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인 [역사에 관한 글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을 위한 해제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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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비-역사, 알튀세르의 비-현재성: [역사에 관한 글들] 한국어판 해제
- 알튀세르의 새 유고집이 나왔군. 읽어봤어?
- 방금 읽어봤지.
- 그래 어떤 거 같아?
- 흠, 놀랐지. 아니 어쩌면 그렇게 놀랄 것도 없겠지. 왜냐하면 읽기 전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놀랍지만 놀랄 것도 없다 ... 어떤 점이 그렇지?
- 마치 이 책과 우리 시대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백 만 년 전의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게 놀라웠지. 이 유고집에 수록된 글들은 1963년에 쓴 글에서부터 1986년에 쓴 글까지 약 20여 년의 시간적 범위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 1970년대 초ㆍ중반에 작성한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 실제 느낌은 수백 년은 된 것처럼 느껴져. 반면에 예컨대 발터 벤야민이 1921년에 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아니면 1940년에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같은 글들은, 알튀세르의 이 책보다 족히 50년 내지 30년 전에 쓴 것인데도 오늘날에도 생생한 현재성이 느껴지지. 그런 점이 놀라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아까 말했듯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그럴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야. 알튀세르의 다른 유고집, 예컨대 [검은 소]나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같은 것을 읽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이미 지나간 시대의 지나간 언어로 말하고 너무 낡은 이론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이지.
- 아 그렇군. 그건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겠지? 알튀세르는 말하자면,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철학자들(들뢰즈,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등)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니까 말이야.
알튀세르는 몽테스키외에 관한 훌륭한 작은 책을 썼고[Louis Althusser, Montesquieu, la politique et l’histoire, PUF, 1959; 루이 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라캉 정신분석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썼고[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1964),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IMEC/Stock, 1993; 「프로이트와 라캉」, 김동수 옮김,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피콜로 극단에 관한 비범한 비평을 했고[Louis Althusser, “Le “Piccolo”, Bertolazzi et Brecht: Notes sur un théâtre matérialiste”, Pour Marx, Éditions la Découverte, 1996;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루소에 관한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고[Louis Althusser, “Sur le Contrat Social (Les décalages)”, Cahiers pour l’analyse no. 8, 1967; 「루소: 사회계약에 관하여」, 마키아벨리의 고독, 앞의 책. 또한 루이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및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참조.],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창적인 유고를 남겼고[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1972), Tallandier, 2009], 더욱이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심지어 논문 한 편도 발표하지 않고서도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지만[특히 Juan Domingo Sánchez Estop, Althusser et Spinoza. Détours et retours, Éditions de l'Université de Bruxelles, 2022 참조.], 그 모든 게 결국 마르크스와 관련되어 있었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창성을 사고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거쳐 우회하려고 했고,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 특히 라캉 정신분석과의 “이론적 동맹”을 시도하려고 했고, 관념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사고해보기 위해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썼고, 구조적인 역사 개념과 다른(결국 거기에서는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기는 어려우니까), 말하자면 정세 또는 콩종크튀르conjonctures로서의 역사를 극한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마키아벨리를 끌어들인 거지.
- 그렇지.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빼면 남는 게 없지. 그런 만큼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할까?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나 양상이 있을 테니, 너무 경제주의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교조주의적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어보면, 역사란 무엇인지,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역사와 비역사의 구별 기준은 무엇인지에 관해 철학적 논의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게 결국 생산양식으로 귀착되거든. 이렇게 말하지. “만일 최초심급에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최종심급에서는 생산양식들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는 하나의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의미한다.”(308~309쪽) 또는 이렇게도 말하지.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으로부터의 [역사-인용자 추가], 그리고 사회구성체들의 생산양식에 의한 역사, 즉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312쪽) 마치 사회구성체나 생산양식 말고는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 그럼 미시사나 여성사 같은 건 뭐지? 또는 이주사나 환경사는?
더 나쁜 건 끊임없이 생산양식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한다는 거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레닌의 [제국주의]에 기초하여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그리고 또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역사적 동력”(272쪽)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1980년대라면 아마 여러 사람에게 당연한 진리처럼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난 거 아닌가? 말 그대로 지나간 역사, 돌아오지 않을 역사지. 물론 계급에 대해 계급투쟁이 선행한다는 주장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관점과 부합하는 그럴 듯한 얘기인데,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공산주의자 선언]의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일 뿐이다”라거나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 같은 명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너무 낡아빠진 얘기 아니야? 이런 본질주의, 이런 환원주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읽어보는 듯해.
- 나도 한 마디 해보자면, 생산양식이나 계급투쟁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꼭 본질주의적이라거나 환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까 자네가 지적했듯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운명을 같이 한 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작업을 자신의 철학 전체의 내기로 삼았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지.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 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1972),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p. 182.]
이건 알튀세르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개조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사실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라고 하기는 어려워.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를 내고서 교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온갖 비판과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더욱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기 위해 고안해낸 과잉결정이라든가 인식론적 절단, 아니면 이데올로기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호명 같은 개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바깥에서도 널리 활용되었잖아.
그럼에도 자네와 같은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을 교조주의적이라거나 본질주의, 또는 환원주의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외상(, trauma)이 깊다는 뜻이겠지.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생산양식이나 생산관계 또는 계급투쟁을 말하고, 사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 논하는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실제 그런 범주들이 먼 과거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범주들, 그리고 그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20세기 노동자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의 상처를 망각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또 그것은 그만큼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의 이 책이 낡은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깊은 신념을 바탕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썼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 왜냐하면 자네가 말한 대로 알튀세르가 다양한 이론적 원천을 활용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비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얘기지. 1960~70년대라면 알튀세르의 이론이 새롭고 의미가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야. 오늘날에는 알튀세르의 제자뻘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옛날 얘기로 간주되고 있잖아?
더욱이 알튀세르가 아무리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해도 그는 한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교조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해. 이 책에도 나오지만 알튀세르는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생산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생산양식은 단순히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는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역사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지. 말하자면 칸트의 초월론적인 것이 알튀세르에게는 생산양식에 해당되는 거야. 무엇이 역사적인 것이고 무엇이 역사적인 게 아닌지, 수많은 사건들 내지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게 바로 생산양식이라는 것이지. 이것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정교한 이야기이긴 해도 결국 교조주의적인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결국 인종적 관계도, 성적 관계도, 그리고 생태적 위기도 모두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최종 심급에서”. 하지만 최종 심급이 가능하다고,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 아닐까?
- 나는 자네들의 이야기에 각자 일리가 있다고 봐. 한편으로 보면 알튀세르는 확실히 생산양식을 일종의 초월론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초월론적인 기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주의 또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관념론 철학과 달리 마르크스는 초월론적인 기준을 초월론적 주체나 정신에서 찾지 않고, 물질적 토대인 생산양식에서 찾았다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철학자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또 이렇게 단일한 초월론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오늘날의 사유 흐름에 비춰보면 낡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오늘날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나 생산양식에 대해,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대신 푸코를 따라 규율권력이나 생명권력, 통치성에 대해 말하거나 아니면 신유물론자들처럼 사물 그 자체의 권력(power of the things)에 대해 말하지. 또는 젠더나 성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거나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느라 바쁘지. 아니면 “적녹보 연대”라든가 “교차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말이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리고 그것이 산출한 거대한 외상과 더불어 세계는 변화하고 사회운동도 많이 바뀌었고 아울러 사상의 조류도 크게 변화한 거지. 우리나라만 해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후에 민중민주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대신 ‘포스트’ 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이 사상계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가역적인 현상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20세기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돌아오지 않을 역사”가 되었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게 아닐까?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변화한 것은 무엇이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방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등을 묻는 셈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에 따라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가 돌아오지 않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건재해 있고, 착취와 배제, 생태계 파괴 등과 같은 각종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는데 말이야. 진지한 이론가나 시민이라면, 또는 적어도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또 당연히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되고, 그것은 생산양식, 생산관계, 계급투쟁 같은 질문을 수반하게 되겠지. 그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어휘법은 오늘날의 사상 조류와 잘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의 질문이나 주제는,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도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내게도 발언의 기회를 줘. 나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한 마디 해볼게. 자네는 알튀세르와 오늘날의 사상의 차이를 “어휘법”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심층적일 수도 있을 듯해.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작업은 이른바 ‘언어적 전회’ 바깥에서 진행되었는데, 포스트 담론은 결국 언어적 전회 이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담론’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유행한 것은 이 때문이지.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언어적 전회의 관점에서 보면, 실재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면 생산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테면 담론 양식일 거야.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담론 양식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 그럴 수도 없고.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것의 자리에 놓이게 되면 담론은 대문자 주체가 되거나 실재 그 자체가 될 텐데, 언어적 전회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따라서 담론적인 것은 인식론적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 상위의 질서에 놓이되 그 자체가 초월론적인 것은 아닌 셈이야. 이런 측면에서 보면 데리다가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antal)이라고 부른 것은 언어적 전회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지.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적인 것은 단지 고전적인 초월론 철학에서처럼 ‘가능성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경우 ‘담론’은 단순히 방법론적 용어 이상의 것이 되지.
초월론에서 유사초월론으로의 전환은 사실 보편의 다수성과도 관련되어 있어. 보편이 단일한 것이라면 단일한 초월론적 토대(말하자면 생산양식 같은 것)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충분하겠지만, 다수의 보편이 문제가 된다면 과잉결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과소결정(sousdétermination)을 함께 말해야 하지. 과소결정은 바로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언어적 전회 바깥에 있었지만, 사실 그 나름의 방식대로 언어적 전회와 비견될 만한 문제설정의 전환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과잉결정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어느 시점 이후부터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함께 말하거든. 그리고 그 시점은 아마도 68의 실패 이후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하면 초기에는 어떻게 하면 혁명이 일어나는지, 혁명의 가능 조건에 관해 과잉결정 개념으로 답변하려고 했다면, 68 이후에는 어떤 조건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는지 그 불가능성의 조건을 함께 사고하려고 했으니까.
아울러 이와 더불어 알튀세르는 나름의 방식대로 다수의 보편을 사고해보려고 한 게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이 존재하는 듯해. 한편으로 알튀세르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을 반()교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다수의 보편을 사고하려고 하지. 그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토픽”이야.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론에 토픽의 형태를 부여한 것인데, 마르크스에게 토픽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물의 비유로 나타나지. 토픽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은 다수의 보편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구별”(128쪽)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 법적ㆍ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같은 곳)을 각각 독자적인 층위 내지 “어떤 통일체에 내부적인 효력의 정도들”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
하지만 다수의 보편에 대한 사고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아무래도 우발성의 유물론이야. 이 책에서는 「발생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점이 잘 드러나지. 알튀세르는 “공접합”(conjunction)이라는 범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자본”을 읽자]에서 제시된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을 포함한 고전적인 생산양식 이론과 비교해볼 때, 공접합 개념을 중심으로 한 우발성의 유물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돼. 하나는 생산양식의 요소들을 비동시대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거지(93쪽 이하). 이 경우에만 “맹아”라는 형태로 출현하는 목적론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게 가능해지거든. 다른 하나는 요소 A와 요소 B의 관계를 선형적 인과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구조적 효과에 따른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이야. 이 개념 덕분에 생산양식 내에서 상이한 요소들의 인과적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에게 구조적 통일성 내지 제약을 부여할 수 있게 되지.
더욱이 알튀세르는 제한된 지대 내지 시퀀스에서 선형적 인과성의 효력을 긍정하고 있기도 하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서, 초월론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불분명하지.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과소결정 개념의 토대 위에서 급진적으로 탈구축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보편의 다수성을 사고할 수 있거든. 요컨대 생산관계와 인종관계, 젠더관계 또는 생태적 관계를,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의 배타적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것이지. 우발성의 유물론은 그런 사고의 싹을 함축하기는 하는데, 역으로 보면 그것은 구조적 인과성 전체의 효력을 실추시킬 위험도 지니고 있지.
그런데 이것은 알튀세르의 결함은 아니야. 우발성과 구조적 인과성을 함께 사유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거든.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철학적 과제인데 말이야.
-나는 다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어. 내게는 알튀세르가 철저하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사유하려고 한 것이 인상적이더군. 아까 자네는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오늘날 생생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 벤야민도 철저하게 패배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있지. 그가 메시아적인 것 또는 “약한 메시아적 힘”(「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2번째 테제)이라고 부른 것은 과거에 패배한 사람들이 남긴 “구원이라는 항목을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색인(heimlichen Index)”에 담겨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의 결을 거슬러 “억압받는 이들의 전통”에 입각해서 역사를 읽어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지.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 책에서 여러 차례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아.
예컨대 알튀세르는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곧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는 명제를 “모든 형태들 밑에 있는 비- 역사의 광대한 장을 열어젖”(136쪽)힌 것으로 해석하지. 이것은 참으로 알튀세르다운, 이단적인 해석이지. 그에 따르면 역사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 곧 역사적 사실, 역사적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사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서구 전통 속에서 쓰인 공식적인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고 현상이야. 이것은 이를테면 역사의 “좋은 측면”이지. 반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의 나쁜 측면”을 이러한 지배계급의 공식적인 역사 밑에서 사라진 역사, 또는 공식 역사에 의해 역사가 아닌 것으로 배제된 만큼 “비-역사”라고 재해석하지. 따라서 마르크스가 “역사는 나쁜 측면에 의해 전진한다”고 말함으로써 보여준 것은 “착취당하고, 압제에 신음하며, 모든 노역과 학살을 위해 과세를 부과당하고 징집되었던 대중들의 생성”, 곧 “비-역사”가 되는 거야. 어때? 벤야민 생각과 놀랄 만큼 가까운 발상이 아닌가?
- 자네 얘기를 들으니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어. 말하자면 세 가지 유사초월론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지.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은 칸트 또는 후설적인 것이지. 원래 데리다의 철학적 원천이기도 하고. 반면 패배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으려는 벤야민의 유사초월론은 라이프니츠적인 거야. 벤야민은 “지금-시간”(Jetzt-Zeit)라는 것을, 공허한 동질적 시간과 대비되는 일종의 역사의 모나드로 이해하니까 말이야. 반면 알튀세르가 과소결정 개념이나 우발성 개념을 통해, 또는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패배하거나 소멸된 것들의 비-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시사하는 것은 스피노자에 기반을 둔 유사초월론이 아닐까 싶어.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지!
- 그런데 지금까지 듣고 있자니 자네들은 아무도 「문학사에 관한 대화」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군. 마치 그 글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하긴 ‘문학사’는 역사라고 하기도 뭐하고 철학이라고 하기는 더 그러니,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역사에 관해 쓴 글모음에서 제대로 주목받기는 처음부터 어렵겠지. 그렇지만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지만 놀라운 통찰력을 품고 있는 글이 「피콜로 극단」이듯이, 알튀세르의 이 책에서도 이 글이 다른 글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나는 알튀세르가 “문학사의 병리학”에 관해 말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 “전 세계 모든 문학의 사산아들”(58쪽)에 관한 문학사라니! 이런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알튀세르는 이러한 문학사가 진정한 의미의 문학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사는 항상 세 가지 요소를 품고 있는데, 첫 번째가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되었던 것의 역사”라면 두 번째는 문학으로 생산되고 성공했던 것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서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의 역사가 바로 그것들이지(61쪽). 참 놀라운 생각 아닌가? 자네가 방금 전에 언급한 비-역사와도 관련되는 것이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과소결정 개념은 결국 이런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 그건 알튀세르 제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가 “문학의 재생산”에 관해 말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마슈레가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가?](1990) 이후로 ‘문학 생산의 이론’보다는 ‘문학 재생산의 이론’에 더 관심을 기울였지. 그리고 그건 결국 문학의 역할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공백, 빈 틈, 균열을 발견하는 것에서 찾지. 알튀세르의 생각과 아주 가까워 보여.
- 그런데 오늘날은 ‘문학의 종언’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사실 문학사는 비-문학의 역사가 된 건가? 아니면 문학의 비-역사가? 하하.
- 정리하자면, 이 책은 결국 알튀세르의 비-역사 또는 비-현재성의 증거가 되겠군.
- 사실 오늘날은 역사라고 하는 것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게 된 시대인 만큼, 비-역사, 비-현재성이라는 게 나쁘지 않겠군.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때맞지 않음, 시대에 거스름(contretemps)으로서의 비-역사인 셈이지.
- 그럼 자네가 아까 알튀세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 낡았다고 하는 것은 칭찬이겠네?
- 이봐,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지 말라고. 그건 따져봐야 아는 거라고.
-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하고 말하고 있는 거지? 자네는 누구고 자네는 또 누구인가? 우리는 과연 몇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거지?
- 그게 뭐가 중요하지? 자네는 자네가 누구인지, 자네가 몇인지 아나?
- 하긴 역사가 시작되면 모든 게 빗나가고 꼬이는 법이지. 그래서 특히 역사가들이 ‘민족’에 집착하는 건지도 모르지. 마치 그게 역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 그건 또 다른 초월론적인 것이겠지? 그들이 이 책에서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