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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의 세계 - 인체의 지식을 향한 위대한 5000년 여정
콜린 솔터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4년 9월
평점 :
해부학자의 세계
저자 콜린 살터
해나무
2024-09-30
과학 > 기초과학 / 교양과학
과학 > 의학
CSI 시리즈 마니아였던 제가 근래 재미있게 읽은 과학책이 있습니다.
바로 해부학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해부학자의 세계』입니다.
예술과 해부학은 밀접한 관계입니다.
과거부터 전해 내려온 텍스트 이상의 남겨진 삽화들만 봐도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지죠.
초기 이슬람 문헌 때 인체 구조를 모호하게 그려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최신 시각 기술을 이용해 인체 안팎을 보여주니 해부학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줬습니다.
해부학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체를 그리고 쓰고 보고 읽는 것을 통해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며 때로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죠.
즉, 해부학을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이쯤되면 책에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시겠죠?
해부학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눠 주요 특징들로만 짤막하게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세계의 해부학
14세기 초까지 1300년 동안 의료 종사자는 동일한 교과서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해부학은 동물들을 해부한 것뿐인데다 종교와 철학까지 더해져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없었죠.
그렇다면 당시 사용했던 동일한 교과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의학자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의 방대한 저술이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많은 해부학자들이 있었겠지만 자신의 업적과 함께 고대 선임자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한 기록때문에 그 가치를 더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해부학 기록은 무엇일까요?
바로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입니다.
36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파피루스지만 그 안에 5000년 전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의 해부학을 살펴보면서 안타까운 인물을 한 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의학사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아부바르크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라지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추종자였습니다.
알라지는 굉장히 박식해 문법부터 천문학까지 다양한 주제로 200여 권의 책을 썼다고 알려졌는데 특히 의학과 해부학을 소재로 한 책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양 사상에 꽤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바그다드 최고의 의사이기도 한 그는 어려운 빈곤층을 위해 세계 최초의 가정의학 안내서인 『의료 낙후 지역 주민을 위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소아 질병을 치료하는 최초의 논문을 써 소아과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했지요.
"그의 지위는 경외스럽고 그의 계급은 위풍당당하며 그의 유산은 보편적이고 그의 기억을 영원히 존경받는다."
"의학과 철학은 저명한 지도자라고 해서 그의 견해에 무조건 굴복·순응하거나 [그들의 관점을] 엄격한 조사에서 제외하면 안 된다. 어떤 철학자도 자신의 독자나 학생이 그러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갈레노스 자신도 『신체 부위의 유용성에 관하여』에서 그렇게 말했다."
『갈레노스에 관한 의구심』의 서문에서 알라지는 갈레노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비판 또한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렇다보니 당시 사람들은 알라지를 갈레노스에 도전하려는 오만한 바보로 여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중세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이라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중세의 해부학
1316년에 쓰고 1478년에 출간된 『인체의 해부』는 몬디노 데 루치의 책입니다.
초기 판본에는 글만 들어갔지만 이후 15년에 걸쳐 삽화가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인쇄술의 출현으로 인해 삽화를 판화로 넣고 복제 또한 가능하게 된 것이죠.
몬디노는 인체를 하찮은 것에서 고귀한 것까지 세 구역으로 나눠 자신의 해부 과정은 물론 해부 구조를 상세히 기술하였습니다.
배는 위나 간 같은 미천한 자연 요소를 품고 있고 가슴은 심장과 폐를 포함한 영적 요소를 품고 있고 머리는 눈, 귀 그리고 뇌와 같은 우월하 동물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죠.
책에 그려진 그의 해부과정을 살펴보면 몸의 아랫부분에서 위를 수직으로 자르는 수직절개와 배꼽의 바로 위에서 가르는 수평 절개로 시작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자궁에 대한 생각입니다.
중세 초기에는 자궁에는 7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 태아가 발달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오른쪽 3개는 남자아기, 왼쪽 3개는 여자아기용이며 가운데 있는 방은 자웅동체가 잉태될 경우를 대비해 남겨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오류를 끌고왔던 몬디노는 여성 2명을 해부한 적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데 당연히 그 주장은 신빙성을 잃게 됩니다.
간혹 일부 역사에서는 해부학자가 직접 해부를 실행하는, 공개적인 시범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단상에 올라가 해부 과정을 말로 설명하는, 마치 내레이터와도 같았다고 하죠.
1493년 판본에 실린 공개 해부 장면을 살펴보면 실제 사람들이 시신을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런 저런 부정확성이 있다해도 『인체의 해부』가 기념비적인 출판물이란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를 답습했다 하더라도 일부 오류를 교정한 최초의 근대 해부학 서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앞서 『인체의 해부』가 나중에 출간된 판본에 삽화가 추가되었다고 하였지요?
사실 해부학에 삽화를 활용한 선구자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몬디노의 학생이었던 귀도 다 비제바노입니다.
귀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박식한 재주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사이자 발명가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는 전쟁 무기와 해부학에 관한 책을 써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볼로냐에서 공부를 마친 귀도는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7세의 황실 주치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군사적 분쟁으로 인해 하인리히 7세의 궁정 소속이라는 이유로 교황파의 표적이 되어 프랑스로 도주하게 됩니다.
도주한 프랑스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군주 필리프 6세의 주치의가 되죠.
그는 『프랑스 국왕을 위한 보고』 외에 『건강 편람』, 『필리프 7세를 위한 해부학』을 쓰게 됩니다.
볼로냐에서 몬디노와 함께 시신을 해부했던 그는 1345년에 책을 쓰게 되는데 1475년에 초판이 출간된 몬디노보다 더 널리 읽혔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필리프 7세를 위한 해부학』에서 그는 해부 경험이 많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실제로 귀도는 몬디노의 방법을 그대로 따랐고 신체 부위에 똑같이 서열을 적용했으며 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나 비장의 형태 등은 교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빈치처럼 박식한 재주꾼이었다 해도 정교하지 못했던 솜씨를 가졌던 그는 다빈치의 수준과 맞먹기엔 부족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
이 시기를 절대 빼먹을 순 없죠.
인체에 대한 이해가 어지럽게 펼쳐진 시대였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창의력과 지성의 정점에 올랐었던 시기입니다.
특히 해부학의 예술적·의학적 걸작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는 단연,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그는 1489년에 두개골을 처음 구입하였고 1507년에 인간의 몸을 처음 해부하게 됩니다.
그가 해부했던 대상은 그가 임종을 지켜보았던 100세 노인이었습니다.
다빈치는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토레의 도움으로 해부를 시도하게 되었는데 기존 해부 지식과의 차이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참고로 역사학자들은 델라토레와 다빈치가 함께 책을 쓰기로 하면서 5년 동안 이전에 본 적 없던 종류의 해부도 750여 점을 그렸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모나리자」는 물론 헬리콥터의 설계자인 다빈치의 스케치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고 알려집니다.
특히 시체가 부패하기도 전에 관찰한 기록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재빠르게 스케치했는지 짐작할 수 있죠.
1511년 델라토레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협엽이 무산되면서 다빈치는 거주지를 옮기게 됩니다.
시신을 구해다 주는 이가 사라졌지만 해부학에 대한 흥미는 놓을 수 없어 동물을 해부했다고 하죠.
그러다 혈관계의 중심은 간이 아닌 심장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혈류를 알아보고자 유리로 대동맥 모형을 만들어 물에 곡식의 낟알을 넣어 흐름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빈치는 뇌에서도 큰 발견을 하게 됩니다.
왁스로 뇌실의 주형을 만들어 그 안에 체액이 없음을 증명하게 되죠. 또한 죽상동맥경화증을 처음으로 기술하게 됩니다.
1513년 로마에서 살게 된 다빈치는 한 병원의 지원을 받아 다시 사람의 시신을 해부하게 됩니다.
그러다 그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 사람이 바티칸에 고발해 교황이 해부 중지를 명령하게 되죠.
1515년 그에게 또다른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이 그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줍니다.
이후 여러 번의 뇌졸중이 온 다빈치는 오른팔이 마비되어 해부학적 탐구에 마침표를 찍었고 1519년 또다시 뇌졸증이 와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남긴 해부 소묘들은 여기저기 옮겨가다 일부는 현재 영국 왕실 예술 소장품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의 소묘가 1900년이 되어서야 인쇄되었다고 하니, 다빈치가 자신의 연구와 관찰에 대한 결과를 책으로 썼다면 해부학이 더 빠르게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현미경의 시대
16세기를 해부학이 근대 과학으로 거듭난 순간으로 본다면 17세기는 해부학적 우주가 빠르게 팽창하는 시기였습니다.
과거 한계를 만들어냈던 신념이 르네상스에 휩쓸려가고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해부학자들은 전문 분야에 탐닉하게 되면서 17세기에는 개별 기관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이 출간하게 됩니다.
다만, 화가와 외과의 모두를 위한 해부학 책의 수요는 채워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세 해부 이미지를 최초로 실은 사람은 해부학자가 아닌 천문학자입니다.
1644년, 조반니 바티스타 오디에르나가 출간한 『파리의 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가할 때면 밤하늘을 연구한 사제였던 오디에르나는 팔마의 공작 줄리오 토마시에게 발탁되어 천문학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출간했던 책을 본 대중은 그저 참신하게만 여겨졌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해부학자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됩니다.
계몽의 시대
18세기, 영국에서는 외과의사가 지위가 높아지고 해부학과가 만연해지면서 해부학은 흔해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공개 해부로 인해 일반인의 관심도 커져 해부용 시신이 부족해지게 되었는데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시신을 구하는 사람들이 생기다 보니 큰 사회 문제로도 이어졌습니다.
18세기 초, 영국에서는 상인 길드인 이발사-외과의 조합이 해부학계를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이발사는 날카로운 면도날로 부상병의 팔다리를 자르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그래서 외과의는 메스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해부학을 배우기 전에 이발하고 면도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후 총과 포탄의 등장으로 인해 단순한 무기에 상처를 입는 일이 없다보니 당시 전쟁에서 외과의는 엄청난 경험을 쌓게 됩니다.
발명의 시대
유럽의 해부학을 뒤늦게 접한 일본은 이를 따라잡고자 질주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체 해부학과 관련된 지식이 18세기를 거치며 발전하였고 19세기에는 이를 성문화하고 보호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됩니다.
19세기 초, 해부학이 외과 수련의 필수 과목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외과 수련생의 수요를 감당하고자 해부학 학교를 늘리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합법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신의 수가 부족해졌는데 1752년 살인법으로 해부할 수 있는 사형수의 시신도 줄어들게 되자 시신 도굴꾼들이 활개치게 됩니다.
영국 주요 도시의 구역마다 시신 도굴단이 형성될 정도였죠.
일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에든버러에서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가 해부학 선생에게 시체를 공급하고자 최소 16명의 남녀를 살해한 것이었죠.
피해자가 만취할 때까지 술은 권해 질식시켰다고 밝혀졌는데,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죠.
해부학이 존재했기에 의학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히 병을 알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해부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해부학 분야에서 최장기 베스트셀러 저자는 누구일까요?
최초의 근대 수의학 책은 무엇일까요?
책에서 나오는 해부학 책만 150여 권이며 희귀 도판만 240여 컷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부학 기록물들이 총정리되어 있죠.
의학, 해부학,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쯤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입니다.
주절주절이긴 하지만, 제가 몇 주 간 폐렴에 걸려 치료중인데 응급실에 들어가는 구급차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모든 의도적인 잘못과 해악을 삼갈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누구나 다 들어봤을 겁니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 의학도들은 그의 이름을 걸고 환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되죠.
지금은 현대적인 윤리 강령을 채택해 실천 강령을 정의했다고 합니다.
"결석 환자가 오더라도 칼을 직접 들지 않고 이 일의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다."
당시 히포크라테스는 내과의와 외과의를 구분해 서로의 관계를 존중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그는 촉진, 시진, 청진 시스템을 개발해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그는 종교로부터 건강을 분리하려고 했습니다.
근래 의학계는 매우 떠들썩합니다.
정부와의 의견 충돌로 대형병원 노조들은 장기 파업에 이르렀는데 현재로선 무기한 파업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정부와 의료계 간의 대립에서 결국 피해보는 것은 환자일 수밖에 없죠.
아파도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을 테니깐요.
제가 벌써 2주 넘게 폐렴으로 고생중인데 더 심해지면 입원도 불가피하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저는 내과 관련 치료라 괜찮지만 외과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말그대로 피 말리는 심정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수술이 가능해도 마취과 선생님이 없으면 수술이 불가할 테니깐요.
지금 현 시점에서는 그저 안 아프고 안 다치도록 조심하고 조심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조속히 두 집단이 열린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의견을 수렴해 서로간의 타협점을 찾아 애꿎은 환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참 전에 써놓은 리뷰인데, 빠르게 업로드하고 이제 저는 병원 진료 받으러 갑니다.
다들 아프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