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교과서 예수 - 사랑, 먼저 행하고 먼저 베풀어라 플라톤아카데미 인생교과서 시리즈 1
차정식.김기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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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교과서_예수 : 사랑, 먼저 행하고 먼저 베풀어라

 

 

 

 

『책에서 마주친 한 줄』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죽는다는 것이고,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을 내다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외치며 질주를 계속한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변 세계와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외로움은 깊어가고, 숨은 가빠지고, 행복은 분주함의 파도에 떠밀려 해안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간다.
예수는 저마다 불행하다는 사람들 앞에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땅 위의 현실에만 붙들리면 자기가 본래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묻지 않게 된다.
그는 불의한 현상 질서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사람들을 북돋우면서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눈을 뜨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 예수의 신학적 이념형을 포괄적으로 대표한다면 그것이 실제로 이 땅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은

'구원'이란 말로 표현된다. 구원이란 말은 복음서에서 동사와 명사 표현을 합해 모두 쉰한 번 등장한다.
특히 동사로 사용될 때는 수동태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구원이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획득하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권능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임을 암시한다.

희랍어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망 속에 '구원'이란 개념과 '치유'라는 개념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표현이 아니다.
요컨대 구원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우리의 온전한 생명 체계가 망가진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회복해 다시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뜻하는

다른 명칭이다. 이는 예수에게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탈출하는 현실적인 삶의 반전과 구원의 의미가 밀접하게 연관됐음을 시사한다.


대중사회 속에서 '복'이나 '축복'이라는 말의 함의는 이중적이다.
순탄한 생의 여정을 보장한다는 의미의 무병장수, 자손의 성공과 출세, 사업의 번창과 풍부한 재물 소우, 번듯한 명예나 권세 획득, 가정의 평안 등의

희원은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바라는 욕망이다.


꼭 세속적인 행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지향점을 어떻게 잡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예수가 본 진정한 복의 기준은 자신의 기원과 본체를 심층적으로 파악하여 동물적인 소유 지향적 삶을 지양하고 '의'와 '자비'와 '평화' 등의

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공변된 선교적 삶을 실천하는 데서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견지한 복의 중추적 요소는 수직적·수평적 관계의 견실한 토대 위에서 소명으로 자각한 삶의 충실성을
발휘하면서 초지일관 용기 내어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가 이해한 기도의 자세와 방식과 내용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열린 소통으로써 근본적인 관계의 충실성을 도모하는

'영혼의 호흡'이었던 것이다.

결국 신적 은총이 특정 대상의 구원으로 실현되는 것은 당사자의 '믿음'이 필히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있어서 삶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 그에게 낯선 타자는 없다. 모두가 한 호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생명이고 사랑이다.

학창 시절에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죄'를 의미하는 두 단어 'crime'과 'sin'을 구별하면서 전자가 실정법에 위반되는 사회적인 범죄 일체를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배웠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점이 유지되는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적인 죄를 일컬을 때 대체로 'sin'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예수가 이해한 '죄'에도 유효할까. 그는 죄를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그것을 용서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죄의 용서에 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②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3-4)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용서는 피해자가 피해자 의식을 버리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하나, 책과 마주하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그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 오로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위해 그곳에서 살았다.

남을 위해 사셨던 예수에게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산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대개 사람들은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바로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같아도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힐 것만 같다.

예수는 산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죽는다는 것이고,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을 내다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있어서 삶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 그에게 낯선 타자는 없다. 모두가 한 호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생명이고 사랑이다.​

예수는 산다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남을 위해 일평생 사셨던 예수는 그렇게 자기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셨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행복을 이루기 위해 살고있다.

행복을 위해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인간 개개인을 너무 피폐하게 만든다.

행복을 위해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이 발전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너무 빨라서 자연스레 우리의 삶 또한 빨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인해 편안함은 극대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개개인에 대해 문제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만남이 줄어드니 개개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매우 커지고, 무엇보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흔히 바라는 축복은 성공, 출세, 권력 획득 등 욕망과 관련되었다.

대부분 물욕과 관련된 이 욕망은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행복과 하나님이 주신 행복이 대립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단,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지향점을 잡는지에 달려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않는 마음으로 앎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는 바를 위해 기도를 한다.

그럼 기도는 정말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진정성있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두손모아 단순히 비는 것 또한 기도일까?

일단, 기도는 내가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필히 수반되어야 한다.

왜냐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지칭할만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의 유일하고 중요한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무엇일까?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 그렇지않다.

예수는 다른 그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용서는 피해자가 피해자 의식을 버리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용서와 화해, 사랑을 먼저 베풀라는 예수의 말은 태초부터 누구나 꼭 배우고 느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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