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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 - 권력자와 지식인의 관계 ㅣ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 책과 마주하다』
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중국에는 한(漢)이 있다!
로마제국과 함께 읽어보기 위해 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서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도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100페이지 톡톡 인문학】 시리즈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닌 역사에 등장했던 순간 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 최봉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김영사 편집장, 중앙M&B 전략기획실장, 랜덤하우스중앙 COO를 거쳐 웅진씽크빅,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리뷰 아시아 총괄대표를 지낸 후 현재는 기업, 단체의 자문과 집필을 하고 있다.
망탁조의, 왕망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문명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꽃을 피운 역사의 뿌리가 바로 한나라이다.
전한, 후한 합쳐 500년 동안 이어지는 한은 초한지로 건국하여 삼국지에서 망한다.
망탁조의,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녹을 먹다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했던 역적들을 묶어 일컫는 말이다.
왕망은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다.
동탁은 후한 소제를 시해하고 폐위시켰지만 황제자리에 오르진 못하고 살해당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직접 황제를 폐위하지도, 스스로 황제 자리에도 오르진 않았으나 아들 조비와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었다.
그러나 왕망이 전한 평제를 독살하고 유영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다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새 왕조까지 열게 된다.
그래서 망탁조의의 첫 인물이라 했던 것이다.
왕망의 역사적 평가는 두 시기에 집중된다.
첫번째 시기는 마흔다섯 살에 두번쨔로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사마에 올라 실권을 장악한 후 전한의 막을 내릴 때까지이다.
평제가 아홉 살에 즉위하자 태황태후 추천으로 왕망이 두번째로 대사마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태황태후는 평제의 할머니이자 왕망의 고모였다.
두번째 시기는 새 왕조를 세우고 황제에 오른 시기이다.
왕망은 국상에 오르자마자 태후의 정사 개입을 차단하고 평제의 외가를 멸족시켜 버린 뒤 장녀를 효평황후에 올려 황실을 정리한다.
그렇게 그는 대사마 국상이자 황제의 장인인 국구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허나 그는 자리에 만족하지도 못했고 자신이 한 일들 때문에 매번 전전긍긍하였다.
결국 그는 사위인 평제마저 독살시킨 뒤 외손자 유영을 황제에 올려 섭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이것 또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찬탈하고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황제를 독살하고,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망탁조의의 끝판왕이 된 것이다.
그의 개혁 슬로건은 탁고개제였다.
(탁고개제란 옛것을 본받아 당대 제도를 개혁한다는 의미이다.)
주나라의 정전법을 모방해 전국 토지를 왕전으로 바꾸고 개인 토지 매매를 금하여 영농의 빈민화를 막고자 하였고 빈농들에게도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고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지만 지배계급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개혁 자체가 너무 이상적이고 전한 말의 사회모순이 누적되어 개혁은 실패를 맞고 만다.
조조와 사마의는 창업 군주라도 재평가되었지만, 왕망은 실패한 개혁가이자 건너뛰어도 무방한 폭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는 의도가 정당하다고 과정과 결과를 가벼이 볼 순 없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동기와 시도까지 묶어 매도하면 안 된다고 의견을 내비친다.
왕망은 젊은 시절부터 개혁에 대한 욕구가 지대했다고 한다.
지배계급의 이중성에 대해 깨닫고나니 지금의 체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유교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단순히 학문으로서가 아닌 사회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대사마에 오르자 개혁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조정의 극심한 반대와 사회의 모순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기득권 세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과 함께 자신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스스로 확신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대사마에 올라서도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했으나 나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만도 하지만 개혁을 위해 패륜을 저질렀던 왕망이었기에, 역사는 그의 패륜만을 기록하게 된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근본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기에 이르른다.
그 강요가 공격성을 띠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덕성은 결국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목표가 추구하는 가치와 수단에서의 도덕을 분리하여 가치에 우선을 둔다.
사실 왕망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몇몇 인물들이 이러한 절차를 밟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왕망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지고 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멸망의 길
한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후한은 장각의 황건적 난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는데 언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통일왕조 없이 400년 동안 혼돈의 시기가 이어지는 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후한 멸망 과정의 중요 사건들은 아래와 같다.
1.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무력한 조정을 대신하여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지방 군벌이 세력화되고, 중앙 조정은 십상시의 수중에 떨어진다.
2.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러 낙양으로 밀고 들어온 군벌 중동탁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는 소제를 시해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왕망에 이어 망탁조의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후한은 이때부터 명목상의 수명만 이어간다.
3. 조조가 동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후 헌제를 내세워 지방 군벌을 토벌하는데, 이에 대항하여 촉의 유비, 오의손권이 나서며 삼국시대가 열린다.
4. 조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조비는 명목상 연명하던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을 빌려 제위를 뺏는다. 이로써 후한이 멸망하고, 그 뒤를 위가 잇는다. 220년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세워져 서기 220년에 멸망하여, 426년 동안 존속한 중국 역사상 최장수 국가로 평가된다.
5. 유비가 세운 촉을 촉한으로, 한나라의 정통 계보로 인정하여 전한, 후한에 이어 촉한까지를 하나의 왕조로 본다면 수명은 좀 더 연장된다. 유비는 후한이 망한 다음 해에 한 황실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세우나,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이르러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263년에 멸망한다. 이를 포함한다면 한의 수명은 470년으로 늘어난다.
후한이 멸망한 후 수가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의 기간을 약 40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를 위진 남북조시대라고도 부르며 크게 삼국시대, 서진시대,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로 나눈다.
중국에서 위진 남북조시대는 흑역사나 다름없어 최근까지도 역사 시간에서 건너뛰었을 정도라고 하는데 서양사에서도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분열의 시기를 맞았을 때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나라와 관련된 책리뷰에 이어 서로마 제국에 대한 책리뷰를 곧장 올릴 예정인데, 두 나라가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 비교한 내용은 다음 서로마 제국 때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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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과목을 질문받으면 단연 국어와 영어가 으뜸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재미를 흠뻑 느끼게 된 과목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사였다.
수업해주시는 선생님이 마치 책을 읽어주시는 것만 같아 수업시간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내신때문에 점수 따기 목적이 크다보니 흥미를 두었던 일부 유럽사만 지금까지 기억할 뿐 그 외에 역사적 사건들은 기억 속에 묻힌 지 오래이다.
스무살이 되고서도 대한민국과 유럽사만 흥미를 느껴 관련 역사책은 간간히 챙겨보긴 했으나 중국 역사는 관심이 없어 한시와 동양고전에 나온 배경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작년 책결산을 하면서 언급했었지만 삼국지를 아직 읽지 못해 숙제처럼 쥐고 있는데 『한(漢)의 몰락, 그 이후 숨기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을 읽고나니 삼국지를 펼쳐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림칠현이란 말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죽림칠현이란 위/진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 권력에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세월을 보낸 산도, 완적, 유영, 혜강, 향수, 완함, 양융, 즉, 일곱 명의 선비를 일컫는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던 산도는 어렵게 살았지만 노장사상을 좋아해 완전, 혜강과 교유했다고 알려졌다.
마흔이 되었을 때 관직에 나갔으나 조상이 권력을 잡자 낙향했었다.
이후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조정으로 나갔고 고위관직을 두루 거치다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과연 죽림칠현과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역시나 산도보다 열여덟 살 아래였던 혜강이 죽림칠현의 실질적 영수였다고 한다.
수려한 용모와 총명함을 지녔던 혜강은 일찍이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조조의 외손녀와 결혼하여 중산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지나 뜻이 없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동무 향수와 함께 술과 시, 거문고를 즐겼다고 하니 죽림칠현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이후 종회의 모략으로 죽음에 몰리게 되는데 태학당 3천 여명의 학생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함께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했단다.
처형이 집행되기 전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문고를 뜯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정말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혜강의 죽음 이후 사실상 죽림칠현은 해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뒤를 이은 자도 없었으니.
죽림칠현은 스스로 속딤을 멸시하고 속됨을 깨뜨리고 속됨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속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다시 속됨과 어울리는 현실을 맞게 된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지 않는가.
저자는 이런 말을 남긴다.
고고한 자들은 높은 봉과 같아 홀로 떨어져 있어도 우뚝 솟아 있는데 그런 무리들은 개천의 자갈 같아 무리 지어 흘러가는 물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목소리 높이며 얼굴마당에 출몰하지만 다 애기 주먹보다 잘고 꼬락서니도 닳고 닳아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안 된다고.
역사적인 흐름이 아닌 인물을 중점적으로 두며 내용이 전개되다 보니 읽는 재미도 흥미로울 뿐더러 앞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매우 컸다.
죽림칠현을 잠깐 언급한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다보니 삼국지도 올해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