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거대한 힘을 품고 존재한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수많은 공상을 하고 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꿈을 꾼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되 죽지 않는 불로불사의 꿈일 수도 있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룬 시간 여행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 시간 여행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다. 그 근거는 현재에 미래의 수많은 시간 여행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시간 여행이 보편화되어서 위장을 충분히 하고 숨어 들어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드러나는 부분은 없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수없이 한 여자를 향해 시간 여행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나 하나의 사건을 막기 위해서 모이는 타임스토퍼와 타임리와인더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상상과 은밀한 꿈을 자극한다. 책 <어글리>에서 16살이 되면 전 국민이 전신 성형을 받도록 조장하는 미래 사회를 그렸던 스콧 웨스터펠드의 새로운 소설 <미드 나이터스>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루의 시간은 원래 25시간이었으나 정체불명의 존재들은 자신을 쫓는 사냥꾼을 피하기 위해 하루의 1시간을 접어서 숨겨둔다. 그런 비밀의 시간 속으로 5명의 아이들이 뛰어든다. 자정에서 자정으로 끝나는 비밀의 시간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5명의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부르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정과 자정 사이에 숨어 있는 한 시간에 얼어붙어 버리고 그 시간의 주인인 다클링들이 깨어나 활동한다. 원래대로라면 먹이 사슬의 제일 위에 있어야 할 존재들이었으나 인간의 기술을 두려워했고 그들은 인간이 불과 기술을 사용하면서 예전 먹잇감이었던 인간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25시간이었던 하루의 한 시간을 은밀한 비밀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시간에는 모든 인간들은 굳어버려 다클링의 먹잇감이 될 수 없지만 운 나쁘게 시간의 경계에 있던 인간은 깨어 있는 채 비밀의 시간 속으로 떨어져 다클링의 식량이 되었다. 그런데 작은 마을 빅스비에는 그 비밀의 시간에도 움직일 수 있으며 묘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을 미드 나이터라고 불렀지만 50년 전 그들은 몽땅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만 움직일 수 있는 한 시간을 기이하게 여기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5명은 한 명씩 빅스비에서 태어나거나 모여들어 반격을 준비한다. 푸른빛에 휩싸인 비밀의 시간이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미드 나이터 제시카 데이가 빅스비에 온 이후 야생동물 같았던 다클링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모여들고 이제 어린 미드 나이터들은 살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1시간 동안 말이다. 가장 당혹했던 것은 밤의 무리와 싸우는 것은 고등학생 다섯 명이며 치열한 싸움이 끝나도 비밀의 시간 동안 얼어붙어 버리는 일반인들은 그들의 사투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고작해야 자정 넘어서 돌아다니는 청소년을 발견하고 통금을 어겼다고 훈계를 늘어놓는 정도였다. 5명의 미드 나이터들은 자신만의 능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다클링과 싸운다. 그들에게 비밀의 시간은 한껏 누구의 통제도 없는 자유이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공포의 시간이고 보통 사람들이 생활하는 낮 시간은 견디기 힘든 인내의 시간이 된다. 아무도 모르는 싸움을 하면서 성적을 걱정해야 하고 귀찮게 구는 동생을 떼어내고 외출금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비밀, 숨은 음모가 터져 나오면서 이야기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간다.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 배경과 인물설정을 이해하기까지의 앞부분은 다소 지루한 편이다. 하지만 섬광처럼 터지기 시작하는 마지막에 들어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 이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권 <푸른 정오>에 들어서는 푸른 시간이라고 불리는 자정의 시간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예상치 못했던 설정도 그렇지만 흥미로운 전개와 성장하는 주인공, 강렬한 마무리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화 <노팅 힐>에서 낙과주의자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납득하기도 했지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계란, 생선, 유제품은 물론이고 채소조차도 피해 떨어지는 과실만을 먹는다는 발상이 놀라웠던 것이다. 특히 휴 그랜트가 '살해당한 당근'이란 말을 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생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고 그것은 가장 본능과 가까운 행위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행위를 가지고 잔인하다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일부 극렬하게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잔인하다는 말을 듣는다. 덕분에 인도적인 도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했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죽이고 그 사체를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잔인하다면 잔인할지도 모른다. 그 잔인하다는 시각조차도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읽어내는 인간의 오만한 시각이란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이 책 <유정천 가족>의 등장인물들 역시 살기 위해서 혹은 즐기기 위해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먹고 마시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조차도 인간들이 그를 냄비 요리로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식인종이 등장한 것 같지만 주인공은 둔갑 너구리고 금요 구락부라는 이름의 미식가 클럽에서 그의 아버지 시모가모 소이치로를 너구리 냄비 요리로 먹은 것뿐이다. 이 일은 너구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며 너구리들은 즉각 자신의 수장을 새로 뽑아야 했다. 그리고 소이치로의 가족이었던 아내와 사형제는 매우 슬퍼했다. 그 후에는 어처구니없지만 평소대로 살아간다. 자신이 사랑하던 아버지가 죽었지만 원래 세상 순리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구리들은 텐구를 놀래키고, 텐구는 인간을 괴롭히며, 인간은 너구리를 잡아먹는 기묘한 삼각관계 속에서 너구리들은 털 뭉치가 되어 늙어가거나 누군가에게 먹히는 죽음이 당연했던 것이다. 왜 굳이 맛있는 많은 음식들을 내버려두고 송년회 음식이 꼭 너구리 냄비 요리여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주인공 야사부로는 소이치로의 삼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을 딱히 파헤치지도 자신의 아버지를 먹은 텐구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흘러가 아버지의 죽음과 닿고 그는 금요구락부 회원들과 쇠고기 전골요리를 먹는다. 그리고 그들과 담소를 나눈다. <유정천 가족>에는 묘한 뒤틀림이 숨어 있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정말 기묘한 관계가 아무렇지 않게 조성되고 텐구는 인간을 납치해 텐구로 만들고 텐구가 된 인간은 예전의 그 텐구의 힘을 빼앗는다. 너구리는 텐구를 돕기도 하고 인간과 교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말 금요구락부의 냄비요리 신세를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주인공 가족이 둔갑 너구리고 그들의 스승은 텐구, 첫사랑도 텐구, 인간이 은인이자 원수인 기묘한 고리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다. 주인공의 슬픔을 받아들이다가도 '바보의 피'에 좌우되는 너구리들의 엉뚱한 변모부터 수많은 궤변들이 능청스러운 유머와 함께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그 혼란을 유유자적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더욱이 양대 교토 작가로 불리는 모리미 토미히코의 교토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판타지라 익숙한 듯 신선한 맛이 숨어 있었다. 주인공이 너구리고 그의 아버지의 사인이 냄비 요리가 되었기 때문이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던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인간의 뇌는 어린 날의 초라한 기억을 아름답게 채색시켜 주기도 하고 더없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서글픈 색깔로, 행복했던 날을 그늘지게 기억하게 만들기도 한다. 덕분에 사람의 기억은 때때로 변하는 것이 되어 버려서 어린 날의 기억이 정말 자신의 기억인지 고개가 갸웃해질 때조차 있다. 그것이 어른들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 준 '들은' 기억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본' 기억인지 가늠이 어려운 것이다. 어린 시절일수록 그런 면이 강한데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때로 뒤엉켜서 아련한 감정을 자아낸다. 무엇을 하고 누구와 어디서 놀았는지도 기억에 나지 않지만 즐거웠던 기억이나 초등학교 시절 지겹게도 괴롭혀서 진저리가 나던 아이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을 때는 묘한 감흥이 되살아난다. 이 책 <데샹보 거리>는 후에 성장해서 작가가 되는 크리스틴의 유년기를 담고 있다. 어린 아이의 기억답게 그것은 때로 엉뚱하고 조각조각 부서지는 이야기이지만 구체적 기억은 지워져도 남는 감정의 고리를 타고 아련한 색채를 만들어낸다. 은근히 빨간 머리 앤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 크리스틴은 식민청 관리인 아빠와 여행가 기질을 가진 엄마 사이에서 자라난다. 크리스틴의 아빠는 엄마와 나이차가 꽤 나는 편이었고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캐나다 매니토바 주에 정착한 상태였다. 그는 이민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던리 우물>에 나오는 화재 사건 이후에 크게 상심하고 모든 불행을 예견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당연히 자식들과는 거리가 생겼지만 <프티트 미제르>에서 아빠의 꾸중을 들은 어린 크리스틴이 삐져서 밥을 먹지 않자 집이 빈 틈을 타서 음식을 만들어 어린 딸과 화해를 청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크리스틴은 다양한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가족을 추억한다. 여행가 기질이 있던 엄마가 <집 나온 여자들>에서 어떻게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크리스틴만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지, 집에 돌아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준다. 모험을 꿈꾸는 것도 불행을 그리는 것도 전부 상상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크리스틴은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간다. 그것은 때로는 서글픈 색채를 낸다. 수녀가 되기 위해 떠나는 언니에게 철없이 노란 리본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입에서 리본을 가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언니에게 가지 말고 함께 살자는 말이 터져 나올 때, 정신병원에 갇힌 다른 언니를 만나러 갔는데 한 순간 어린 동생을 알아보는 언니의 모습이 나올 때 서글픈 감정은 한숨과 함께 가라앉는다.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의 가장 큰 차이는 자신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에도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을 잃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엄마처럼 자신을 돌보던 언니가 죽거나 성직에 몸을 바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족 같던 하숙인이 직무가 바뀌어 하숙집을 옮겨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크리스틴은 철없는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가끔씩 정곡을 찌르는 행동을 해서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엄마가 큰 언니의 결혼을 왜 반대하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큰 언니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단언할 때 그 결심의 견고함에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아이의 시각이라 정작 중요한 설명 부분에서 잠이 들어 시간 간격이 커다랗게 벌어지기도 하고 잘 이해를 못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무거울 수도 있었던 이야기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크리스틴의 사춘기를 보여주는 <빌헬름>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서 달라진 모습에 놀라게 되기도 했다. 하나 즐거웠던 부분은 네덜란드에서 온 빌헬름을 크리스틴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온 가족이 동원되는데 수녀가 된 언니까지 참여한다는 점이었다. 어린 아이가 성장하면서 차곡차곡 쌓여 가는 가족에 대한 기억의 조각이라 때로는 따뜻하고 서글프며 웃게 되기도 해서 단편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알타몽의 길>에서는 크리스틴의 성장한 이후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책도 꼭 보고 싶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다가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었다. 뒤에서 질주해오던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안은 도로가 아닌 건물에 따른 부속대지로 생각했으므로 방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단지 안을 고속도로인 것처럼 질주한 차의 탓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치일 뻔한 것이 놀랍기도 하고 당황해서 잠시 멈칫했더니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자가 입을 열었다. '잘 보고 다녀!'라는 성난 목소리였다. 이어 창문은 다시 올라갔고 차는 아까 일은 없던 일인 듯 다시 질주해서 사라졌다. 당시에는 운전자가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이 책 <트래픽>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많은 운전자가 운전석에 앉으면 평소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인다. 더없이 소심한 사람이 자신의 차 앞에 끼어든 다른 차의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며 기어이 추월을 한 후 그 앞을 느리게 달리려 하거나 신호위반은 예사로 하는 속도광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시절 점잖은 것으로 유명했던 교수님조차 자신의 앞에 끼어드는 자전거는 확 받아버리고 싶다는 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었다. 사람들은 차에 탄 순간 차는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정작 다른 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인간 간의 소통 수단 중에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말과 눈빛인데 그 두 가지가 차 안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떠들어도 앞 차에 전해지지 않고 눈을 서로 맞추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면 다른 차에 대한 비인격화가 이뤄지고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더구나 내 차 앞에 끼어들은 다른 차가 아니라 '저 자식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며 흥분하는 운전자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노를 직접 전할 수 없으니 속도를 올리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면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앉는 경우 차를 자신으로 표현한 말을 하는 경우도 없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차가 끼어들거나 추월을 해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어서 자신이 운전자, 자전거 이용자, 보행자 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바뀐다고 한다. 운전자가 되면 다른 쪽들이 거슬리고 반대로 보행자가 된다면 자전거와 차가 위협거리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특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의 왜곡이 자신이 평균 이상의 모범 운전자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교통사고로 16분의 1명꼴로 사망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위태위태한 운전을 하는데도 자신은 모범 운전자이며 다른 사람들이 운전을 엉망으로 한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생각 외로 복잡한 정보를 연이어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사람의 뇌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사고가 일어나기 쉽다고 한다. 로봇도 사람처럼 운전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 운전이라 그에 따른 집중력은 쉽사리 바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긴장하지 않다보면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왔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한다. 이때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한 길이 안전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온 정신을 다해 운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 외에도 도로를 더 건설해도 교통 정체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라든지 각국의 교통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등 교통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느낌이라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학술적인 느낌이 있는데도 읽기가 재미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사람은 기본적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이상 다른 감정으로 눈을 돌리기 어렵다. 하지만 때로 어떤 감정은 그 기본적 욕구를 뛰어넘는다. 예전에 유태인 수용소에서 잔혹한 실험이 진행되었을 때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를 끌어다가 한 방에 가두었다. 그 방은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고 바닥을 비롯한 모든 부분이 끓어올랐다. 맨발로 아기를 안고 있던 엄마의 발은 타들어갔다. 그리고 한계를 넘고만 아기 엄마는 미쳐버리자 아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발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때 실험을 한 자들은 그녀의 모성은 별것 아니고 자신의 안위를 더 중요시 했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살이 타들어가 미칠 지경이 될 때까지 아이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반한 행동이었고 그 감정은 '사랑'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책 <헝거게임>에서는 공포 정치 아래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게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때로 주인공을 움직이는 동기는 생존이 아닌 다른 것일 때가 많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시점은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될 소년 소녀를 뽑게 되는 날이다. 주인공 캣니스는 평소대로 몸을 움직여 출입이 금지된 숲으로 들어간다. 경계 지역에 사는 그녀는 엄마와 동생을 부양하고 있었고 밀렵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평소대로 숲에 들어가자 익숙한 듯 게일이라는 청년이 그녀를 반긴다. 헝거게임에 참가하게 될 조공인을 뽑게 된 날이라 긴장했지만 그들은 평소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게일의 입에서 도망쳐서 둘이 살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금지된 숲에서 숱하게 사냥을 했으며 온갖 먹을거리들의 위치와 풍부한 지식을 품고 있는 그들이라면 정부에서 주거지로 정해놓은 12구역을 벗어나 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접근하기도 두려워하는 숲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사냥터이자 식량의 조달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캣니스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거절한다. 설사 헝거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어린 동생 프림을 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오후가 되자 캣니스와 게일은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추첨 장소로 모여든다. 정부에 대한 반란과 그 진압의 기억을 잊지 말라는 이유로 12구역의 소년 소녀를 뽑아 단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헝거 게임의 추첨장으로 말이다. 정부는 그것을 축제와 교훈을 얻는 장소로 거대한 쇼가 일어나는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곳에 끌려간다면 사형 통지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2,4 구역 같은 곳은 헝거 게임에 참가해 우승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한 전사를 키우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반면 캣니스같이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굶주려 아사하는 일도 다반사였고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지 전투에 대한 지식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운명은 뒤틀리고 캣니스는 헝거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그것도 잊을 수 없었던 소년과 함께 말이다. 소녀는 그때부터 수많은 선택과 성장을 거듭하며 헝거 게임의 경기장이라고 불리는 전장을 누빈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기를 보면서 환호하지만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카메라에 잡힐 때 거짓 표정을 짓고 머릿속에서 수많은 전략을 짜며 유리한 것은 뭐든지 이용해야 했다. 24명 중 단 한 명이 살아남는다는 것, 헝거 게임이 단순한 게임이 아닌 정치적 놀음판이라는 것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허나 우습게도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는 결코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다. 상대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개가 반복되면서 마지막 부분을 미리 훑어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동시에 아껴보고 싶은 마음도 금할 수 없어서 최대한 빨리 읽어나간 책이다. 누군가가 연출한 가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 속에서 성장해가는 소년 소녀의 교차하는 감정이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