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늙은 어부와 아내는 가욋돈을 얻을 요량으로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영도라는 어촌에서 나고 자랐다. 항구도시 부산 끄트머리에 있는 폭 8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혼인하여 사는 세월 동안 어부의 아내는 아들 셋을 낳았지만 몸이 가장 약한 큰아들 훈이만 살아남았다.
세상에서 훈이만큼 딸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도 드물었다. 훈이는 자식을 웃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 같았다.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해 겨울에 훈이가 결핵으로 조용히 죽었다. 양진과 선자는 장례를 치르면서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젊은 과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자신은 숲속 흙바닥에서 남자가 제 몸을 갖게 내버려둔 무지렁이 시골 처녀였다. 한수가 탁 트인 바닷가에서 자신을 원했을 때도 제 몸을 마음대로 탐하게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한수를 사랑하듯이 한수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한수가 저와 혼인하지 않으면 자신은 평생 손가락질을 당할 난잡한 계집이었다. 아이는 성도 없는 사생아가 될 터였다. 자신의 창피한 짓 때문에 어머니의 하숙집도 크게 평판이 떨어질 것이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 같은 진짜 아버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백이삭의 계획을 말하자 선자는 그 사람의 아내가 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백이삭이 자신과 혼인하면 어머니와 하숙집, 자신과 아이가 고통스러운 낙인을 피하게 될 터였다. 좋은 집안의 훌륭한 사람의 성을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터였다. 선자는 백이삭이 그렇게 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