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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제임스 힐먼 지음, 주민아 옮김 / 도솔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인류는 어찌 보면 끔찍한 생물이다. 어제 다른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가 어느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다. 지구를 '우리 행성'이라고 지칭하는 인류에게 냉소를 퍼붓고 인류가 죽어야 지구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외계인이 등장했다. 불행하게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범고래나 고양이도 자신의 유희를 위해 펭귄이나 쥐를 죽인다지만 인간만큼 효과적으로 동족을 죽이는 생명체도 드물다. 소설 '드래곤 라자'의 엘프 이루릴은 이런 말을 한다. 엘프가 숲을 거닐면 숲과 동화되어 그저 지나갈 뿐이지만 인간이 숲을 거닐면 길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기보다 자신에 맞추어서 환경을 바꾼다.
더구나 그런 노력은 환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어준의 책 '건투를 빈다'에서도 이런 대목이 있었다. 상담자인 여성은 자신의 연애는 싸움을 기반으로 한다고 한다. 싸워가면서 관계도 돈독해지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남자친구를 변화시켜 나갈 생각이라는 것이다. 남자친구는 진저리를 치지만 원래 자신의 연애는 이런 방식이며 그것은 지극히 건강한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짝사랑이 괴로운 것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해서라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자신의 구미에 맞추어 변화시키려는 방식이 '건강한' 것인지는 의문이 생겼다.
하물며 그 변화의 극단에는 죽음이 있다. 인간은 상대를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주로 악당이 내뱉는 대사긴 하지만 미국 드라마 속의 악당은 이런 말을 한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전쟁터에서 수십 아니 수백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쟁과 평화 중에 어느 것이 바람직하냐는 질문에 평화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평화가 바람직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하는 전쟁은 왜 사라지질 않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 책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쟁은 예전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한 장면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아수라장인 전장을 거닐며 패튼 장군은 전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도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의 제목은 '전쟁은 정상적이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말하는 평화가 비정상적이라고 한다. 전쟁터 속에서 군인들이 살아 돌아오면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그래서 군인들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전쟁터에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기에 당연한 혼돈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평화야 말로 전쟁이 잠시 멈춘 비정상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은 전쟁을 너무나 싫어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야 말로 살아있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런 감정은 사라져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 충격적이다. 매일 많은 매체에서 전쟁은 일상적으로 소비된다. 단 한 명의 죽음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인데 수만 명의 죽음은 단순히 수치화되어서 그냥 지나치게 된다.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찰나에 전쟁에 대해 분석하는 책은 충격적이지만 논리적인 면도 있었다.
인간 본성 속에 죽고 죽이려는 욕망이 있지 않다면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것이다. 단순히 전쟁의 원인이 타인의 것을 원하는 탐욕이라고 보기에는 그 전쟁은 지나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전쟁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심리학적 측면에서 말이다. 전쟁은 정상적인 것이므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던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암담하지만 납득이 가기는 하는 주장부터 전쟁이 숭고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그 해방적 초월성을 인정하고 그 소명을 받아들이라는 절대 납득하기 싫은 내용도 있었다.
자주 잊게 되지만 우리나라는 휴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책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좀 더 흥미로웠다.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만 가슴으로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도 꽤나 들어 있었지만 왜 전쟁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지 인간이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제목은 물론이고 표지까지 찜찜했지만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은 나쁘지 않았다. 허나 이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전쟁은 가능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도 타인의 죽음보다는 평화를 바라게 되는 것도 인간의 모순적 본능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