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 책과 마주하다』


"많은 사람이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을 택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는 상태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 그날, 나는 살아 있고 싶다."


생명이 끝나기 직전의 사람들은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데, 그 증상은 고통 그 자체이다.

그런 이들에게 삶의 끝자락에 나타나는 통증을 완화시켜 존엄성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완화의료라고 한다.

안락사를 시키는 의사와는 엄연히 다르며, 오히려 안락사를 막아준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물었다』는 브라질의 한 의사가 쓴 완화의료 이야기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며 느끼고 성찰한 내용들을 담았다.

어떤 환자들을 만났고, 그 환자들에게 치료했던 완화치료는 무엇이며, 무엇보다 죽음이 물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자, 아나 아란치스는 브라질 완화의료 최고 권위자로 상파울루주립대학병원에서 노인의학으로 레지던트 과정을 수련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완화의료를 전공했다.

20여 년째 저작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완화의료가 올바르게 인식되도록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3년에 오래도록 금기시돼왔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TEDx 강연이 큰 호응을 얻으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출간된 《죽음이 물었다》가 브라질에서만 50만 부 이상 판매되고 미국, 스페인, 중국 등 전 세계 10개국에서 출간되며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Ⅰ 나는 누구인가


내가 처음부터 꼭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인생의 일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며, 단지 육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행위로도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 존재 안에서만 죽음은 끝이 아닐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죽음은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이다.

우리는 다수가 믿고 있는 '정상적인 것'을 뒤집어야만 한다.


저자가 의사로 일한 지 무려 20년이나 지났다.

대부분 의사의 길로 들어선 이들은 가족 중에 혹은 존경하는 사람들에 의사가 있거나 꿈 혹은 명예를 위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병과 고통이 끊이질 않았는데, 특히 그녀의 할머니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말초동맥 질환으로 인해 절단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그녀의 할머니는 긴 시간 비명과 눈물로 고통을 감내했다고 한다.

하느님께 제발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녀를 교육시키고 돌봐주셨던 할머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고통이 극에 달하는 날이 있었는데 혈관외과 의사 아라냐 선생님이 왕진을 오게 된다.

흰 셔츠, 반짝거리는 버클을 뽐내는 가죽 허리띠, 작은 검정색 가방 그리고 단정하고 좋은 냄새를 풍기는 선생님이었다.

다섯 살밖에 안 되었기에 매번 밖으로 쫓겨났던 그녀는 간간히 열린 문 틈으로 아라냐 선생님이 할머니께 진료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할머니가 울부짖자 선생님은 할머니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아라냐 선생님이 저자의 어머니에게 새로운 치료법에 대해 알려주며 옆에 있는 저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요."

그녀에게, 아라냐 선생님은 세상에서 제일 힘세고 신비한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는 결국 두 다리는 절단하게 되었는데, 이후 환상통을 겪어 통증은 계속되었다.

어린 저자에게는 환상통 자체가 무서웠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니깐.

그러다 인형들의 다리를 모조리 절단하게 되었는데, 인형 로시타가 앉은뱅이로 살고자 해도 삶이 흔적을 남길 것임을 상기하기 위해 볼펜으로 수술 자국을 그려 넣는다.

일곱 살에 병원을 운영하게 된 저자, 그녀의 병원에서는 아무도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 또한 그녀의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고 말하며 웃음지었다.

"마음이 바뀐 거니? 선생님이 될 거야?"

"둘 다 될 거예요, 할머니! 누구나 아픈 게 나으면 뭔가를 배우고 싶거든요!"

그렇게 그녀는 상파울루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배우게 된다.


"너 괴상하다."

해부학 수업, 저자가 실습용 표본들의 얼굴들을 살펴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자 동기는 이티 보듯 그녀를 쳐다봤다.

3학년 말에는 병력 청취를 배우게 되는데, 그 때 저자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환자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의 상세한 지침이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지 깨우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내과 병동에서 안토니우라는 환자를 배정받게 된다.

【남성, 기혼, 알코올중독, 흡연, 자녀 두 명, 간경화, 간암, B형간염 말기】

복잡한 병력을 보고선 마음 속에선 두려움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료실에 들어가 그를 마주하니 수척한 몸에 배가 부풀어 올라 마치 거대한 거미를 연상케했다.

시커멓고 누렇게 뜬 피부,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는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저자 또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저자는 그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물으며 면담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토니우의 고통 앞에서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간호사실에 가 담당 간호사에게 통증약을 더 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방금 해열진통제를 줬다며 기다리라는 답변 뿐이었다.

간호사와 이야기가 통하질 않자 휴게실에 계신 교수님에게 토로했고 교수님은 저자를 크게 질책하였다.

그 순간 저자는 느꼈다.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죽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예상했던 죽음과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버틸 수 없었고 결국 저자는 의대 4학년 중간쯤에 대학을 떠나게 된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봤자 시간은 흐르고, 가슴 속 소명 의식은 계속 메아리쳤다.

재능이 부족해도 어떠하리. 다른 사람들처럼 모든 것에 적응하게 될지.

저자는 대학으로 돌아간 뒤 동네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1년 후 4학년 과정을 마치게 된다.


이후 그녀는 학부 선택에 큰 고민을 했지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을 읽고서야 답을 얻게 된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배우겠어.'




Ⅱ 완화의료와 안온한 엔딩


스스로 돌보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진리를 발견한 저자는 그 때부터 삶이 충만해졌다고 말한다.


23세 환자 마르셀루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진행도 빨랐고 종양학적 치료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금요일 저녁.

폭우가 쏟아지던 날, 그녀는 첫 방문을 하게 된다.

종양 덩어리로 인해 복부는 일그러져 있었고 방 안에는 피와 대변이 뒤섞여 마치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환자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있고 끊임없이 고통만 내지를 뿐이었다.

비상용 가방에는 소생제가 담긴 약병뿐인지라 모르핀이 필요했지만 마르셀루의 어머니는 끝까지 집에서 돌보겠다는 약속때문에 아들을 병원에 옮기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그렇게 네 시간 가까이 기달리니 모르핀이 도착하였고 심하게 떠는 간호조무사를 대신하여 저자가 모르핀을 투여했다.

차에 탄 그녀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고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간호조무사는 그녀에게 마르셀루가 사망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날 밤, 악몽에서 깨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거울 속에 마르셀루가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환각 증세를 보인 저자는 심리치료사에게 울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후 40여 일 이상을 쉬게 된다.

저자의 가장 훌륭한 재능이자 장점인 공감력으로 인해 직업적으로 가장 큰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었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질문들에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상태였고, 그중 가장 고통스런 질문은 '환자들의 고통을 오롯이 느끼지 않으면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였다.


완화의료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한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으로, 조기 진단과 정확한 평가, 그리고 통증과 기타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문제의 치료를 통해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경감시킨다. _세계보건기구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는 고통은 죽음이 진행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통은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완전히 개인적인지라 통증의 정도는 개인마다 다른 표현과 지각과 행위의 메커니즘에 달려 있다.

임박한 죽음이 곧 삶의 의미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도 하지만 그 만남 자체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완화치료는 헛된 치료의 중단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환자가 겪는 신체적인 고통, 증상을 통제하기 위해, 공격적 치료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진이 제공하는 확대된 돌봄이라는 실체적 현실도 포함한다.

환자 뿐만이 아니다. 환자가 중병에 걸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면 가족 또한 병이 든다.

오죽하면 암에 걸리면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완화치료는 병이 진행되어 신체적 고통이 극심해지고 의학적으로 손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장 큰 가치와 필요를 지닌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딸이 저자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었다고 한다.

완화의료는 환자와 보호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돌봄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능한 한 가장 숭고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그래요, 언제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의학의 진보입니다.




완화치료는 안락사와는 전혀 다르다.

완화치료가 통증을 없애주다 보니 증상이 좋아지면 환자가 죽음을 찾아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딱 한 장면밖에 없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철퍼덕 세배를 한 후, 외할아버지 무릎에 털썩 앉아 옹알옹알거렸던 기억.

무려 세 살 때의 일이라니, 이 기억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첫 손녀였기에 마냥 예뻐해주셨다고 하는데,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도 매우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처음엔 병세에 대해 정확히 알리지 않고 외할머니께서 지극정성으로 돌봐드렸다고 한다.

병세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본인의 병을 정확히 알고나서부턴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엄청 슬펐겠다."

"슬펐지. 많이 슬펐지만, 그래도 돌아가신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그런지 슬픔을 털어내는 데 수월했었어."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인간의 생명은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죽는다.

다만, 그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죽는 날을 받게 된다면 크나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외할아버지께서 정확한 병세를 끝까지 모르셨더라면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을까?

이미 처음부터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기에 그렇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외할머니께서 그런 말을 해주신 적도 있었다.

가는 사람은 말이 없다고. 다만 남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살아야 하기에 간 사람 명복 잘 빌어주며 더더욱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네!"라고 확신있게 대답하고 싶지만 "아니오"가 먼저 떠올랐다면, 돈과 명예 등 물질적인 면이 먼저 떠올랐기에 "아니오"가 먼저 떠오른 것이다.

결국은 살아온 대로 죽는 것이기에,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고 내게 있어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봐야 한다.


지금의 나에게 무엇보다 꼭 필요한 책이었던 것 같다.

오늘 열심히 살아내어 내일을 활기차게 맞이하고, 내일이 오늘이 되면 또 열심히 살아내어 다음 날인 내일을 또 활기차게 맞이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