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이어령 유고집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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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거죠. 이 생물학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긴 말과 글 속에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침 저녁으로 쓰고 있는 말과 글 속에도 똑같이 문화 유전자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우리가 남긴 말,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말들은 마치 AGCT처럼 서로 얽히고 결합되면서 내가 없는 세상, 우리가 없는 그 세상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해간다는 것이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이야기를 펼쳐볼까 한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Ⅰ 원숭이


제주도 근방에 야생종 원숭이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물원갔던 게 20살? 21살? 20대 초반이었으니 원숭이 안 본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이렇듯 한국에는 없는 그리고 중국하고의, 일본하고의 차이를 나타낼 때 볼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나를 타자와, 남과 구별하는 나의 의식이자 나의 아이덴티티라고 선생은 말한다.

인간과 비슷하기에 남을 놀릴 때 원숭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즉, 원숭이와 어떻게 다르냐로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 있어서는 외국이었던 겁니다. 원숭이가 없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면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객관화하고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중국 사람, 일본 사람만 겨우 알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해왔는데,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은둔의 시간 속에서 개화를 맞이한 우리의 외국관이 바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는 원숭이 엉덩이가 아닌 원숭이 항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엉덩이 빨간 짐승같은 사람들이 사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우리보다 월등한 문명인이라는 것을 느껴 한쪽으로는 무시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것을 의미한다.

과거 개화기때의 외국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 것이다.

사극 혹은 시대극에서 왜놈, 양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4000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억압과 압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민족이기에 가지고 있는 이런 오기가 한국 사람들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인 것이다.



Ⅱ 사과


사과는 1901년 윤병수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묘목을 들여오면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추운 지방에서만 나왔었기에 북한 원산 부근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1901년이다.

한쪽에서 선교사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키워봤지만 기후로 인해 다 죽어버렸는데 유일하게 사과 하나가 살아남았었다.

그것이 바로 대구 사과이다.

사과가 자랄 수 없는 고장임에도 품종 개량을 통해 대구가 사과의 명산지가 된 것이다.


사과는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20세기 초 개화가 시작되던 때에 유입되었기에 서양 문명이 압축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의 사과, 트로이 전쟁에 나온 파리스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윌리엄 텔의 사과로 서양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에서 사과 체험은 즉, 서양 체험인 것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사과는 지금도 이어진다. 바로 애플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이자 글로벌한 사과가 된 사과!

앞으로도 '사과'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Ⅲ 바나나


바나나는 과일의 단순한 개념과는 무언가가 다르다.

과거 수박, 참외와 같이 둥글둥글한 과일만 보다 기다란 바나나를 처음 접했을 때, 꽤나 놀랐다고 한다.

단순히 길기만 한 게 아니라 끝이 꼬부라져서 올라간 바나나는 우리 상식을 완전히 뒤바꾼 과일이었다.

대부분 바나나 나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파초과이다. 풀이 돌돌돌 말려 올라가서 딱딱해지는 것이다.

또한, 씨가 없다. 씨도 나중에 나오지만 줄기세포처럼 발아되니 그 싹을 잘라서 심는 것이 바나나이다.

인간의 역사, 서양의 역사, 정치, 경제-이 모든 것이 바나나 속에 있다.


문득 검정고무신의 한 회차가 떠오른다.

성철이가 바나나 먹었다는 자랑에 기영이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렇게 성철이를 따라 바나나 먹으러 성철이 외숙모집 앞에서 추운 겨울 날씨에 한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이웃집에 다 나눠주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에 기영이는 결국 좌절하고 만다.

그렇게 병이 난 기영이는 아픈 와중에도 바나나만 찾는다.

당시 쌀 한 되가 아닌 쌀 한 말 값은 되었다는 바나나는 쉽게 먹지 못하는 비싼 과일 중 하나였다.



Ⅳ 기차


혹시 알고 있는가?

호두, 호빵, 호박과 같이 '호'자 붙은 먹거리는 전부 이란, 이라크와 같은 중동 지방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왔다는 것을.

개화기 때는 실크로드를 통해 곧장 들어오지 않고 미국, 유럽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

그래서 '양'자가 붙는 것이다. 한국 것에 '한'자가 붙는 한옥처럼.

기차는 인간이 만든 문명을 상징한다.

과거 기차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는 수단이기도 했다.

대륙에 진출하려던 일본이 한국에 경인선 철도를 만들었었다.

미국이 이를 통해 들어오려고 하니 일본이 가만두지를 않았다.

거기다 만주까지 닿는 철도를 놓게 되었고 이후 러일전쟁, 청일전쟁이 연이어 발발했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기차였다.

선생은 어느 누구에게는 지배의 힘이요, 어느 누구에게는 빼앗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기차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고 읊조렸다.


지금 여러분과의 작별을 앞둔 그 어린아이에게 그 기차는 어떤 의미를 가진 기차일까요? …… 미래에 올 새로운 생명들, 새로운 세계들에 비록 나는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몇 가지 나의 글, 나의 언어들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씨앗이 되고, 불씨가 되고, 그리고 작은 터널 속 빛과 같은 것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떠날 때의 모든 절망 소에서 남기고 가는 희망으로 오늘 이별을 얘기합니다.



Ⅴ 비행기


높이 날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자기 엔진이 필요한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쓰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 당연한 일이다. '나'가 아닌 '남'을 위한 것이다.

본인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이유지만 남에게 병을 안 옮기기 위해 쓰는 것이 마스크이다.

이처럼 나눠야 할 경험의 가치, 이 모든 슬기를 합쳐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선생은 강조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올라 앞으로도 이렇게 100년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


내가 여러분들과 헤어지는 인사말 '잘 있어'라는 말, '잘 가'라고 하는 그 '잘'이라는 말. 영어로 웰 다잉, 웰 에이징 등 우리가 흔히 잘 쓰는 '웰'이라는 말, 그게 바로 잘 있어, 잘 가 할 때의 '잘'입니다.

그게 바로 어질 인이죠. 이게 있으면 잘 있고 잘 가게 되는 겁니다. 떠나도 그와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고, 잘 있으면 떠나간 사람을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잘 있어, 잘 가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위기를 겪은 사람들을 옛날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새 문명, 새로운 가치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생명의 가치가 제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접속과 접촉이 함께 있어야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 오늘보다는 내일 늘어가는 것. 생식되는, 불어가는 생명체가 증식하는 세계가 바로 생명자본이요, 우리의 밑천이 되는 세계입니다.


이별이 끝이 아니고 잘 있어, 잘 가, 라는 말이 마지막 인사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서로 헤어지는 인사말 속에 잘 있어, 잘 가, 라고 서로 웃으면서, 그리고 잘 가기를 원하고 잘 있기를 원하는 서로의 공감 속에서 죽음도 생명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헤어질 때와, 떠날 때의 인사말…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구전으로 전해진 이 동요는 자연스럽게 입에 익혀져 있다.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이라고 지금은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빠르면 토끼였다고 한다.

원숭이부터 백두산까지 그 어떤 맥락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단순히 한 사람도 아니고 어른들도 아닌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에서 고르고 골라 전해진 노래이다.

선생의 말처럼 생각해보면 원숭이,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 백두산에서 백두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우리 것이 아니다.

원숭이부터 살펴보자.

외교사절단이 원숭이를 보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대중 앞에 원숭이를 선보인 게 1909년이다.

그렇다면 원숭이를 본 시기를 감안한다면 1909년 이후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다.

원숭이, 먹거리인 사과와 바나나 그리고 문명 단계의 마지막인 비행기까지, 전부 미국에서 들여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백두산은 어떻게 들어간 것일까?

100년 동안 외세와 외국 물품들을 마주하고선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쫓아가지만 결국은 백두산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이 전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훗날 선생이 없는 지금부터 미래의 한국인들에게 과거의 경험과 꿈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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