-Marie Beyssade, Paris: PUF.

      (1996a). 󰡔방법서설․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이현복 옮김(서울: 문예출판사).(“이현복 I”로 약칭)

      (1996b). 󰡔성찰 외󰡕 이현복 옮김(서울: 문예출판사).(“이현복 II”로 약칭)

      (2002).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서울: 아카넷).(“원석영”으로 약칭)

Long, A. A. & Sedley, D.(1987) eds.,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Spinoza, Benedictus de(1925). Spinoza opera, vol. 1-4, ed., Carl Gebhardt, Heidelberg: Carl Winter, 1925.(G로 약칭)

      (1985).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 1, ed. & trans., Edwin Curley, PrincetonㆍN.J: Princeton University Press.(“Curley”로 약칭)

      (1999a). L'Ethique, trans., Bernard Pautrat, Paris: PUF(19881).

      (1999b). Ethik, trans. Wolfgang Bartuschat, Hamburg: Felix Meiner.

      (1999c). Traité théologique-politique, ed., Fokke Akkerman, trans., P.-F. Moreau & Jacqueline Lagrée trans., PUF.



2. 현대 저자의 문헌


박기순(2006).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과 균형의 개념」, 󰡔철학사상󰡕 제 22집. 

진태원(2006).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Balibar, Etienne(2005).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Deleuze, Gilles(1969).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Paris: Minuit.

      (1981).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Paris: Minuit.

      (1999).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서울: 민음사.

Goldschmidt, Victor(1984). “Remarques sur l'origine épicurienne de la “prénotion””, in Écrits, tome 1: Études de philosophie ancienne, Paris: Vrin. 

Gouhier, Henri(1987). La pensée métaphysique de Descartes, Vrin(19601).

Gueroult, Martial(1974). vol. 2: L'âme, Paris: Aubier(Gueroult II로 약칭).

Hart, Aan(1970). “Descartes on Notion”,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31, no. 1.

Lagrée, Jacqueline(1989). Le salut du laïc, Vrin.

      (1990). “Les notions communes religieuses: Antécédents et enjeux du credo minimum chez Herbert de Cherbury et Spinoza”, in Mignini(1990).

      (1991). La raison ardente: religion naturelle et raison au XVIIe siecle, Vrin.

      (1994).  Juste Lipse et la restauration du stoïcisme, Vrin. 

      (2002). ed., Spinoza et la norme, Presses Universitaires Franc-Comptoises.

Laporte, Jean(1988). Le rationalisme de Descartes, PUF(19451). 

Lévy, Carlos(1992). Cicero Academicus, Roma: École française de Rome. 

Macherey, Pierre(1997). Introduction à l'Ethique de Spinoza, vol. 2, Paris: PUF.

Marion, Jean Luc(1981). L'ontologie grise de Descartes, Paris: Vrin(19761).

Mignini, Filippo(1990). ed. Dio, l'uomo, la liberta. Studi sul Breve Trattato di  Spinoza, Aquila: Japadre.

Ramond, Charles(1995). Quantité et qualité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Paris: PUF.

Sandbach, F.H.(1930). “Ennoia and Prolepsis in the Stoic Theory of Knowledge”, The Classical Quarterly, vol. 24, no. 1, 1930.

Segal, Gideon(2000). “Beyond Subjectivity: Spinoza's Cognitivism of the Emotions”,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 vol. 8, no. 1. 

Sévérac, Pascal(2005). Le devenir actif chez Spinoza, Paris: Honoré Champion. 

Simon, Gérard(1996). Sciences et savoirs aux XVIe et XVIIe siècles, Villeneuve d'Ascq(Nord): Presses universitaires du Septentrion.

Vinciguerra, Lorenzo(2002). “Images communes et notions communes: Note sur la  nature du général chez Spinoza”, in Lagrée(2002).

Wolfson, H.A.(1983). The Philosophy of Spinoza, Harvard University Press(19341).

Yovel, Yirmiyahu(1994) “The Second Kind of Knowledge and the Removal of Error”, in Idem ed., Spinoza on Knowledge and the Human Mind: Papers Presented at the Second Jerusalem Conference (Ethica II), E.J. Brill.

 



1) 우리는 이 글에서 스피노자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통념”이라고 번역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공통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동일한 용어를 이처럼 철학자에 따라 상이하게 번역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사실 될 수 있는 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notio communis의 경우 이러한 차이는 이 개념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상이한 번역이 얼마간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notio communis 및 notio라는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쟁점을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사위원들(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한 논평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겸해 두어 가지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첫째, 우리가 “notio”를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을 피한 이유는, 데카르트에서 “notio sive idea”라는 표현은 발견할 수 있는 반면 “notio sive conceptus”라는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주 9) 참조). 둘째, 본문에서 지적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notio는 인식론적 일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관념”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서는 notio가 상상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인식의 종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념”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셋째,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서 notio를 “관념”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idea”와 “notio”라는 두 가지 상이한 원어를 동일한 “관념”이라는 단어로 번역할 경우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개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이 경우 notio라는 개념이 지닌 독자적인 이론적 위상과 문제설정은 “관념”이라는 개념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notio에 관한 독자적인 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통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가 항상 “보편적”이거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잘 드러내줄 수 있다. 둘째, 또한 이 용어는 notio가 논증이나 증거를 통해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명증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에 대한 역어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제안에 대한 좀더 충실한 논거들은 후속 논문에서 제시해볼 생각이다.     

2) 한편 󰡔신학정치론󰡕에서는 󰡔윤리학󰡕과는 다소 상이한 용법이 나타나는데, 자클린 라그레Jacqueline Lagrée는 이를 “종교적 공통 통념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특히 Lagrée 1989; 1990 참조)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른 곳에서 좀더 논의해보겠다.  

3) 이 글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할 것이다. 데카르트 전집의 경우 AT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I, II, III ...),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1, 2, 3, ...) 표시할 것이다. 국역본의 경우에는 “참고문헌”에서 밝힌 것처럼 역자의 이름에 따라 책을 표기하고, 쪽수를 적을 것이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역시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교정론󰡕: TIE, 󰡔소론󰡕: KV, 󰡔신학정치론󰡕: TTP,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서문: praep, 부록: app,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5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TIE, 38 → 󰡔지성교정론󰡕 38절.

     TTP VI ad6 → 󰡔신학정치론󰡕 6장 주 6)   

4) “anteceptam animo rei quamdam informationem, sine qua nec intellegi quicquam nec quarei nec disputari possit.”

5)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Goldschmidt 1984, pp. 114 이하; Lévy 1992, pp. 302 이하 참조.

6)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서 프롤렙시스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Goldschmidt 1984 참조.

7) Sandbach 1930이 프롤렙시스에 대한 가장 완고한 경험론적 입장을 대표한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개 온건 본유론적인 입장을 택하고 있다.

8) 이 점에 대해서는 Lagrée 1989; 1991; 1994를 각각 참조. 신스토아학파의 용법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종교적 notio communis 이론이다. 이 이론은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하여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chrétienne󰡕(1581) 이래 17세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확산되었으며, 특히 에드워드 허버트 셔버리Edward Herbert Cherbury의 이론과 스피노자의 이론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Lagrée 1989; 1990을 각각 참조.

9)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데카르트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관념”으로 번역했다. 반면 데카르트 국역본(이현복 I, II, 원석영)에서는 모두 이를 “공통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ideas sive notiones”, 곧 “관념들 또는 notions”라는 표현은 몇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반면(가령 AT VIII 358), 어디에서도 “ideas sive conceptiones”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차라리 notio는 “관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단순성”은 원자나 요소 또는 원초적 형상의 단순성이 아니라 인식하는 정신에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인식의 질서를 수립한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Marion 1981, pp. 131 이하 참조.

11) 하지만 단순 본성 개념이 초기 저작, 특히 󰡔정신지도규칙󰡕에만 등장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 라포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개념은 드물기는 하지만 후기 저작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Laporte 1988 참조.

12) 데카르트 자신은 이 10개의 “공리들 중 여럿”은 “좀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정리들로” 제시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AT VII 164)

13) 또한 󰡔“성찰” 반론에 대한 두 번째 답변󰡕도 참조.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axiomata sive communes notiones”(AT VII 164)

14)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의 사례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고찰로는 Gouhier 1987, pp. 272-73 참조. 공통 관념의 사례들은 초기 저작인 󰡔정신지도규칙󰡕에서부터 󰡔뷔르만과의 대화󰡕 및 말년의 서신교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15) “단순 관념들은 초기 저작에서는 보편자들(실체, 자아, 연장)의 일반 범주인 데 반해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에서는 개별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공통 관념들은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특수한 관념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공리들 내지 사유의 규칙 또는 근거율이다.”(Hart 1970, p. 121)

16) “선생께서 내가 제시한 것에 대해 제기한 세 번째 반론은, 공리들은 ‘notiones communes’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G IV 13)

17) “axiomata seu notiones communes”(G I 127).

18) E I P8s2(G II 50); E II P38c2(G II 119); E II P40s1(G II 120); E II P44c2d(G II 126); E II P47s(G II 128)

19) TTP IV(G III 64); TTP V(G III 77); TTP VI ad6(G III 253); TTP VI(G III 88); TTP XIV(G III 179)

20) 따라서 notio communis가 󰡔윤리학󰡕이 이룩한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라는 들뢰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공통통념들은 󰡔윤리학󰡕에만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단지 단어의 새로움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귀결들을 이끌어내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Deleuze 1999, 170쪽) 번역 가운데서 “공통개념”은 “공통통념들”이라고 고쳤다.

21) 게루에 따르면 이는 유와 종, 범주 등과 같은 논리적 개념들을 의미한다. Gueroult II, p. 364.

22) 또한 󰡔철학원리󰡕 1부 71-72항도 참조.

23)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라는 이 표현은 󰡔윤리학󰡕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표현이고,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이는 대개 “지성에 대해 무질서하게/질서 없이”라고 번역된다. 가령 Curley는 “without order for the intellect”라고 번역하고 있고, Bartuschat는 “ohne Ordnung für den Verstand”(Spinoza 1999b)로, Pautrat는 “sans ordre pour l'intellect”(Spinoza 1999a)로 번역하고 있다. Appuhn과 게루(Gueroult II, p. 382)는 “désordonnée pour l'entendement”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른 번역들과 거의 같다. 반면 Shirley는 “without any intellectual order”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런 번역은 여기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5부 정리 10에 대한 해석에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Macherey의 번역(“sans ordre allant dans le sens de l'intellect”, Macherey 1997, p. 312)을 따랐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제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5부 정리 10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24) “철학의 기초는 공통 통념들이며, 자연으로부터만 이끌어내야 한다.”14장 (G III 179)

25) “Illa, quae omnibus communia, quaeque aeque in parte, ac in toto sunt, non possunt concipi, nisi adaequate.”

26) “Id, quod corpori humano, & quibusdam corporibus externis, a quibus corpus humanum affici solet, commune est, & proprium, quodque in cujuscunque horum parte aeque, ac in toto est, ejus etiam idea erit in mente adaequata.”

27) Gueroult II, pp. 327 이하 참조.

28) 갈릴레이나 데카르트가 확립하려고 했던 근대 수리물리학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물체들이나 몇몇 물체들의 고유한 특징보다는 물체들이 물체들인 한에서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곧 속성이나 특성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9) Ramond 1995 pp. 231 이하 참조; 또한 박기순 2006 주 28) 참조.

30) 반면 몇몇 주석가들은 이를 상상적인 질서, 또는 “자의적인 질서random order”나 “거칠고 정교화되지 않은raw, uncultivated” 질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컨대 Yovel 1994, p. 95; Segal 2000, p. 14 주 5) 등 참조.

31) “우리는 다른 것들 없이 자신에 의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수동적이다/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Nos eatenus patimur, quatenus Naturae sumus pars, quae per se absque aliis non potest concipi.”(E IV P2)

32) 능동과 수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3부 정의 2에서 제시된다. 이 정의에 대한 분석은 진태원 2006, 7장을 참조하라.

33)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볼 수 있는 “지각”과 “개념” 사이의 스피노자의 구별에 따르면 지각은 “수동성”을 더 함축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34) 공통 통념 이론에 대한 들뢰즈 논의의 문제점은 그의 모순적인 주장에 있다. 곧 그는 우리가 실존의 차원에서는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곧 우리는 실존의 차원에서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의 스피노자 해석에 특유한 본질과 실존, 관계와 역량의 분리에서 비롯하는 결과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6 4장과 6장을 참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2-1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인쇄해서 읽겠습니다. ^^

menwchen 2007-02-1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어야징~~ 두루두루 잘지내시고 건강하시죠?

ohhyuk83 2007-02-13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철학]은 서양근대철학회 학회지인가요? 아직 학교도서관에는 없네요. 아주 최근에 나온건가요?

balmas 2007-02-13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ㅎㅎㅎ
멘님/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좀 기진맥진하고 있는 것 빼고는 ... ^^;
오혁님/ [근대철학]은 이번 호가 창간호입니다. ^^

yoonta 2007-02-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을 읽다보니 라틴어가 팍팍 튀어나오네요..-_-;;;
영어도 서툰 저로서는 언제쯤 발마스님 정도의 득도를 하게될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여튼 재미있게 읽고있습니다..^^

balmas 2007-02-1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ㅎㅎ 득도라뇨? 고전 문헌학 하는 분들이 보면 비웃습니다. 네오 라틴 몇 마디 읽는 정도에 무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