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올리는 이 글은 내년 개헌 정국을 앞두고 제가 준비하고 있는 글의 개요를 담고 있는 글입니다.
아직 완성된 내용은 아니지만, 제 생각의 대략적인 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시고, 많이 읽어보시고 또 여러 곳에 전해주십시오.
12월 13일 수정.
다시 읽어보니 비문도 있고 오기들도 눈에 띄어서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지금 올리는 이 판본을 참고해주세요.
--------------------------------------------
해방 80년, 한국 사회 대전환을 위하여: 최대주의 개헌을 시도하자
진태원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ㆍ[황해문화] 편집주간)
1. 취지
2025년은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지난 80년의 한국사는 분단과 전쟁, 숱한 국가폭력과 사회적 폭력, 장기적인 군사 독재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놀라운 저항 능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였으며, 더불어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다. 한국인들 모두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 간 한국은 비상한 위기와 재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16~17년 대통령 탄핵에 힘입어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붕괴, 2022년의 윤석열 정부의 집권 및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를 통한 친위쿠데타 시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적 역량과 사회적 잠재력이 구조적 한계에 도달했음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애국적인 시민들과 국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몇 시간만에 무위에 그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회복력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서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서도,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에서도 잘 표현된 바 있다. 하지만 2016~17년 당시의 촛불시위를 되돌아보면 이러한 민주주의적 회복력이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국내외 언론 및 정치권에서는 촛불시위에 대하여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런 폭력 없이 평화로운 탄핵 및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적 역량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찬사가 무색하게도, 촛불정권을 자처한 문재인 정권은 집권 5년만에 허무하게도 붕괴되었으며, 탄핵 당한 세력과 결합한 윤석열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윤석열 정권은 채 3년이 못되는 시점에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친위쿠데타를 시도함으로써 탄핵의 문턱에 놓이게 되었다.
다시 대통령 탄핵에 성공하고 윤석열을 비롯한 친위 쿠데타 세력을 내란죄로 처벌까지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탄핵이 성공한다면 내년 2~3분기쯤에는 개헌을 거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십중팔구 개헌은 (1) 대통령중임제 (2) 헌법 전문에 “5.18” 관련 내용 수록 정도의 내용을 담은 “최소주의 개헌”에 그칠 것이고, 새로 집권한 세력은 그 이전의 민주당 정권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통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뒤에서 더 말하겠지만, 우리가 염려하는 다중재난의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기보다 어쩌면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시점에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7년 개헌이 이뤄진 이래 무려 40년 만에 도래하는 개헌 정국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세력이 남의 일로 여기면서 그냥 물끄러미 방관만 하고 있어도 좋은 그런 정국이 아니다. 개헌 정국은 한 사회의 정치적ㆍ사회적 에너지가 고도로 집중되는 시점이며,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역사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평가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포괄적인 질서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시점이다. 또한 이번 개헌 정국은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자신의 역량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고양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토대를 놓을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약소자들 및 그 약소자들을 대표하는 세력들일수록 이번 개헌 정국에 더욱 집중하고 우리 헌법을 더욱 민주적이고 평화적이고 생태적인 헌법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해방 8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의 대전환의 키워드는 무엇보다 새로운 헌정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내년의 개헌 정국은 “최소주의 개헌” 아닌, 제헌에 준하는 개헌, “최대주의 개헌”으로 전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몇 가지 논거로 내 생각을 제시해보겠다.
2. 다중재난의 시대
우선 우리 시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하다. 최근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복합위기” 내지 “다중위기”라는 용어가 현 정세를 규명하기 위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동원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복합위기”나 “다중위기”라는 용어 또는 그 원래 출처로서 polycrisis라는 영어 개념은 우리 시대를 정확히 규정하기에는 여러 모로 미흡한 용어들이다. 나는 우리가 오히려 “다중재난”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복합위기’라는 용어는 2022년 5월 윤석열 정권이 출범하면서부터 국내의 정치권과 언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용어는 출발부터 ‘글로벌 복합위기’를 강조함으로써 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치안적인 용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복합위기’라는 용어는 미국의 경제사가 애덤 투즈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세계정세에서 일련의 연쇄적인 위기들이 맞물려 전개되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채택함으로써 영어권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polycrisis라는 개념의 번역어다. 따라서 ‘polycrisis’라는 용어법 자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존재할 텐데, 내 생각에는 영어권 학계에서의 이 개념 및 그것을 둘러싼 논의 자체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위기’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개념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진부화되었으며, 그 자체가 치안적인 담론(또는 거버넌스 담론)의 주요 요소 중 하나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기’라는 용어는, 위기의 초점을 객체적인 것에 위치시킴으로써, 현 정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체적인 것 자체, 정치적인 것 자체의 재난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문제는 앞으로 닥쳐올 잠재적인 일련의 위기들, 심지어 재난이나 파국적 상황이라기보다는, 이미 진행 중에 있는 재난들, 특히 약소자들에게는 절박하게 경험되고 있고 고통을 주고 있는 재난들이 문제다.
따라서 복합위기나 다중위기 같은 표현보다는 다중재난 개념이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현 정세를 인식하고 대응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3. 주체적인 것의 재난, 정치적인 것의 재난: 한국 민주주의의 재난
그렇다면 현 정세를 적절히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다중재난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를 이루는 ‘주체적인 것의 재난’을 명확히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주체적인 것의 재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치적 주체성이 처해 있는 이율배반 내지 이중구속의 상황을 뜻한다. 그것은 다중재난에 직면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 능동적 주체성이 요구되는 반면 능동적 주체가 형성되고 실행될 수 있는 조건들은 더욱 더 와해되거나 잠식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능동적 주체성의 형성과 실행이 더욱 어려워질수록 다중재난은 더욱 심화되고 촉진되며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시 그것은 또한 전자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주체적인 것 자체의 재난이야말로 다중재난들 전체를 (루이 알튀세르의 용어법을 원용한다면) 과잉결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생태계 재난에 대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무능력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거니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국제적인 공조 및 대응에서 드러난 갈등과 모순, 분열은 팬데믹 자체가 확산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 경기침체 및 보호무역주의의 주요 요인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지정학적 갈등의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며, 오픈 AI의 챗GPT 출시가 촉발한 이른바 ‘인공지능혁명’이 ‘소버린 AI’를 중심으로 패권 경쟁의 주요 동력이자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재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다중적 재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회는 계급적인 적대와 갈등에 더하여, 인종 간, 젠더 간, 세대 간에서 표출되는 극심한 혐오와 적대로 분열되어 있으며, 빈부 격차는 단순한 자산의 격차에 머물지 않고 인간학적인 분할 및 노골적인 위계질서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재 세계 각 국의 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위기를 고발하는 수많은 저작들이 증언하듯이, 이러한 분열과 적대의 심화는 민주주의의 개혁을 산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렬한 정서적 적대감 및 혐오감에 기반을 둔 (극우) 포퓰리즘 운동을 수반하는 신권위주의 정치의 확장을 낳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민주주의 및 정치 일반은, 대개 제도적인 정치 질서 내의 지배적인 양당 세력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 것이며, 그 세력을 대표하는 어떤 지도자에게 투표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간에 구조적인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이 불가능하며, 글로벌 다중재난에 대한 효과적인 공동 대응 및 협력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 3일 밤 느닷없이 일어난 비상계엄 시도는 한국 민주주의의가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4. 물질적 헌정
12월 3일 비상계엄의 시도 및 무산으로 인해 앞으로 상당한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이고, 그 결과는 대통령 탄핵과 내년 중 개헌 및 대통령 선거로 귀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세력 구도를 감안하면, 내년 중에 있을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 정도의 쟁점으로 국한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중심을 이룰 것이고, 헌법 전문에 5.18 관련 문구가 수록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무려 40년 만에 닥친 개헌 정국에서 고작 이 정도 내용의 개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엄청난 정치적ㆍ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개헌 정국에서 진보 세력은 다양한 측면에서 최대한의 개헌 쟁점들을 제기하고 그것을 관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개헌 정국을 맞아 진보적인 의제를 공론장에서 우리 사회의 공동의 의제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 앞으로 몇 십 년 뒤에 올 수 있을지 모를 기회를 날려버릴 것이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적인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도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상반기 중에 모종의 임기단축 개헌 내지 탄핵의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원래 예상보다 5~6개월의 시간이 당겨진 셈인 만큼 좀 더 서둘러서 논의를 개시하고 조직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헌법 및 헌정 자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둔 것은 “물질적 헌정”(material constitution) 개념이다. 이 개념은 1930년대 독일의 헌법학자였던 헤르만 헬러(Herman Heller)와 이탈리아의 법학자였던 코스탄티노 모르타티(Costantino Mortati)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으로, 오랫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2000년대 이후 유럽과 영미, 그리고 중남미 법학자들 및 철학자들, 그리고 정치학자 및 사회학자들에 의해 재발굴되어 최근 10여 년 동안 비약적인 이론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개념은 기존의 근대적 유럽 헌법 개념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및 영미법학, 특히 미국 법학의 영향에 따라 헌법이 개인의 권리 보호 및 사법심사에 초점을 맞추게 된 규범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에 입각하여 도입되었다. 따라서 물질적 헌정을 제창하는 이론가들은 현실로부터의 허구적 독립성 및 자율성에 입각하여 헌법 및 법 체계를 사유할 것이 아니라, 헌법 개념 자체를 현실과 법의 상호 연관성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헌정은 독립된 법조문 텍스트로서의 헌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헌법을 가능하게 할뿐더러 헌법의 기능과 재생산 역시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적 조건들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개념이 된다.
내가 물질적 헌정 개념을 기반으로 을의 민주주의를, 따라서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를 사고해보자고 제안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앞에서 다중적 재난에 관해서 논의했고 다중적 재난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다중적 재난이 현재의 한국 및 한반도 상황에서 긴급한 쟁점으로 현상하는 불길한 징후들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뉴라이트의 약진이 심상치 않다. 해방 80주년, 한일협정 60주년,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12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에는 아마도 뉴라이트의 한국 근현대사 다시 쓰기 작업, 따라서 수구 반공주의적 우파 세력의 역사적ㆍ정치적 정당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도될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뉴라이트가 사라질까? 아마도 확실히 얼마간 타격은 입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뉴라이트는 (대개 단수의 명사를 사용해서 지칭하긴 해도) 단일한 세력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여러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세력들은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약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염두에 둔 지배세력은, 재벌을 비롯한 경제적 지배 세력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국민의 힘을 중심으로 한 수구 우파 정치 세력이 다른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고, 보수 개신교를 비롯한 종교 세력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으며,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과 학계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이 네 가지 세력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핵심 기득권 세력으로, 1987년 민주화 및 1997년 헌정사 최초의 정권 교체에 뒤이어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의 연속 집권을 경험한 뒤 엄청난 위기감 속에서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 민주당 중심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반격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결속력을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였다. 따라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뉴라이트는 소멸하지 않으며 자동적으로 약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뉴라이트는 한국 사회의 구성적 요소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것은 유럽이나 미국 또는 중남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번성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도 마찬가지이지만, 뉴라이트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한국의 정치공동체, 따라서 물질적 헌정의 두 가지 요소를 대표하는 세력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중 하나는 분단과 한국전쟁 시기에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 한 국가폭력의 주도 세력, 이른바 ‘분단체제’를 구성하고 지속하는 세력이며,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적 지배 세력이다. 뉴라이트는 기원에서는 국가폭력과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지배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신자유주의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오늘날 한국의 물질적 헌정 및 그것에 기반을 둔 지배 체제와 불평등 및 차별 구조의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우리가 뉴라이트 현상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이런저런 주장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이 증상으로서 표현하는 물질적 헌정의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며, 바로 이러한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그들이 수행하는 실천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물질적 헌정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의미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위상 및 정치적 성격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 방식은, 지난 1979년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가 수상이 되고 그 다음해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영미의 지배적인 경제 정책 및 그 이데올로기로 군림하게 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신자유주의는 세계화, 금융자본의 우위, 자유방임 시장, 효율성에 대한 맹신 등으로 환원될 것이며, 때로는 비정규직의 확산, 공기업 민영화 그리고 경쟁 논리, 각자도생 같은 이런저런 이데올로기 내지 현상들과 결부될 것이다.
하지만 푸코가 처음 제안한 바 있고, 최근의 주목할 만한 연구들(특히 피에르 다르도ㆍ크리스티앙 라발의 저작들)이 명료하게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는 40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맞선 정치적ㆍ경제적 반동의 장구한 흐름이었으며, 그 자체가 물질적 헌정의 핵심 요소로 기능해왔다. 이는 흔히 경제학자들로 간주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사상가들,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대표자들인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빌헬름 뢰프케(Wilhelm Ropke), 알렉잔더 뤼스토우(Alexander Rustow) 같은 이들이 동시에 반민주주의적인 정치를 추구했던 (극)우파 정치학자들 및 법학자들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단지 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려고 했으며, 이를 헌법 자체의 수준에 기입하려고 했던 공격적인 (극)우파 정치가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정교함이나 체계성은 다소 부족하다고 해도 뉴라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뉴라이트 현상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슨 독트린을 갖고 있고 어떤 주장을 하는가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한국의 지배 세력과 어떤 조직적인 연관성을 갖고 어떤 일을 하는지, 그것이 한국의 물질적 헌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5. 개헌 정국의 쟁점
이런 측면에서 2025년에 열릴 개헌정국에 주목해야 한다. 진보 세력이 조만간 닥칠 개헌 정국에서 무력하게 대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개헌의 중심 의제로 삼을지, 더 나아가 헌법 및 헌정 개념 자체를 어떻게 전환하고 개조해야 하는지 면밀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의제들에 주목해야 한다.
① 노동 및 사회적 시민권의 의제: 이것은 특히 사회적 시민성(social citizenship)과 관련된 의제다. 발리바르와 산드로 메차드라가 각각 강조한 바 있듯이, 사회적 시민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수립된 진보적인 물질적 헌정의 핵심을 이루는 계기였다. 그것의 중요성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의 헌법 내에 ‘개인’이나 추상적 ‘인간’이 아닌, 더욱이 단지 ‘국민’도 아닌, 피지배계급으로서 노동자의 권리, 노동을 중심으로 한 여러 권리들이 헌법적인 가치로 기입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후 복지국가 또는 사회국가의 구성은 이러한 헌법적 토대에 입각해 있으며, 역으로 말하면 헌법적 조항들 자체가 자신들의 존재를 헌법에 기입하려는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민중들의 사회적 투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이 가장 중요한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사회적 시민성과 관련된 조항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지난 4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신자유주의적인 물질적 헌정이 오늘날 다중적인 위기 또는 재난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회복하거나 기입해야 할 일차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 평화체제 의제: 개헌 정국의 또 다른 주요 의제는 마땅히 ‘평화체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87년 개헌 이후, 그리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통일을 전제로 한 잠정적이고 특수한 관계라는 규정에 묶여 왔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민족적인’(ethnic) 토대 위에서 사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민족적 토대 위에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사고될 경우 잘 진행되면 민족 동질성에 기초를 둔 남북의 협력과 화해를 진척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필요 이상의 적대감을 고취할 수 있다. 적대적 대립 위에서 일시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다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곤 했던 지난 80여 년 동안의 남북 관계가 이를 잘 보여주거니와, 애초에 한국전쟁이 수백 만 명의 군인 및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세계사적인 비극으로 전개되고 남북관계가 적대적인 분단관계로 고착된 데에는 남한과 북한이 모두 민족적 동질성의 토대 위에서 전면적인 통일만이 분단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분단과 한국 전쟁에서 이미 8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고, 남한과 북한이 그동안 독립적인 국가로서 존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통일’을 전제로 한 헌법 조항들이나 남북기본합의서는 효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더욱이 올해 1월 15일 발표된 “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의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은 북한이 선제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민족” 관계를 해체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러한 해체가 적대적 대립 위에서 선언되고 법제화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해체가 정치 공동체의 민족적 토대를 해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우리가 개헌 정국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북한의 해체 작업에 상응하는 해체 작업을 우리도 우리의 헌법과 관련하여 수행하되, 그것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방향에서 수행하는 일이다.
③ 생태적 헌법 의제: 이것은 이중적인 쟁점을 담고 있는 의제다. 하나는 무엇보다 미래 세대의 몫을 헌법 내에 어떻게 기입할 것인가의 쟁점이다. 현존하지 않는 미래 세대의 권리와 생존 여부가 오늘날 우리의 생태적 실천 여부에 달려 있는 만큼, 이것은 자크 데리다가 말하듯 유령과의 관계로서 세대간 정의를 어떻게 헌법화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것은 비인간 타자의 몫을 헌법 안에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가의 쟁점도 포함하고 있다. 인류세 내지 자본세와 관련하여 자주 논의되듯이,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적 재난은 단지 인간들하고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며, 비인간 타자들, 특히 다양한 생명체들의 몫과 관련된 문제다. 오늘날의 생태계 재난이 산업화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적 문명의 전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④ 체제 전환 의제: 민주화 이행이란 무엇인가?
민주화 이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 한국 정치학에서 폭넓은 합의를 얻고 있는 관점에 따르면 두 가지를 핵심 내용으로 삼는 이행이다. 곧 그것은 한편으로는 군부독재 체제(또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 정국 및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났던 국가폭력을 포함하여 권위주의 체제에서 자행된 국가폭력 및 사회적 폭력에 대한 회복적 정의를 추구하는 이행이다. 이러한 민주화 이행이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고 민주주의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민주화 이행에 관한 이러한 관점이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 역시 명백해 보인다. 이는 내가 이전에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를 비교하는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러한 관점이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한 두 가지 입장 가운데 단계론적 입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단계론적 입장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2단계 과정으로 이해한다. 곧 권위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일단 확립하는 것이 첫 번째 민주화라면, 두 번째 민주화는 이렇게 정착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내실을 다져가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주로 자유주의적인 틀)을 전제한 가운데, 그 범위 내에서 진행되는 제도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이해된 민주주의의 민주화 또는 사회적 개조 내지 민주주의적 개혁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틀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을 가리키지,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를 설립하거나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구조 자체를 전환하는(transform)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자유 민주주의의 틀을 전제한 가운데 그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제3의 길’로 유명한 앤서니 기든스 등이 그에 앞서 먼저 제시한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한, 따라서 민주화 이행에 대한 유일한 관점은 아니다. 예컨대 포르투갈의 탈식민주의 법학자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고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거니와, 이것은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기든스의 관점과 달리 중남미 대륙을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 또는 서발턴 정치학의 관점에서 제시된 주장이다. 드 소우자 산투스는 지난 30여 년 동안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글로벌) 물질적 헌정의 변혁을 추구해온 사람이다. 단지 정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생산과 지식, 법, 탈국민적 질서 및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그는 유럽 중심주의 및 글로벌 노스의 헤게모니를 탈구축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의 대항 헤게모니 또는 대항적인 물질적 헌정의 구축을 추구해왔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메타민주주의적 지위를 전제하는 기든스(또는 하버마스)나 최장집의 입장과 달리 민주주의의 재발명이라는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제창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그 이후에 확립된 자유주의적인 틀의 강점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것을 일종의 메타 민주주의적 모형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근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혁명적인 변화였다면, 앞으로 이것과 비견될 만한 민주주의의 또 다른 혁명적인 전환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우리가 지금 그런 시기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또는 과정으로서의 민주화라는 표현은 최장집보다 훨씬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틀 그 자체를 구조적으로 전환하는 것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근대 국민국가(또는 그의 용어법대로 하면 “국민사회국가”(national-social state)) 속에 구현된 민주주의 헌정의 역사적 진보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지배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갈등적인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과 다르지 않다. 어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서 존재하고 작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안에 내재하는 탈민주화의 경향에 맞서 새로운 민주화의 운동을 추구해야 한다.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로의 지속적인 쇄신 운동이 없는 민주주의는 정의상 이미 탈민주화의 방향으로 퇴락하는 민주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본질 자체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미증유의 다중재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추구해야 하는 민주화의 운동 역시 이전의 민주주의의 성취 및 목표를 뛰어넘는 더 근본적인 과제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개헌에서 사회적 약소자들 및 그들을 대표하는 세력은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개헌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1조 2항에 나오는 “국민”이라는 명칭을 어떻게 바꿀지,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에 관한 내용을 어떻게 기입할 수 있을지, 장애인이나 이주자 등의 권리는 또한 헌법적인 차원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