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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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감성에 한 번 더 빠지다.


비밀. 정말 그것은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하는 공기놀이와 비슷합니다. 누가 알든 보든 아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죠. 차륵 차륵, 사락사락, 은밀한 소리가 들릴 뿐이에요. 공기는 틀림없이 눈앞에 있고, 얇은 천의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도, 손바닥에 느껴지는 조그만 팥알들의 유쾌한 무게도, 그것을 던지고 받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현실인데.


어릴 때부터 쓰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일보다 잘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일은 하나같이 너무 못하는 탓에, 그런 것에 비해 잘한다고 안이하게 자신감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어 학원이나 서점이나 채소 가게에서 민망하리만큼 뒤처지게 일하는 나날 중에, 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어렴풋 의심하기 시작했다.


언어만으로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 그런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은 언어로 되어 있으니, 좀 이상한 결심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사람은 거기에서 자신도 모르게 언어가 아닌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거기에 있는 언어 이외의 것, 그것은 일반론이나 상식, 자신의 의견과 경험, 주위 사람들의 의견이나 경험 같은 것들이죠.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한 요소지만, 소설의 입장에서는 좀 답답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들에 윤색되지 않는 장소에서 소설을 써 보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 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위험해요. 맛있지만(매력), 칼로리가 높은(힘) 과자와 같죠.

그림책은 한 권마다 독립적인 왕국 같은 것이라서, 늘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지 않았다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그 왕국을 몸속에 소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좋은 그림책을 많이 읽으면, 풍성하고 튼튼해지죠. 무서운 일입니다.


지난 번 『도쿄 타워』에 이어 읽게 된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개인적으로) 전작보다 훨씬 좋았다.

나야 모든 면에서 개방적이긴 하지만 『도쿄 타워』는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작가만의 감성에는 흠뻑 젖지 못했었다.

문득 생각난 김에 그녀의 작품을 얼마나 읽었는지 책장에서 찾아보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시작으로 『나의 작은 새』, 『등 뒤의 기억』,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저물 듯 저물지 않는』, 『홀리가든』, 『나비』, 『별사탕 내리는 밤』, 『도쿄 타워』 그리고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까지.

(새삼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보고 놀랐다. 언제 이렇게 읽었던 거지.)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읽고 쓰는 것이 전부였던 에쿠니 가오리이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앞서 말했듯이 읽고 쓰는 것이 전부였던 삶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편지는 물체이다. 종이이며 잉크이며, 풀이며 우표이며, 쓴 사람의 기척이기도 하다. 냄새가 있고 촉감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배달된다는 것. 소인이 찍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전철과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에 실리고, 또 내려지고, 비와 눈에 젖기도 하고.

가령 같은 글귀라도, 기계에 갇힌 언어와 종이 위에다 사람이 쓴 언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기를 발한다.

편지 속에는 저마다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읽고 쓰는 것이 전부인 작가의 삶, 그런 면에서 나 또한 그녀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읽고 쓰는 삶을 멈춘 적이 없었으니깐.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작가 또한 편지 광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편지 쓰는 일이 확 줄어 거진 반성문 쓰는 사람 같은 심정이라 표현했는데 작가가 덧붙여 말했듯이 편지는 추억 그 자체이다.

나 또한 '쓰는' 것을 정말 좋아해 편지도 자주 쓰는 편이다. 길게 혹은 짧게라도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린 편지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매게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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