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하디의 단편 <오그라든 팔>에는 주술에 얽히고 만 두 여인이 등장한다. 두 여인은 연적 관계에 놓여 있고 누가 주술을 시작하고 실제 마녀인 것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연인을 빼앗긴 쪽의 여인이 자다가 실제와 같은 꿈을 꾼다. 자신을 죽이려는 몽마를 물리치는 꿈이었다. 그런데 연적에게 몽마에게 입혔던 상처가 그대로 나타나고 연적의 팔은 추하게 오그라들고 만다. 옛 연인의 신부인 연적은 주술사를 찾아가 자신의 병의 원인을 밝히려 한다. 이때 누가 마녀고, 주술은 누가 시작한 것일까.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당연시되지 않던 사회에서는 원인을 엉뚱한 쪽에서 찾고 만다. 사람의 병은 그 사람이 죄악을 범했기에 내려진 천벌이 아니라 병균부터 감염까지 이유는 수만 가지가 될 수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에서는 사람의 병을 신의 분노로 받아들였고 그 원인을 주술에서 찾았다. 토머스 하디의 단편과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딸이 아프자 마녀라는 소문이 있는 치료사를 부른 남자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어 딸이 죽자 남자는 치료사를 마녀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문제는 십년 후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소녀떼에 의해서 사건이 더 부풀려지고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죽이는 마녀사냥으로 번졌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 살고 있는 주인공 코니는 자신의 박사논문 소재를 마녀사냥에 몰려 죽은 딜리버런스 데인이라는 여성에게서 찾는다. 구술시험을 통과한 후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 학교 근처에 있는 외할머니 집을 정리하러 간 코니는 그 집에서 묘한 기운을 느낀다. 집을 청소하다 발견한 성경에서 떨어진 열쇠와 딜리버런스 데인이라는 이름, 역사학자인 그녀는 호기심이 동해서 그 이름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는 식민지 시대의 마녀 사냥과 사라진 책에 대한 것으로 넘어간다. 여기까지는 팩션에서 흔히 나올만한 전개지만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마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은 호기심으로 그 이후에는 독특한 소재의 박사논문과제로 여기던 딜리버런스 데인의 흔적 찾기는 코니가 상상할 수 없던 부분에까지 도달하고 만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고 마녀라는 이름의 위협을 받는 딜리버런스 데인과 박사논문에 박차를 가하라면서 장학생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지도교수의 위협을 받는 코니의 입장이 묘하게 맞물려 들어간다. 더욱이 주술을 건 마녀는 딜리버런스 데인이 아니지만 그녀 자신이 마녀이자 치료사라는 것은 맞고 과학을 믿는 현대인인 코니의 삶에 마녀의 주술이 끼어들어온다는 것이 묘한 감흥을 남겼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던 안 주던 마녀라는 이름으로 선량한 사람을 끌어내렸던 사람들이 우리네 무당을 보면 어떻게 말할까 궁금하기도 했던 책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마지막에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며 마무리를 짓는 이야기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팩션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닌데 두툼한 분량이 얇게만 느껴질 정도로 흡입력 있는 책이라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마녀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해도 마녀사냥에 대한 핑계는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의미로는 어둠이 사라진 현대에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촌극을 벌이게 될 때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잽싸게 건너뛰고 지나가고 싶은 순간이다. 마음에 두고 있는 아이 앞에서 꼴사납게 고꾸라지거나 발표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허둥지둥 손을 휘둘러서 안심하라고 웃어보였지만 알고 보니 다리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몰랐다는 둥 일상 속에서도 웃지 못 할 상황들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 웃지 못 할 상황을 객관적으로, 게다가 마음 편하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이 책 <유모어 극장>은 엔도 슈사쿠의 유머러스한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첫 번째 단편 <마이크로 결사대>를 제외하고는 일상 속에서 있을 법한 촌극들이 펼쳐진다. 그게 묘하게 사실적이면서도 독특하게 다가와 유쾌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소개글대로 모든 단편들은 폭발적으로 웃음을 자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피식 웃게 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의 잔향이 텁텁하지 않으니 읽고 난 이후의 기분도 좋은 편이다. 외과수술을 의사들의 몸을 축소해서 환자의 몸에 들어가 행한다는 내용의 <마이크로 결사대>는 그 독특한 상상력과 결말에 감복할 지경이지만 <우리 아버지>같은 경우에는 잔잔한 감흥을 남기기도 한다. 침팬지가 인간에게 호감의 감정을 표한다는 내용의 <아르바이트 학생>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심정과 주인공, 주인공의 상담을 들은 사람의 옛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특히나 인상 깊었다. 같은 동 아파트 내 주부들의 대립관계를 나름대로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 <여자들의 결투>같은 경우에는 결말이 예상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팽팽한 경쟁 속에서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주부들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어서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았다.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였는데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버지의 모습과 그가 가지고 있는 숨은 비밀이 슬며시 풀어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젊지 않았던 어른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면 멋쩍어 하고 딸의 남자친구를 보면 분개하는 평범한 가장이 바람을 핀다는 오해를 사지만 그 뒤에는 그가 청춘일 때의 옛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구조와 아들이 아버지를 보는 시선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기분 좋게 웃을 뿐만 아니라 살짝 가슴 찡한 느낌마저 들었다. 표지만 보면 지나치게 가벼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단편들이라 흡족할 때가 많았다. 단편답게 전개도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 가볍게 뚝뚝 끊어 읽기 좋았다. 그러면서도 단숨에 읽어나갈 정도의 흡입력을 품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다면 그 정도로 족한 것 아닐까.
어느 여행기에 거리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젊은이들이 희망 없는 눈으로 거리에 나와 앉아 있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여행자가 다가가서 왜 그러고 앉아 있냐고 묻자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여행기를 읽으면서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 정도는 아니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젊은 사람들이 패기가 없어서 그렇다지만 패기 있고 야심찬 소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책 <위풍당당 개청춘>은 그런 20대의 눈으로 본 세상살이라고 할 수 있다. 선로를 따라 잘 달리던 열차 같던 삶이 학창시절이었다면 졸업 한 이후에는 말 그대로 갈 곳 없게 된 청춘이다. 꿈을 키우라지만 때로 그 꿈이 한 푼 값어치도 없고 취업에 목을 매게 된 세대다. 시작점은 일단 그렇다. 하지만 점점 뒤로 갈수록 갈피를 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대의 입장에서 날카로운 사회비판이 나오나 싶었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 이야기를 할 뿐이다. 취업을 하지 못해서 3년간의 백수생활을 말할 때도, 취업이 되어서 말단 직원으로써 고충을 겪을 때도, 결혼을 해서 손자며느리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고충을 털어놓는다. 그게 때로 공감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했다. 사람의 삶은 누구나 평범하지만 동시에 독특하다. 그 고생의 자락이 변명으로 들리는 순간 공감은 힘을 잃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털어놓는 일상은 회사 내에 개를 키웠으면 하는 소망이라던지 사이트의 죽음, 아버지의 한량기질 등을 말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털어놓을 때는 독특한 흥미를 자아냈다. 반면 불평은 어디까지나 비판이 아닌 불평으로만 들려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취업만 하면 열심히 살 것 같던 마음이 변했다고 자신도 말하고 있지만 취업 전에는 승자가 만든 게임의 불공정과 모든 것이 운임을 비난하고 취업 후에는 항상 을로 살아야 하는 서러움과 삶의 지루함을 말하니 내심 어쩌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전에는 룰은 바꾸지 않은 기성세대에 대해 불만을 토했다면 자신이 기성세대에 들어간 이후에는 지겹다고 불만을 토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기에 비판서가 아닌 투덜거리는 에세이로 보기에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터넷 세상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야구에 몰두하는 새로운 즐거움, 네이버에서 지식을 찾으면서 달팽이를 연구하는 것까지 일상의 소소한 맛이 잘 살아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려움이 없을 수 없고 누구나 짐을 지고 간다. 겉으로는 안 그래 보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노력만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버려서 쓴웃음을 지으며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몇 있었다. 그리고 초반에 그런 말을 했으면서도 변화를 주도하는 누군가가 아닌 안정을 찾자 바로 안주하고 지루해하는 저자의 평범함이 납득이 가기도 가지 않기도 했다. <위풍당당 개청춘>, 사는 게 다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 단골로 꾼 꿈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꿈이었고 두 번째는 태어나 살았던 언덕 위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꿈이었다. 떨어지는 꿈은 패턴도 다양하게 바뀌며 매번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반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꿈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언덕이 가파르거나 눈에 미끄러져 혼자 낙오되는 내용이었다. 물론 꿈을 꾼 시점에서는 이사를 했고 자란 상태였기에 길이 미끄럽다고 집에 못 돌아갈 염려도 없었고 떨어지는 꿈도 떨어지는 도중에 깨어나지 추락한 이후가 나온 적은 없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꿈을 꾼다. 그 내용은 일견 의미 없어 보이지만 대개는 어떤 의미를 혹은 기억을 품고 있다. 이 책 <꿈의 해석>에 따르면 많은 꿈은 그 사람이 품은 은밀한 소망의 충족이라고 한다. 단지 그 꿈이 왜곡되고 변형되어 해석하지 않으면 그 안에 숨은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공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해보면 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언덕 위의 집에 살 때 길이 미끄러워 내가 나동그라진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짧은 다리로 올라가기가 버거워보였는지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달랑 들어서 안고 올라갔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꿈은 내가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그리움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프로이트 적 해석으로 성적인 요소를 넣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사람의 꿈이 그 사람의 육체가 지금 느끼는 바와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꿈속에서 다리가 무거워 도망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 깨어나 보니 이불이 엉켜서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흔히 춥게 자면 물에 빠지는 꿈을 꾼다고 하지 않던가.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례처럼 실제로 들은 굉음은 꿈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꿈속의 많은 부분이 실제 자신의 기억과 어느 정도의 연관을 품고 있다는 것은 좀 놀랍기는 했다. 사람이 가진 기억은 그 사람이 쉽게 불러 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쉽게 불러내지는 못하지만 분명 기억하는 초기억을 꿈에서 이용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꿈에는 수많은 내용들이 들어가고 그 사람이 느낀 외부자극, 감정, 욕망, 기억들이 엉켜 들어간다. 그게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는데 그 밑바탕에 은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형태로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하고 성공적으로 치룬 시험을 반복적으로 꿈으로 재현함으로써 자신을 독려하기도 한다고 한다. 신선했던 것은 도시괴담처럼 들렸던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의 차이라며 장례식 꿈을 꾼 여성의 행동에 대한 내용이 이 책 <꿈의 해석>에서 사례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한 여성이 조카가 죽는 꿈을 꾸고 첫 번째 조카가 죽었던 때를 말한다. 그녀의 꿈은 그녀가 헤어진 연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장례식이 일어난다면 혹여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카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니었다. 꿈은 압축적인 내용이지만 그 바탕에 깔린 사고는 방대한 것이라서 조각 맞추기 퍼즐을 하듯이 하나하나 읽어나가지 않으면 엉뚱하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프로이트가 실제로 꾼 꿈에서처럼 환자의 사례가 여러 가지 섞이기도 하고 교수 임용에 대한 불안감이 친구를 숙부로 바꾸면서 모습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사람의 무의식이 모습을 달리한다니 신선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와 달리 <꿈의 해석>의 내용이 단지 헛소리로만 들리지는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의 꿈이 스러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소망이 숨어 있다는 발상은 흥미로웠다.
책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오래 동안 방문객을 받지 않았던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에서 방문객을 공식적으로 받겠다고 공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의 호기심이란 끝이 없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보면 길을 가는 사람에게서 웃지 못 할 이야기를 지어내게 된다. 물건에게도 혼이 깃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숨은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이 뭐가 놀라운 일이겠는가.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낼 만한 초콜릿 공장이기도 했지만 은둔했던 사람의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사람들의 숨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책 <9월의 빛>에서도 20년간 은둔의 시간을 보낸 장난감 제작자 라자루스 얀이 등장한다. 그가 주인공인 시몬 소벨 가족과 마주하게 되는 접점은 그 집을 관리하는 일자리에서부터였다. 소설의 시작은 마치 동화처럼 전개된다. 매력적 미소를 가지고 있던 가장 아르망 소벨이 죽자 가족들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상속에 대한 한정승인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족들은 그가 남긴 빚더미 속에 파묻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 것이다. 어머니 시몬은 예전의 직업을 살려 선생님 일을 하려 하지만 적은 월급으로 먹고 살기도 빠듯한 판에 점잖은 말로 협박을 해대는 빚쟁이를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이레네와 도리안 남매는 무기력한 어린 아이였고 이레네가 무도장에서 아직 어린 병사들과 춤을 몇 번 춰주고 받은 돈 몇 푼으로는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이니 가족의 친구들이라고 붙어 있던 떨거지들은 전부 떨어져 나갔고 붙어 있는 것이라고는 변호사들뿐이었다. 다행히 단 한 명 진짜 친구가 있어 소벨 가족에게 살 곳을 내어준다. 그들은 일단 좁은 아파트에서 안도하지만 의외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기댄 미스터리 소설이니 기회는 시련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시몬 소벨은 거대한 저택이 관리인이 될 기회를 얻는데 그 주인은 라자루스 얀이라는 장난감 제작자였다. 그는 20년간 은둔 생활을 했으며 자신의 일상과 도서 구입을 맡아서 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로써의 경력을 가지고 있던 시몬이 그 자리에 적합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저택을 관리하며 호젓한 집에서 살게 된 소벨 가족은 뜻밖의 행운에 감탄한다. 저택에는 약간은 섬뜩한 로봇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주인인 라자루스 얀은 더없이 호감이 가는 남자였던 것이다. 살 곳이 제공되고 월급도 후한 편이었다. 더구나 라자루스 얀은 관대한 주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이들이 대학까지 가겠다면 대학의 학비까지 대주겠다고 자청했다. 빚쟁이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벗어나 한적한 마을의 대저택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는 소벨 가족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그림자가 다가온다. 모든 힌트는 이레네게 연인 이스마엘에게서 받은 알마 마티스라는 여인의 일기에 들어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는 코앞에 있었으나 가족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고 이내 시련의 문이 열린다. 내용을 모르고 읽었을 때는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나니 환상에 기반을 둔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읽기에 따라서는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 안에서 로봇이라는 과학적 산물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오히려 환상을 강화했다. 읽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동화로도 소설로도 다각도로 읽을 수 있는 터라 이 책 <9월의 빛>은 좀 묘한 맛이 남는 책이었다. 그래도 책장을 덮는 순간 안개 속을 한참 헤매다 밝은 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니 그 안개에 빠져 볼만은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