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출간될 [황해문화] 겨울호 "권두언" 올립니다.
이번호는 "인공지능: 기술, 이데올로기, 사회"를 특집으로 하고 있고,
모두 다섯 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특집 글 중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보기술적 재앙에 대하여: 역사성의 종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 선생님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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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재난 시대의 “인공지능혁명”
2022년 12월 미국의 인공지능연구소 오픈AI가 챗GPT를 출시하면서 본격화된 이른바 “인공지능 혁명”이 전 세계에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1956년 마빈 민스키 등에 의해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처음 사용된 이래 70년의 역사 동안 인공지능 연구는 몇 차례의 도약과 침체기를 거치면서 발전해왔는데, 챗GPT로 표현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공지능 연구에서 새로운 도약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ㆍ정치적ㆍ군사적 변화를 촉발하고 있다. 출시 2개월만에 챗GPT 사용자가 1억명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이제 인공지능 기술이 전문가 영역을 넘어서 광범위한 대중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범용 기술이 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돌풍은 인공지능 개발과 관련이 있는 연구자들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제 응용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순수과학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은 필수불가결한 지적ㆍ기술적 요소로 공인을 받은 셈이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전 세계적으로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중심적인 이유는 이전의 인공지능 기술과 달리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은 오랫동안 예견되었던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 더 나아가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출현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시기 어느 시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눈앞의 현실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챗GPT를 발표한 오픈 AI를 비롯하여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 이른바 ‘빅테크’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앞 다퉈 치열한 연구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생성형 인공지능은 더 이상 좁은 범위의 전문가 영역을 넘어 산업, 교육, 문화, 돌봄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광범위한 인공지능 사용을 가능케 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또한 ‘소버린 AI’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인공지능은 국가의 정책 및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파괴적인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 뒤처지는 나라는 경쟁국이나 적대국에게 종속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세계 각 국은 앞다퉈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뛰어들고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이런 급격한 변화에 맞춰 인공지능의 혁신이 보여주는 기술의 실상과 거기에 감춰 있는 이데올로기적 가상,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출현이 사회 전체 및 전 세계적인 변화를 촉발하고 있는 만큼 이번 특집은 인공지능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나 윤리적 토론을 넘어서, 인공지능의 역사, 인공지능의 정치경제, 인공지능의 기술적 인간학, 인공지능의 윤리적 쟁점과 철학적 성찰 등과 같은 포괄적이고 다면적인 측면들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네 가지 쟁점이었다. 첫째, 챗GPT와 같은 것이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오래된 인공지능 연구의 산물이라는 점을 황해문화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역사가 단지 과학 및 공학 전문가들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기반을 둔 과학사 내지 과학기술사일 뿐만 아니라 경제사이기도 하고 정치ㆍ군사적인 역사이기도 한, 아주 복합적인 역사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및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사이의 냉전이라는 정치ㆍ군사적 배경이 없이는 인공지능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지난 2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 및 기존 기술의 업데이트의 가속화는 앞으로 기업의 존망을 좌우할 인공지능 기술을 선점하려는 빅테크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기술적인 논의에 시야를 한정하기보다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인공지능 기술의 배경과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인공지능을 역사적ㆍ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둘째, 유능한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이 의미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이 가져올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에 관한 미래주의적 열광에 지배되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기계(인공지능) 사이의 추상적 대립에서 생겨나는 막연한 공포심과 거부감에 젖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후위기를 비롯한 생태적 재난이 촉발하는 또 다른 두려움과 결합하여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하여 수동적인 체념 상태로 대중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게 만든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챗GPT와 같은 첨단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적합한 기술적 인간학을 정립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기술을 이해하는 지배적인 관점은 도구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기술적 발전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유익하고 환영할 만한 것이며, 그것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부작용은 적절한 사용법을 터득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재현되듯이, 도구의 차원에 머물러야 할 기술이 오히려 주인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비롯한다. 더욱이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지능이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려야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짧은 시간 내에 훨씬 더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인간의 본질로 간주된 지능에서도 인간은 앞으로 기계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일이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기술을 편리한 도구로 이해하거나 주인을 지배할 수도 있는 위협적인 힘으로 두려워하는 것 모두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기술이 수행해온 구성적인 역할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며, 오늘날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갖는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함의를 파악하는 데도 인식론적 장애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상호 구성적이고 공진화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있어야, 불필요한 공포심과 근거 없는 열광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의 발전을 좀 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셋째, 챗GPT의 등장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미국의 대부분 빅테크 기업들이 기업의 사활을 걸고 생성형 인공지능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각 국가들마다 인공지능의 문제를 핵심적인 국가적 쟁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공지능의 문제가 좁은 의미의 전문가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 사회 전체 및 지정학적 쟁점이 되었으며, 패권주의적인 자본 축적과 정치적ㆍ군사적 경쟁의 장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기 위한 경쟁은 천문학적인 비용만이 아니라 전력 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낳고 있으며, 이러한 경쟁은 앞으로도 기업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공지능의 미래주의가 생태적 재난을 가속화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공지능의 경제적 이익이나 국가주의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치안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안목에서 인공지능의 정치경제학적 함의를 고찰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 개발을 둘러싼 거대 기업들의 경쟁은 디지털 자본주의의 전개과정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울러 인공지능의 정치적, 군사적 활용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시민과학”의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넷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공지능은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의 한계를 나타내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이미 2016년 알파고의 충격을 통해 더 이상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통제에 종속되는 도구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많은 대중이 절감하게 되었지만, 챗GPT의 등장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충격을 미치고 있다. 그럴수록 인공지능의 철학적 함의에 대한 성찰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본질적인 요소였던 역사성과 사회성이 ‘인공지능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가능할 것인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역사성은 하이퍼역사성으로, 사회성은 단자들 사이의 알고리즘적인 통치성으로 대체될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아울러 인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온 윤리적 범주들이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통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새로운 규범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는 것인지 하는 질문들 역시 우리가 우회하기 어려운 중요한 철학적ㆍ윤리학적 질문들이다.
쉽지 않은 이 네 가지 질문들을 다루기 위해 이번 특집은 네 사람의 국내 연구자들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 다섯 꼭지로 꾸렸다. 우선 김지연 선생은 이 분야의 전문가답게 인공지능의 역사를 “말하는 기계”의 관점에서 간결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능력에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발견한 데카르트의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말하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던 튜링의 시도는 인공지능의 역사가 서양 근대철학의 기원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생은 튜링에서부터 챗GPT에 이르는 인공지능의 역사를 주인과 도구의 관계로 이해하기보다는 일종의 공생 관계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인공지능의 문제를 단순한 기술이나 시장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이며 공공적인 사안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기술 및 지구의 주인이 아닌 공진화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선생의 주목할 만한 결론이다.
박승일 선생은 인공지능에 대한 정치경제학 비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단지 기술로서만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파악할 때 ‘인공지능 혁명’이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입장이다. 선생은 지난 3차례의 산업혁명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져왔으며, ‘4차 산업혁명’은 1980년대 이룩한 3차 산업혁명 이후 불과 30여 년 만에 도래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그만큼 자본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점점 더 짧은 주기로 점점 더 강한 충격이 요구된다는 점을 방증한다. 더 나아가 선생은 현재의 ‘인공지능 혁명’이 중국의 패권 도전에 맞선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왜 그토록 많은 비용과 자원을 소모하면서 사활을 건 인공지능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인공지능-자본주의-국가주의의 3각 동맹에 맞서 전 지구적 재난을 막기 위한 연대 및 정치경제학 비판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선생의 결론이다.
하대청 선생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빌려온 “부유하는 기표”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인공지능의 기술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마치 자명한 것처럼 사용되는 인공지능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사실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사회ㆍ문화적 맥락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 그 기표의 의미는 항상 문화적 상상계를 동반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선생은 현재 인공지능을 주도하는 이들은 인공지능의 모호한 정의를 활용하여 그 기표가 갖는 암시적 힘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친숙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이자, 생산성을 높여주는 효율적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강력한 존재로 나타난다.
선생은 인공지능의 암시적 힘은 두 가지 개념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자율성”이라는 키워드다. 이것은 사실 근대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상상계로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모방한 것이면서, 현재 인공지능 연구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자율성이 중시될수록 의존성과 돌봄은 폄하되기 마련이며, 사회적ㆍ인간학적 불평등이 정당화될 것이다. 두 번째는 “지능”이라는 키워드다. 인공지능이 과연 “지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논쟁적인 쟁점임에도, 이제 어느덧 인간의 지능을 측정하고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 간주되고 있다. 더욱이 연산 능력에 입각한 지능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지능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이 선생의 전언이다. 따라서 선생은 인공지능에 관한 대안적인 상상을 발명하는 것이 오늘날 시급한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윤리학자 목광수 선생은 인공지능의 윤리라는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선생은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혜택을 누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인공지능 윤리”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발전 단계별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적인 윤리가 필요할뿐더러 기존 윤리 이론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형식을 갖추는 통합적 윤리도 요청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요컨대 선생은 약한 인공지능에서 강한 인공지능, 그리고 언젠가 도래할 초지능 인공지능에 이르는 각 단계별로 상이한 윤리적 대응이 필요하며, 그것은 1인칭 관점의 규범성과 2인칭 관점의 관계성, 3인칭 관점의 보편성을 통합적으로 갖추는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은 현재 인공지능 윤리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논의되는 자율성 존중, 악행 금지, 선행, 정의, 설명 가능성이라는 5개 원칙을 제도 윤리의 층위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윤리는 이러한 제도 층위의 윤리를 넘어 덕성virtue 중심의 개발자 윤리를 포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아울러 범용 인공지능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면 단순히 도구가 아닌 타자로서의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가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될 것이다. 선생은 언젠가 도래할 탈인간중심적인 윤리를 예비하기 위한 과도기의 공존 윤리로서 인공지능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인공지능을 “재앙”catastrophe의 범주를 빌려서 사고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정보기술혁명은 생태학적 재앙, 전쟁의 일반화가 산출하는 재앙과 더불어 세 가지 재앙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다만 재앙이라는 개념에 대해 파국론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어원적인 의미를 제시하면서 선생은 정보기술혁명이 산출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식민화와 인간학적 소외의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기술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역사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역사성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집합적 주체성 및 사회적 관계성이라는 것이 사고 가능한가 하는 것이 선생의 글을 꿰뚫고 있는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주제서평에서는 김상민 선생이 특집 주제에 인공지능과 관련된 세 편의 책을 다루고 있다. 선생은 한편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장피에르 뒤피의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에 주목하면서 오늘날의 인공지능의 발전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시작된 사이버네틱스 연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선생은 다른 한편으로 기술인류학자 캐슬린 리처드슨의 로봇과 AI의 인류학을 읽으면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촉발하는 매혹과 공포가 사실은 동일한 판타지의 두 측면임을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의 인공지능 연구가 빠른 계산과 뛰어난 성능을 우선시하는 능력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가공할 만한 발전은 오히려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 곧 돌봄에 기반을 둔 관계론적 인간학의 모색을 요청한다. 결국 인간 자신 및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중요한데, 이 문제의 구체적인 쟁점을 선생은 김성우의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에서 찾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공지능을 손쉬운 문제 해결의 도구로 간주하기보다 파트너이자 연결자로서 이해하는 인공지능에 관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서평을 특집과 관련하여 읽어보면 얻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비평에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변혜진 선생이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주요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의료대란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선생은 현재의 의료대란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당사자인 정부와 의사협회 지도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다투기보다는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는 현재의 의료대란이 한국 의료 공급체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선생은 문제의 중심에는 빅5 병원을 중심으로 한 한국 의료자본의 수익성 추구에서 비롯된 영리적 의료공급체계가 놓여 있으며, 건강보험의 축소와 민간보험의 확장을 노리는 보험자본의 이해관계도 의료대란의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체 의사의 10%에 불과한 전공의들에 대한 과잉착취가 관행화되고 있고, 이는 전문의 자격증에 대한 보상을 돈과 특권으로 되돌려 받겠다는 왜곡된 집단 엘리트주의를 산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 의료 체계에서 제일 시급한 과제인 공공의료 체계 구축은 주변화되고, 의료 노동의 분절화와 지역의료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선생은 결론에서 의료 문제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국민 전체의 평등한 건강권에 입각하여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의료대란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두 번째 글에서 박동찬 선생은 올해 발생한 가슴 아픈 아리셀 참사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선생은 아리셀 참사가 위험의 외주화와 이주화가 낳은 비극이었다고 짚으면서 회사 측의 뻔뻔한 태도와 더불어 여러 번 위험 신호를 파악했으면서도 그것을 방치한 정부 당국의 안이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이 글에서 선생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아리셀 참사에서 희생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동포 노동자와 다른 이주 노동자 사이의 괴리라는 문제다. 중국 동포 노동자는 이주노동자이면서도 한민족이라는 혈통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에 의해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별개의 집단 정체성을 부여받아왔다. 이로 인해 중국 동포 유가족은 아리셀 참사의 원인을 중국 동포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 사회 및 노동 현장에서 이주노동자가 처해 있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길항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선생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저출산ㆍ고령화로 인해 발생하는 생산인구의 감소의 문제를 이주 노동자가 해소해왔음에도, 그들은 한국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ㆍ경제적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갈등의 장본인으로 지탄받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단결된 연대가 절실히 요구되는데, 중국동포 노동자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이러한 연대를 구성하는 데서 주요 걸림돌 중 하나가 되고 있는 셈이다. 선생은 이러한 갈등과 괴리는 만남과 연대투쟁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리셀 참사가 한국 사회의 향방을 좌우하는 또 다른 변곡점 중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죽산 조봉암에 관한 글을 싣는다. 오유석 선생은 조봉암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관해 갖는 의미를 제헌헌법과 관련하여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죽산은 제헌의원으로서 제헌헌법의 제정에 깊이 관여하여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과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헌법 안에 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죽산이 제헌헌법의 제정에 기여한 구체적인 면모를 9가지 측면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헌법 1조와 2조에 나타난 ‘대한민국’과 ‘국민’이라는 용어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서 우리나라의 국호 및 헌법 주체를 나타내는 데 부적절하다는 통찰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신체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더욱 적극적으로 헌법에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생존을 위해 노동권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사회부조(생존권)를 헌법 안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가치를 지닌 요소들이다. 앞으로 닥칠 개헌 과정에서 조봉암의 노력과 통찰은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문화비평에서는 지역 공론장 문제를 특집으로 꾸몄다. 흔히 ‘한국 사회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대구지역에서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온 천용길 선생은 박정희 동상 건립과 대구경북행정통합이라는 의제가 어떻게 대구 지역의 비판적 공론장을 무력하게 만들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구, 경북 지역에서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구는 보수의 심장이다’ 같은 단순화된 수사를 반복하지 말고, 지역 차원에서부터 문제 해결의 역량을 길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부산사회적경제포럼의 이동환 선생은 지역-수도권의 불평등과 차별화로 인해 현재 부산 지역을 비롯한 한국의 지역들이 소멸의 위험을 겪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의 산업구조가 저부가가치 제조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이로 인해 젊은 세대의 지방 탈출 현상이 가속화되어 지방의 고령화 및 인구감소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데서 비롯하는 현상이다. 아울러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토건자본의 난개발이 진행되면서 지역의 생태적 위기도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이는 결국 회복, 순환, 돌봄의 가치에 입각하여 어떻게 지역사회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할 것인가의 화두를 낳는다. 이희환 선생은 인구 300만의 대한민국 3대 도시로 꼽히는 인천광역시가 지역 시민들의 여론과는 상관없이 ‘글로벌 톱텐도시 인천’이라는 전형적인 성장담론 아래 일방적인 시정을 펼치고 있는 점을 문제 삼는다. 인천시가 펼치고 있는 주요 정책 및 사업들이 지역 공론장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숙의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지역 언론과 시민사회가 이를 제대로 비판하거나 견제하지 못하는 점이 현재 인천 지역 공론장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선생은 한편으로 새로운 헌정 체제를 구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시민들의 풀뿌리 실천들이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번 호 문학 코너에는 김탁환 선생의 「발채의 마음」과 신미나, 안상학 두 시인의 시편을 실었다. 세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따뜻한 문학적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 및 문화계 전체에 대해 여러 모로 뜻 깊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적ㆍ구조적 모순 및 그것에서 비롯한 폭력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섬세하고 사려 깊은 언어로 표현해온 여성 작가의 수상이라는 점에서 더 뜻 깊은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이 물신화되어 오랜만에 활력과 생기를 얻은 한국 문학이 문단 권력 및 출판 권력의 위계 질서를 더욱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황해문화]는 여느 때처럼 기성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싣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작가들의 개성 있고 독창적인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포토 에세이에는 레나 작가의 작품을 수록했다. 작가는 여성과 출산, 가부장제, 인공수정 같은 묵직한 주제를 개성 있는 사진 연작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흔치 않은 작가의 시각 이미지들이 깊은 성찰의 울림을 낳기 바란다.
이른바 “인공지능 혁명”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120호 권두언에서 말한 바 있듯이, 우리가 현재 직면해 있는 것은 현 정부가 초기부터 선전하고 있듯 “복합 위기”가 아니라 “다중 재난”이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합 위기 내지 다중 위기라는 용어법은, 그 용어의 원래 사용자들이 의도했던 바와 달리, 국내에서는 이미 정권의 치안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왔다. 더욱이 애덤 투즈를 비롯한 다중 위기론 제창자들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다중 위기라는 용어는 우리가 직면한 다중 재난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위기’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개연적인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해악과 피해를 함축하고 있을 뿐, 이미 중첩되어 전개되고 있는 다중 재난의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복합 위기가 되었든 다중 위기가 되었든 간에 위기라는 용어법은 위기라는 것을 본성상 객체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이로 인해 다중위기론에서는 도래할 위기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을 선험적으로 전제할 뿐, 그 주체의 능력의 위기나 모순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혁명”은, 생태적 재난이나 전쟁의 재난과 더불어 오늘날 진정한 재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적인 것 자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전, 따라서 인간 자신의 “지능”을 초월하는 인공적인 지능의 개발과 발전은, 인간의 주체성과 역량의 단적인 증거이면서 동시에 그 주체성을 잠식하고 소외시키는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행위성의 고도의 발전이 그 행위성의 궁극적인 조건인 지구 시스템 자체를 동요하게 만들고 있는 현재의 생태적 재난과 상동적인 형태를 띤 재난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것들은 또한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와해하고 일반화된 폭력과 전쟁 상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이 함축하고 있는 재난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위기와도 연결되어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다중재난의 상황이 미증유의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처럼 주체적인 것 자체가 재난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레 비관주의에 빠질 필요도 없지만 섣부른 대안에 쉽게 열광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상황을 엄밀히 관찰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독자 여러분에게 이번 특집이 다중재난 시대의 “인공지능 혁명”을 인식하고 살아나가기 위한 한 가지 지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