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상의 심리학
저자 오성주
북하우스
2025-03-05
인문학 > 교양 심리학
예술 > 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

예술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고, 이것이 예술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며, 예술의 역사는 과학의 역사처럼 논리적인 단계를 거친 진보라기보다는 작가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낸 창발 현상들의 나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예술가가 아닌 감상자들이 예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줄 수 있고,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어진다.
그림 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림 감상은 실세계를 볼 때 쓰는 눈을 빌려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세계에서 보기의 목적은 대체로 눈에 맺힌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올바른 동작을 취하는 데 있다. 가령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고, 모퉁이를 돌다가 만나는 자동차는 재빨리 피한다. 대상이 무엇이고 얼마나 멀리 있는지, 움직이고 있다면 얼마나 빠른지를 탐지하고, 그 대상이 혹시 위험한 것은 아닌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등 기억을 되살려 예측해야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에는 형태, 색 크기, 깊이, 움직임 등 다양한 정보들이 동원되지만, 형태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다른 정보들을 부차적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눈으로 많은 학습을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상까지의 거리에 따라 눈에 상이 얼마나 크게 맺히는지에 대해서, 어떤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조명에 따라 대상의 표면 밝기와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 물체의 물리적 성질에 대해서, 어떤 얼굴이 기분 좋은 상태인지에 대해서 배운다. 그뿐만 아니라 주의를 활용하는 방식을 배운다.
미술의 역사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 벽화를 근거로 적어도 기원전 3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미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미술의 발전은 연필, 붓, 물감, 종이, 캔버스와 같은 재료의 발전, 원근법과 명암법 같은 그림 기법의 발전, 예술가들의 혁신적 사고,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가, 예술과 종교·정치·사상 등의 상호 작용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다.
실세계는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땅에 붙어 있다. 또한 실세계는 시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관찰자로부터 물체가 멀어질수록 눈에는 작게 맺히고, 앞에 있는 물체는 뒤에 있는 물체를 가린다. 그런데 그림 세계는 이런 물리 법칙과 시각 법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공간이다. 20세기 들어 화가들은 시각적 속성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물체들의 거리, 크기, 색, 형태, 방향, 위치 등을 자유롭게 해체했다. 이에 따라 그림들은 점점 알아보기 어렵게 변했다.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첫인상은 어떤 내용일까? 심리학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 참여자들에게 그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고 소감을 물었다. 그림을 보여준 시간은 0.1초부터 수초까지 다양했다. 흥미롭게도 0.1초만 그림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특징을 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의 옛 그림에서도 점묘법을 찾아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을 그리면서 점을 찍어 숲의 농도를 달리했다. 그림에서 산 능선은 진한 점을 찍고 그 사이에서는 점진적으로 점을 줄여나갔다. 또한 왼쪽 작은 산은 훨씬 밝은 점들로 숲의 무성함을 표현하여 원근감을 높이고 있다. 점으로 숲의 농도와 깊이를 표현한 기법은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의 실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