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멈춰 섰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결코 늘 봐오던 그런 일상적인 시위가 아니었다. 여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불타고 있는 경찰차를 피해서 지하도를 이용해야 해야 했다. 지하도의 넓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래쪽에는 깨진 벽돌이나 최루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최루가스가 온통 지하도 안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뿌연 안개 색의 가스가 얼굴을 덮쳤고,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연신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출구를 찾느라고 법석이었다. 나는 다른 출구를 찾아서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그야말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날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고 선생, 어서 여길 나갑시다."
우리는 순천 가는 버스로 향했다. 막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네! 사람을 죽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땅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군인 하나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노려봤다. 놀란 군중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군인이 소리쳤다.
"다들 비켜. 당장!"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 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 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려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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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이 나지 않도록 주택가의 핏자국을 지운 것이 경찰이라면 범인은 은폐공작을 전혀 하지 않았다. 범인에게 범행을 숨기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뜻이다.

소동이 벌어져도 상관없었거나, 어쩌면 소동을 벌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아카리 자매는 (두 사람이 흡혈종 관련 문제 전반을 다루는 대책실 직원을 고려하면) 흡혈종의 존재를 일반인에게 감추는 한편, 다짜고짜 덤벼들지도 모르는 흉악한 상대와 대치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애당초 흡혈종은 인간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수가 적으니까 흡혈종이 일으키는 범죄도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어요. 흡혈종이 인간에 비해 유달리 폭력적인 것도 아니고요. 다만 흡혈종은 인간에 비해 신체 능력이 우월해서 마음만 먹으면 맨손으로도 인간을 죽일 수 있어요. 혹시나 살인 자체에서 쾌락을 찾는 인간이 흡혈종으로 변화하면 정말 골치가 아프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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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들의 세상
혜영.Kim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외출시에 꼭 챙기는 것들이 있다.

핸드백 안에 화장품이 든 파우치, 스케쥴러, 휴지, 물티슈, 손세정제, 핸드크림 그리고 책이다.

책 한 권은 꼭 들고 다니며 읽곤 하는데, 평소 자기계발서나 인문서 위주로 들고 다녔다면 요즘은 무조건 에세이만 들고 다닌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일까.)

시중에 나온 디즈니나 카카오 캐릭터를 내세운 캐릭터 에세이는 한 두권 빼고는 다 섭렵한 것 같다.

그러다 '콩' 캐릭터가 눈에 띄어 읽게 된 것이 바로 『콩들의 세상』이다.

콩, 콩, 콩! 콩 캐릭터를 앞세워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철학 에세이인데 순식간에 읽은 것 같다.


"행운의 배꼽을 기억하면 삶의 미래도 이해된다."

조그만 배꼽은 탄생의 흔적이다. 온전히 태어난 시간에 자신에게 새겨진 하늘의 표시다. 콩이고, 콩다운 존재이고, 콩답게 살아가라고 둥글게 열린 것이다. 세상에서 처음 역할을 시작하는 순간의 증명과 같다.


책에 나오는 콩은 정확히 말하면 커피콩이다.

보기만해도 은은한 커피향이 날 것 같은 커피콩의 이름은 모카.

아기들 중에서 머리카락이 나는 시점에 유난히 가운데가 긴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는 귀여운 별명들이 붙는다. 잡초 혹은 파인애플.

모카에게도 머리 위에 팔랑거리는 연두색 콩잎이 붙어있는데 이 콩잎의 의미에 대해 알기 위해 모카는 애를 쓴다.

끊임없이 자아 탐구를 멈추지 않는 모카는 콩잎이 품은 참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하는데 결국 스승인 그로스파파를 만나 이 콩잎이 초월한 최선을 위한 잎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순히 읽어서는 절대 이해 안 될 부분이지만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이 태어난 목적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과정 속에서 동기부여를 얻게 되며 결국은 이에 대한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지난 번 리뷰를 통해 근래 많이 들은 말들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설령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해도 이는 결실을 맺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니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태하지 않았고 매순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이는 버려지는 것이 아닌 결실에 대한 밑거름이자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책 속 모카는 어떤 방향으로든 이동할 수 있도록 매순간 '준비 상태'이다. 마치 바둑판의 한가운데 자리한 배꼽점처럼 말이다.

모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바로 '통찰'인데 이는 마음이 열려야 움직이는 것이기에 멀리 날고 싶다면 그만큼 쉼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심히 걸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행복이 꽃핀다."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아 실현하는 것을 도덕적 이상(理想)으로 보는 관념이 행복주의이다. 이제 천연의 행복주의자가 도는 것도 참 괜찮은 삶이다.


모카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제 역할을 다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삶이 있으니 행복하고 이렇게 행복하니 마음 속 희망감을 스스로 더 북돋는다.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순간순간 복된 하루를 꿈꾸는 모카. 희망의 조각배를 띄워 바람이 부는 대로 행복의 날개를 펼쳐나간다.

모카에게 있어서 조각배 그리고 행복의 날개 일부는 '책'을 의미한다.

책은 모카에게 있어서 지혜로운 구루이며 책으로부터 삶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준다.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모카의 그 모습은 나랑 똑 닮았다.

"인생에서 책은 충분함을 넘어서서 완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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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성공법칙은 이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

_Seth Godin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람이 하는 일은 하나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_Ed Catmull


우리가 인생에서 해야 할 가장 위대한 노력은 중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하루 10분이든, 하루 10시간이든.

_Paulo Coelho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과 향하는 곳을 알면 타인의 중요성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나를 거인으로, 타인을 난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_Alain de Botton


아무도 모르는 걸 나만 아는 것이 독창성이 아니다. 독창성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것을 아는 것이다.

_Marc Andrees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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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감성에 한 번 더 빠지다.


비밀. 정말 그것은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하는 공기놀이와 비슷합니다. 누가 알든 보든 아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죠. 차륵 차륵, 사락사락, 은밀한 소리가 들릴 뿐이에요. 공기는 틀림없이 눈앞에 있고, 얇은 천의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도, 손바닥에 느껴지는 조그만 팥알들의 유쾌한 무게도, 그것을 던지고 받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현실인데.


어릴 때부터 쓰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일보다 잘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일은 하나같이 너무 못하는 탓에, 그런 것에 비해 잘한다고 안이하게 자신감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어 학원이나 서점이나 채소 가게에서 민망하리만큼 뒤처지게 일하는 나날 중에, 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 의심하기 시작했다.


언어만으로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 그런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은 언어로 되어 있으니, 좀 이상한 결심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사람은 거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언어가 아닌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거기에 있는 언어 이외의 것, 그것은 일반론이나 상식, 자신의 의견과 경험, 주위 사람들의 의견이나 경험 같은 것들이죠.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한 요소지만, 소설의 입장에서는 좀 답답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들에 윤색되지 않는 장소에서 소설을 써 보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 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위험해요. 맛있지만(매력), 칼로리가 높은(힘) 과자와 같죠.

그림책은 한 권마다 독립적인 왕국 같은 것이라서, 늘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지 않았다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그 왕국을 몸속에 소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좋은 그림책을 많이 읽으면, 풍성하고 튼튼해지죠. 무서운 일입니다.


지난 번 『도쿄 타워』에 이어 읽게 된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개인적으로) 전작보다 훨씬 좋았다.

나야 모든 면에서 개방적이긴 하지만 『도쿄 타워』는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작가만의 감성에는 흠뻑 젖지 못했었다.

문득 생각난 김에 그녀의 작품을 얼마나 읽었는지 책장에서 찾아보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시작으로 『나의 작은 새』, 『등 뒤의 기억』,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저물 듯 저물지 않는』, 『홀리가든』, 『나비』, 『별사탕 내리는 밤』, 『도쿄 타워』 그리고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까지.

(새삼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보고 놀랐다. 언제 이렇게 읽었던 거지.)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읽고 쓰는 것이 전부였던 에쿠니 가오리이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앞서 말했듯이 읽고 쓰는 것이 전부였던 삶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편지는 물체이다. 종이이며 잉크이며, 풀이며 우표이며, 쓴 사람의 기척이기도 하다. 냄새가 있고 촉감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배달된다는 것. 소인이 찍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전철과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에 실리고, 또 내려지고, 비와 눈에 젖기도 하고.

가령 같은 글귀라도, 기계에 갇힌 언어와 종이 위에다 사람이 쓴 언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기를 발한다.

편지 속에는 저마다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읽고 쓰는 것이 전부인 작가의 삶, 그런 면에서 나 또한 그녀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읽고 쓰는 삶을 멈춘 적이 없었으니깐.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작가 또한 편지 광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편지 쓰는 일이 확 줄어 거진 반성문 쓰는 사람 같은 심정이라 표현했는데 작가가 덧붙여 말했듯이 편지는 추억 그 자체이다.

나 또한 '쓰는' 것을 정말 좋아해 편지도 자주 쓰는 편이다. 길게 혹은 짧게라도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린 편지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매게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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