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무너지기 위해 정리한다




정리를 하면 무언가 단단해질 줄 알았습니다.

불안을 덜고 혼란을 비워 말끔히 정리해내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 아래에서 꺼낸 상자 하나에 순간 하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한순간에 다시 올라왔고 차곡차곡 쌓아둔 감정들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그 순간, 정리가 단지 정돈하는 일이 될 순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정리가 감정을 들춰내고 의도치 않게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다시 마주보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요.


비운다는 건 모든 걸 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끔은 그 비움 속에서 더 깊은 고백이 일어납니다.

나는 아직 이 감정에 머물러 있었구나.

나는 아직 이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구나.

이렇듯 정리는 나를 치유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리를 하면서 나 자신과 마주보는 시간이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너짐도 꼭 필요합니다.

버리려다 다시 꺼낸 사진, 놓으려다 망설인 물건, 잊으려다 되새긴 말들, 이 모든 것들을 간혹 정리하다 멈춰선 날이 있으신가요?

혹시 이것들을 손에 쥐게 된다면 조용히 무너지는 시간을 어느정도 허락해주세요.

깨끗한 공간에선 그 무너짐조차 조용히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리를 통해 삶을 정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삶의 무게를 잠시 제 자리에 두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게 무너져 있던 그 자리에도 하루는 여전히 흐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무너짐을 마주해야 비로소 다시 살아갈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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