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과 정부, 경찰은 광장에 나온 중고생이 무슨 사주라도 받고 그곳에 모인 줄 아나본데, 학생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이야 자기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사주를 받고 나왔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10대는 온전한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아해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판단이 끝났으면 그 다음은 감정적 표출과 함께 행동하는 것. 지금 광장에 나오는 중고등학생들은 스스로의 판단 하에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일 뿐. 정치적 음모론을 제기하지 말라. 

  언론이 취재하고 인터뷰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들끼리의 대화를 들어본 결과, 광장에 나온 '투표권 없는' 중고등학생들은 이렇든저렇든 관심없는 '투표권 있는' 어른들보다 훨씬 나았다. 누가 그들을 보고 정신적으로 미숙하다 말하는가. 감정적으로 부화뇌동하여 주관없이 뒷공작에 의해 그 자리에 나왔다고 말하는가. 오히려 뒤늦게 자기들도 나서겠다고 밝힌, 몇몇 대학 - 그것도 정말 몇 개뿐 - 학생회를 비롯한 2,30대들보다 훨씬 낫다. 

  물론 국민 모두가 미친소 수입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하지만, 분명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2,30대들이, 나아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 이들이, 격렬히 반응하는 10대들보다 못한 건 분명하다. 우석훈은 과거의 프랑스처럼 10대들이 들고 일어나 수능시험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들의 분노가 입시를 향하지 않고 미친소를 향하고 있는 건, 자신들의 생존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더불어 미친소 반대 시위에 나와, 영어몰입과 입시압박에 대한 자신들의 메세지를 동시에 드러내기도 했다. 

  이명박이 독단적 결정 혹은 똥꼬집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성난 군중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의 분노는, 곧 식탁에 미친소가 오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동시에 국민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부시와 짝짝궁이 되어 결정했다는 데에 있다. 미친소만 못마땅한게 아니라, 아무리 반대가 거세도 물러나지 않는 똥꼬집이 못마땅한 것이다. 정당한 절차인 투표를 통해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것은 아니다. 바른 정치를 하지 않는, 민심을 반영하지 않는 군주는, 혁명에 의해 물러나게 해야 하는 것이 다음 순서.

  아무리 분노를 표출해도, 아무리 욕을 해도, 씨도 먹히지 않는 대통령과 정부를,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귀를 틀어막고 자기 할 말만 해대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자기 생각대로 곧이곧대로 밀고 나가는 대통령은 필요 없다. 현재 모든 시선이 미친소에 쏠려있는 사이, 어쩌면 대운하 작업이 척척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 이때다 하고. 그러지 마라.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기업에서 하던 짓 국가에다 적용하지 마라. 당신 하고픈대로 하고 싶으면 그 많은 돈으로 기업 하나 차려서 그 안에서 당신 맘대로 하라. 국민을 생쥐삼아 광우깡 먹이지 말고.

p.s.

1. 때로 어떤 표현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현재 중고등학생들의 자발적인 적극적 참여의 행렬을 프랑스의 68혁명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 말은 피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젊은 아해들의 이성적인 판단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낫게 바꿔보자는 것. 우석훈의 말을 믿는다. 이들이면 가능하다.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의 판단과 자발적 참여, 연대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 

2. 광우병 발생 가능성이 있느냐의 여부는 아주 간단히 파악된다. 정부가 99% 안전하다고 했다면, 나머지 1%는 안전하지 않은 것이고, 1%라도 안전하지 않다면, 들여와서는 안 된다. 정부가 그렇게 말했다. 99% 안전하다고. 왜 자기들이 그렇게 말을 해놓고 다시 또 안전하다고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광우병 발생하면 그때 수입중단하겠다"고 말한 대통령은 개념을 가지시라. 발생하면 이미 그땐 한 명 죽는다. 한 명만 죽겠나. 수입중단 시점에 한 명이지, 이미 수천명 죽어가고 있다. 어디 수천명 뿐이랴. 그래 어쩌다 운 좋아서 한 명만 죽는다고 치자. 그래도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들여와선 안 된다. 한 명은 목숨 아니더냐. 제정신이고서야 어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3. 무조건 사람들이 많이 모여 같은 목소리를 내면, 그것을 파시즘의 조짐이라 판단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렇게 따지면 '모든 한 목소리'는 모두 파시즘으로 치부 될 것. 디워, 황우석 사태와 동일하게 보면 안 된다. (동시에 디워와 황우석 사태를 또한 동일시해서도 안 될 것.) 어떤 이들은 단지 그것이 '다수'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거부감을 갖기도 하는데, 다수의 이성적인 판단과 적극적인 행동은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물론 지금 이 사태를 비이성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멍청한 짓으로 보는 이들도 있을 터. 그것이 비이성적인 판단인지 아닌지는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따질 것까지 없다. 그냥 간단하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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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5-0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만 이제 아래세대에게도 빚진 세대가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명박 장로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 들을 때는 귀를 틀어막으셨나봐요

가시장미 2008-05-0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 만큼만(더 바라지도 않는다!)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인지!!
 
팬옵티콘


  약 한 달 전쯤 어느 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풀어낸 바 있는데, 의문이 생겨 틈이 나는대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었다. 예전에 쓴 글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어느 고등학교 시험에 정답을 '판옵티콘'으로 써야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팬옵티콘'으로 적어냈고, 선생은 이것을 틀렸다고 채점했다. 학생이 네이버에 팬옵티콘이 틀린거냐고 물었고,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해준 것 같진 않다. 이 내용을 가지고 대학원 수업에서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과 교수님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팬옵티콘'이 더 명확하다 했고, 선생님들은 교과서에 '판옵티콘'으로 나왔으니까 판옵티콘'만' 맞게 해야 한다 했다.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은, 교수님쪽에 가까웠는데, 'Panopticon'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가능한 모든 단어를 정답으로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판옵티콘도 맞게, 학생이 쓴 팬옵티콘도 맞게, 단행본 제목으로 나와있는 파놉티콘도 맞게, 더불어 많이 쓰이지 않지만 페놉티콘도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정답만이 정답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교육은, 공부는, 반드시 학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학생이 관심이 있어 접한 단행본이나 논문, 혹은 그밖의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접할 수 있고, 그것이 별 무리없이 쓰여진다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정도가 지난 글의 요지였는데,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추후 조사를 더 해보았다. 일단 국회도서관에서 판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 관련 논문과 학술지가 꽤 나오고, 파놉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도 수적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팬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는 수적인 열위를 보이긴 했지만, 역시 논문과 학술지에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공식용어였다. 심지어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페놉티콘으로도 관련 논문이 한 건 검색되었다. 이쯤되면 네 가지 용어에 대해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현실을 감안해본다면.

  수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해서 학자들간에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적인 우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실상 언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은 그것을 쓰는 대중들의 편리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고, 네 가지 다양한 표현들이 학계에서 혹은 대중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무리없이' 사용된다면 모두 다 맞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파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팬옵티콘으로 말했을 때, 페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경우라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이래도 약간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편집, 교열교정, 국어 계열쪽으로 학위를 가진 전문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저명한 인사인 지인께 여쭤봤더니, 명확히 원칙상 어떤 것이 옳은지를 알려면 국립국어원에 문의해보라 조언해주셨다. 그 분의 개인적인 생각도 나와 일치하지만, 현행 표기법상 옳고 그름을 굳이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에 물어보라는 말.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찾아 뒤적여봤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국립국어원에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확인을 요청했다. (기존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을 찾아봤으나 panopticon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담당자는 파놉티콘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어 내가 그것이 제레미 벤담이라는 철학자가 사용한 원형감옥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고, 프랑스어가 영어로 옮겨지며 panopticon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몇분의 시간이 지난 후 담당자는 이것저것 뒤적이며 결론을 내려 설명해주는데,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옳은 것은, '파놉티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표기되어 있는 '팬옵티콘'은 어찌되는가. 그건 틀린 것이다. 고로 선생이 학생에게 말해준 틀린 이유 - 외래어 표기법상 판옵티콘이 맞다 - 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선생은 외래어 표기법이 어찌 되는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뒤적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고, 자신의 주장에 권위있는 근거를 대기 위해 알아보지도 않은 채 '외래어 표기법' 을 들먹이며 이것이 규정이라고 말했던 것일게다.

  표기법대로 한다고 해도 선생은 틀렸고, 학생의 답이 틀렸다고 말한 그 근거는 잘못된 것이므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 물론 표기법대로 하면 학생의 답인 '팬옵티콘'도 틀렸다. 그럼 진짜로 표기법상 옳다고 말해지는 '파놉티콘'만 맞게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올시다 라는게 내 생각이다. 나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생각은 위에서 밝힌대로 표기 가능한 널리 인정될만한 표기는 모두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내가 국립국어원에까지 문의해가며 정확히 알고자 했던 것은 그 선생이 말한 그 근거가 정말 맞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함이었고, 결국 알아본 결과 그 선생의 근거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네이버에서 이 질문을 진작에 봤다면, 답변을 해주겠지만, 아마도 상황이 종료된지 한참된 것 같아 이제 답변해줘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다.

  글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을 것이다. 왜 '파놉티콘'만이 표기법상 맞는가. 국립국어원 담당자는 외래어를 한글로 옮겨 표기할 때의 원칙이 있는데 영어의 경우 그 발음기호를 전환하는 법칙에 따른다고 했다. 네이버 사전에서 panopticon 을 검색하면 "pan·op·ti·con

 n. 원형 교도소[병원, 도서관》] 《한 곳에서 내부모두 있게 만든》" 이라고 해설이 달려있는데, 발음기호대로 한번 읊어보시길. '페납티칸'에 가깝다. 의심스러우면 스피커 볼륨을 크게 높이고 네이버 영어 사전에 나와있는 '발음듣기' 를 눌러보면 그 발음이 어떻게 말로 옮겨지는가를 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음기호상으로 '페납티칸'인 것이 왜 또 '파놉티콘'으로 옮겨지는가. 이것도 의문이 생겨 국립국어원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영어에서 중간에 나오는 o를 옮길 때에는 '아'가 아니라 '오'로 옮긴다고. 그리고 a는 '아'로 옮긴다고. 그래서 결국 '페납티칸'이 '파놉티콘'이 되는 것이었다. 영어원어 발음과 발음기호 따로, 국립국어원 원칙 따로, 교과서 따로, 단행본 따로, 모두 다 따로따로 놀고 있으니 이걸 통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널리 쓰이는 표현 몇가지 안되니, 기껏해야 세 가지 정도이니, 두루 함께 쓰자는게 내 결론이다. 너무 팍팍하게 살지 말자. 결국 유일하게 옳은 말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제레미 벤담의 편지글을 번역한 <파놉티콘>의 첫번째 각주 뿐이다.

  "프랑스어로는 파놉티크panoptique로 발음하지만 여기서는 벤담Jeremy Bentham이 쓰고 널리 알려진 파놉티콘panopticon으로 표기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rhk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옵티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발음이 의미를 충분히 분절(판+옵티콘)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라 '파놉티콘'으로 한다." (파놉티콘, 제레미 벤담, 신건수 역, 책세상, p.128.)

 참고 : 지난글 '팬옵티콘' (http://blog.aladin.co.kr/abraxas/196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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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제 사라마구와 외래어 표기법
    from 자유를 찾아서 2009-03-05 00:26 
      최근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몇 권 연속해서 읽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엄밀히 예전에 어디서 흘려들었던 건데 떠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아마도 사라마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에 신문에서 그에 관해 다루느라 알아보다 그것 자체가 기사가 된 경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땐 사라마구에도, 외래어 표기법에도 관심이 없었던 때라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관심이 생겼다. 지난해 왜 '파놉티콘'과 '판옵티콘'과 '팬
 
 
순오기 2008-05-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립국어원에 문의해 확실하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외국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어떤게 정확한지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말 표기도 제대로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현실이라...영어몰입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새 초등생들 우리말 우리글 교육보다 영어교육을 우선하니, 우리말 우리글 언제 제대로 배우려는지 참말 깝깝합니다!ㅠㅠ

이잘코군 2008-05-05 23:19   좋아요 0 | URL
국립국어원에서 일단 원칙에 의한 정해진 표기법을 알려주긴 했습니다만,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물어서 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외래어 표기 용례집이 업데이트되어 매달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원칙일 뿐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저는 판옵티콘, 파놉티콘, 팬옵티콘, 패놉티콘, 페놉티콘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 :)

마노아 2008-05-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시험본 서술형 답안 중에 '대한매일신보'를 '대한메일신보'로 쓴 학생들이 꽤 여럿 나왔어요. 녀석들은 '메일'이란 말이 더 익숙했기 때문에 불궈진 실수였겠죠. 맞게 해주었어요. 근데 '대한매일신문'이라 쓴 녀석은 틀리게 했죠. ( '')

이잘코군 2008-05-05 23:18   좋아요 0 | URL
이 경우는 좀 다르지 않나 싶어요. '매일'과 '메일'은 엄연히 다른 단어인데.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게다가 '대한매일신보'는 하나의 고유명사잖아요. -_- 이건 틀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_-a '대한매일신문'이 '대한메일신보'보다는 더 가까워보이는데.

마노아 2008-05-06 23:23   좋아요 0 | URL
메일은 맞춤법이 틀린 것이고, 신문은 이름을 틀리게 썼다고 판단해서 그랬어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3년 6월
품절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적 정의와 선을 중시하는 반면, 세계화주의는 시장 질서와 자본의 자유 이동을 강조한다.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세계시민주의가 인간은 그들이 세계 어디에 살든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윤리적 견지의 세계주의를 강조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세계화주의는 윤리적으로 가치 중립적인(사실은 '비윤리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자본 주도적인 성격을 노출하고 있지만, 여하튼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해서) 태도를 표명한다. (역자 오인영)-11쪽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다. 인간은 인류적 질서보다 더 협소한 정치적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정치적 질서 안에서 공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주로 제기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동료-시민의, 즉 동일한 질서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결코 임의적인 일이 아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자유주의가 국가를 강조한다는 세계시민주의자들의 비판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즉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찬양하는 문화적 다양성은 국가들의 실재의 복수성에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 -54쪽

국가는 원래부터 도덕적 문제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항상 도덕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강제적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규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국가 제도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근대인의 수많은 목적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남용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홉스가 생각했듯이, 국가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공인된 강제형식을 독점해야만 하고, 그러한 권한의 행사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조금도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포스트-식민 사회들에서조차도,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5쪽

인간은 소규모로 사는 것이 가장 낫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나라, 도시, 거리, 사업, 기능, 직업 및 가족 등도 공동체로서, 또한 인류적 지평보다는 협소하지만 도덕적 관심의 영역으로는 더 적절한 수많은 동심원의 일부로서 옹호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자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국경 안에서나 국경을 초월하여 충분히 연대할 수 있는 민주 국가에서 애국적 시민이 되어 살아갈 권리를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세계시민주의자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6쪽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좋은 시민으로써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세계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에서 특수한 이 지역, 저 지역, 이 계곡, 저 해안, 이 가족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애착은 지역에 대한 애착에서 시작하며, 그 이후에나 밖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세계시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런 점들을 무시하게 되면 종착지가 없는, 모국에서도 세계에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위험에 곧바로 빠질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소란스러운 다문화적 정치가 주는 교훈이다. 즉 미국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ㅁ너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폴란드계 미국인 혹은 유대계 미국인이나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타고난 시민으로서 존엄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자신의 지역 공동체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벤자민 R 바버)-62쪽

보편주의적 견해나 한계를 설정한 견해 모두 인간의 생존과 안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별 생각 없이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여 폐기할 수 없다는 시지윅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가 언급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의무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모든 사회와 도덕적 전통이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소규모일지라도 내적 지지와 충성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두 견해의 지지자들은 최소한 그러한 약간의 의무가 생존에 필수적인 가치라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물론 더욱 좁게 한정된 의무가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빚을 수 있는 마찰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두 견해의 주창자들 대부분은 살인, 약속의 파기 및 사기 등에 있어서는 모든 동심원의 모든 경계를 초월해 유지되어야 할 어떤 금기가 있으며, 심각한 긴급 상황에서는, 예컨대 지진 이후에는 경계를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국내의 요구들에 우선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시실라 벅)-70쪽

애국주의는 주권 국가가 국제 사회를 조직하는 기초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권은 자연스럽게 교육, 사회화, 포부 및 충성이 지향할 방향의 기초로서의 국가주의 의식에 주어진다. 이런 식의 방침은 영토상의 주권 국가가 어느 정도 자율성과 일차성을 갖는다고 가정하는데, 기실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가 다시 존재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조직이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 큰 구조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그러한 국가의 자율성과 일차성은, 도전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양한 유형의 지방화와 세계화에 의해서, 특히 복잡한 형식의 경제적, 전자적, 표의적인 통합에 의해서 중요하고 누적적인 타협이 강요되거나 심지어 대체되고 있다. (리처드 폴크)-87쪽

세계시민주의적인 견해는 명백히 세계적 차원의 윤리와 인본주의를 갖고 있지만, 급속하게 경계를 초월해서 경험을 통합하고 있는 세계화 경향들과 충분히 구별되지도 않거니와 그것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현재 통화 딜러와 카지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초국적 법인과 은행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시장 주도 세계화의 파괴적 도전에 대한 대처 없이, 환상적인 세계시민주의를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기획하는 것은 현대적 형태의 흐리멍덩한 순진무구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윤리적으로 결함 있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 및 세계를 전체로 파악하는 인식에 담긴 윤리적이고 통찰력 있는 내용을 최소화시키는 법을 어떤 식으로든 제정하려는 세계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땅히 결합되어야만 한다. (리처드 폴크)-90-91쪽

무엇보다 세계시민주의는 부모, 조상, 가족, 인종, 종교, 유산, 역사, 문화, 전통, 공동체, 국적 등과 같이 생명을 주는 기존의 사실들을 애매하게 만들고, 심지어 부정한다. 그것들은 개인의 '우연적인' 속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유영하는 자율적인 개인들로서 세계에 편입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간으로,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충분히 형성시키는 모든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완전히 갖추고서 세계로 유입된다. 정체성이란 우연도, 문제도, 그리고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의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도중에 선한 동기에서 이런 소여의 어느 한두가지를 배제하거나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게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정체성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기를 갈망하는 '변화무쌍한 자아'는 자신의 국적을 부인하는 사람이 국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정체성 없는 자아이다.(거트루드 힘멜파브)-114쪽

자기 문화의 업적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은 다른 문화의 업적에 대해서도 별로 가치를 부여할 것 같지 않다. 종교가 없는 학생은 다른 사람의 종교적 헌신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영웅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웅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을 경멸하기 십상이다. 어린이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우선 가치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중략) 그 대신에 어린이들을 '세계시민'이 되도록 교육하면, 아마도 그들은 십중팔구 애국자도 세계시민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세계 전역에서 실재하는 결함투성이의 개인과 문화들을 포용할 줄 모르는 추상과 이데올로기의 애호가가 될 것이다. (중략) 그런 교육은 고결한 세계시민주의를 고무시키는 영감이 아니라 자칫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친밀한 사람들을 덜 사랑한다고 해서 소원한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클 W 매코넬)-118-120쪽

나에게는 '세계시민'이 아니라, 바로 그 누군가가 동료이며, 무덤까지 함께 갈 동반자라는 사실이 도적적으로 중요하다. 내 생각에, 그것은 우리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견해에 호소하고, 다른 모든 인간과의 공감에 호소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잠재력'에 호소한다. 그 잠재력은 실제로 보편적일 뿐 아니라, 내가 속해 있고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 시민'은 언젠가는 그런 유의 도덕적 무게를 지닐 것이고, 마사 너스봄도 새로운 도덕적 통찰의 예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힐러리 퍼트넘)-137-138쪽

"만일 누군가가 내일 새끼손가락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고 하면, 그는 오늘 밤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억 명의 형제들이 잔해 위에서, 자신의 그 하찮은 불행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저 객체로 보일뿐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파멸 위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잘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그들을 본 적이 없다면. 그러므로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인류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 닥친 하찮은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수억 명의 형제 인류의 목숨을 희생시키려고 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 (아마티아 센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160쪽

우리에게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둘 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지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동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전체 인류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큰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 강력한 공통의 귀속 의식 없이는 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사업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8-169쪽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국가들이 꼭 민주적인 국가들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계급 제도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국민 동원을 요구한다. 동원은 공통의 정체성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선택권은, 사람들이 공통의 정체성에 입각한 동원에 호응할지 호응하지 않을지 여부에 이쓴 것이 아니라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정체성들 중에서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정체성(들)이 어느 것인지에 놓여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세계시민주의적인 연대에 좀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다. 문명적으로 개화된 세계시민주의를 위해 가끔 벌일 수밖에 없는 전쟁은, 바로 이런 정체성들 사이에서 일언아는 것이지 모든 애국주의적 정체성들을 파기하려는 불가능한(가능하다해도, 자멸적일 수밖에 없는) 시도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9쪽

세계 시민권에 대한 너스봄의 견해보다는 그녀의 동심원 이미지가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근본적인' 충성들 가장 바깥의 원에 두거나 두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의 충성은 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자를 관통해서 가장 바깥쪽 원에 도달하는 방식을 이용해 매개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으 안쪽의 원에 대한 구체적이고 호의적이며 마음을 끄는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설명을 요구한다. 그런 후에 안쪽의 원을 바깥으로 펼치는 것 못지않게 바깥쪽의 원을 안으로 그려넣으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마이클 왈쩌)-176쪽

진정 세계 시민으로 처신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므로 세계 국가의 부재는 세계 시민적인 행위의 장애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계시민주의 전통에 속하는 주요 사상가 어느 누구도, 자신과 자기 가족이 속해 있는 지역 및 국가에서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 국가는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의 기본 조건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가족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시민주의자는 특정 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특성 지역이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분별 있게 선을 행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사 너스봄)-187-188쪽

우리는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애피아가 말하듯이, 세계시민주의적인 이상에는 인간의 문화, 언어, 생활방식의 다양성에 따른 실제적인 즐거움이 내포되어 있다. 이 다원주의는 소위 '좋은 것보다는 올바른 것의 우위'를 주장하도록 세계시민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을 자극한다. (마사 너스봄)-189쪽

세계시민의식은 그런 경우, 우리 각자의 상상에 엄격한 요구를 부과한다. 확실히 상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하듯이,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약하고 지속되기 어려운 관념이다. 만일 세계 시민권을 변덕스러운 일상적 반성에 맡겨놓는다면, 우린는 최상의 이념을 제도화하려고 할 때보다 더 제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력은 개인들의 동등한 가치를 가능한 한 최대로 제도화할 수 있는 법률을, 특히 입헌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일레인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법률은 상상력에서 동력을 얻어야 하며, 사람들이 우둔할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률 조항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서도 세계 시민권을 계발해야 한다. 나는 스캐리와 몇몇 사람이 제시한 이유에서, 상상에 의거한 문학 작품들이 그런 계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마사 너스봄)-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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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8-05-0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흥미롭군요..

이잘코군 2008-05-05 09:50   좋아요 0 | URL
나온지 꽤 된 책이고, 그냥그냥 묻혀버린 책인데, 주제가 끌리시죠. ^^ <보스턴 리뷰>라는 잡지를 통해 이루어진 미국 철학자, 작가, 사회학자들 간의 논쟁을 싣고 있습니다.
 


  얼마 전 짭짤한 알바가 들어왔었다. 그 분을 통해 직접 들어온 건 아니고, 의뢰를 받은 친구가 나보고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온 것인데, 흔히 말하는 대필. 나보고 대필 작가가 되어달라는 건데, 거창하게 책을 내는 건 아니고, 직장과 대학을 동시에 다니는 어떤 직장인의 과제물을 대신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격은 무려 십만원. 서평 하나 쓰고 십만원이면 꽤나 짭짤한 금액이다. 너무 잘써줄 필요도 없다고 하니 그냥 평소에 쓰던대로 대충(?) 쓰면 되는건데, 아마 수년전이라면 했을 것이다. 글 한편 쓰고 그만한 돈이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하므로.

  그런데, 거절했다.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물론 내가 안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알바를 넘길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직장인의 서평 레포트는 십만원과 거래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여지고 제출되는 것이다. 그럼 결국 어떻게든 그리 될테니 내가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고백하건대, 예전에 나는 술자리에서, 함께 밴드를 하던 똑같이 직장과 대학을 병행하던 동생의 부탁에 못이겨 약속을 해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기존에 써놨던 서평 두 개를 펌질하겠다는 거였는데, 이를 허락해버렸다.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번복하려면 할 수도 있었으나, 내겐 이미 성립된 약속을 뒤집는 것이 번복하는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결국 내 서평 두 개를 줘버렸다. 후회했다. 그런 약속을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은 나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안하겠다고, 못주겠다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하고 - 주변에 서평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거 같으므로 달리 도움을 요청할 길이 없었을듯 - 결국 본인이 시간을 내어 어떻게든 제출했을텐데, 내가 흔쾌히 약속해버림으로써 나의 양심을 배반하고, 그 사람의 양심을 쉽게 어기도록 만들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경우야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더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던 부정행위를 대학에 와서 하기도 했었다. 결국 시험에 있어 도움을 받진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많이들 하니까, 그런 식으로들 시험을 보니까, 또 조교들도 알면서 다 봐주는 눈치니까, 나도 해봤던건데, 이건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리해도 나는 그리하면 안 되는 거였다. 딱히 또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야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는 친구집에서 가로 3센티, 세로 2센티 정도의 조그만 오토바이 모형 장난감을 훔친 적도 있었다. 나중에 후회했다.

  어제 만난 학교 선생님은 최근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해줬다. 시험 중 한 녀석이 부정행위를 했고, 감독샘이 이를 적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쪽지만 압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쪽지를 해당 과목 기간제 샘한테 넘겨주고 일을 덮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근데 일을 덮으려면 본인만 알고 있으면 되는데 과목담당 기간제 샘에게까지 알린 것이다. 물론 덮어선 안 되는거다. 그 기간제 샘은 학교일이 처음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그런데 내가 만난 그 샘이 이게 어떤 사건인지를 명확히 짚어준 뒤에야 해당 학생에게 0점을 주고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대개의 사건들은 주어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발생하지 않을까. 대구의 초등학교 집단 성폭행 사건도 그렇고 - 듣기로는 백명에 육박한다지 -  걸릴리도 없고, 걸려도 별 문제도 되지 않을테지만, 내게 들어왔던 알바 제의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서로 상부상조(?)함으로써 성립되고 행해진다. 나름 원칙이란 것이 있고,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삼십년을 뒤지면 나올게 더 있을 것이다. 꾸준히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쉽게 받아들이거나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해서는 안 될 행위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십만원은 누가 가져갔을라나. ( '')  (미련을 갖는게 아니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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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5-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주 멋진 아프락사스 님이십니다.
그나저나 십만원은 누구에게?? 3=3=3

승주나무 2008-05-05 03:42   좋아요 0 | URL
알라딘을 통해서 제게 오만원이 왔더군요.
또 자랑질(퍼퍼퍽!!!) ㅋㅋ

이잘코군 2008-05-05 09:50   좋아요 0 | URL
뭐뭐뭡니까. 승주나무님 리뷰당선되신건가요? 확인해봐야지.

파란여우 2008-05-0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아녜요 -.-
ㅋㅋ

이잘코군 2008-05-0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 글쎄요. 십만원은 누구에게 갔는지는 저는 잘... 저는 아니라는. 진짜루 아니라는... -_-a
파란여우님 / 파란여우님이 쓰시면 바로 걸립니다. 대충써도. :)

302moon 2008-05-0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가 나와 깜짝(;) 양심을 속이지 않은 것, 멋져요. 박수, 짝짝짝.(웃음)

이잘코군 2008-05-04 23:27   좋아요 0 | URL
박수받자는건 아니고 -_-a 과거사 고백이라고나 할까요.

순오기 2008-05-0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녁에 이걸 읽고 추천만 하고 댓글은 못 달았어요. 몇몇 후배나 친구의 리포트에 도움 준 적도 있었고, 아예 내 걸 가져가서 안 가져 온 사람도 있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서 찔렸거든요. 물론 돈을 주고 받고 해 본 적은 없어요. 하여간 양심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야죠~ 잘 하셨어요!!^^

프레이야 2008-05-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얼마전 제 경우가 생각나요.
'원칙대로 하길 원한다'는 제 말에 어떤 엄마가 계속 씹어대던군요.
자기는 원칙대로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못박더군요. 그게 휴머니즘은 아닐텐데요.
전, 원칙대로 되길 원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징계가 가해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자필로 서명했지요. 인간적으로 많이 생각한 나름의 배려였어요.
그런대도 제가 '~ 원한다'는 제 원칙에 대해 뭐라고 따지다니 얼마나 화가 나던지요..
아무튼 원칙대로 잘 하셨구요. 서평 빌려드린 건 좀 별로인 것 같아요.ㅎㅎ
참, 저도 하나 고백해요.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컨닝 시도했어요.
사회 시험시간이었는데요, 결국 제대로 못 보고 컨닝실패했어요.

이잘코군 2008-05-0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 사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지나가는 일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가만히 떠올려보면 더 있죠. ^^ 앞으로 안하면 되는거죠.

혜경님 / ^^ 서평 빌려준 건 그렇죠. -_-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해도 약속이었던지라. 혜경님은 그래도 커닝을 거의 안하셨네요. 전 오히려 초중고에서는 한번도 안하고 - 초등학교 때 성적에 안들어가는 시험이라고 보여줬다가 걸려서 혼난 적은 있어요 아주 눈물 쏙 빠지게 - 대학에 와서 그랬다는게 더 부끄럽군요. -_-
 


  얼핏 듣기로 유럽 어딘가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는데 한국에서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영화 <테이큰>을 봤다. 아마도 흥행의 원인은 최근 발생한 몇 건의 납치사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용은 전혀 모르고 단순히 '납치사건을 다룬 액션영화' 정도로 알고 봤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면서도,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경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액션물이랄까. 액션물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있는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단순 액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없는건, 나의 내면의 분노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하고픈 말은, 쌍욕이었다. 개X러새X 같은. -_- 차마 온전히 단어를 다 옮기지는 못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아저씨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80년대식 완전 무술을 선보이시는데, 내가 <람보>나 <다이하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다이하드>는 그래도 아저씨가 많이 맞고 피흘리고 고생하니깐 완벽한 1인 액션으로 보기는 어렵다.) 요즘은 홀로 펼치는 '주먹구구식 만능 액션'보다는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머리쓰며 지능적으로 복수하고 처벌하는 '복합 지능형 액션'이 먹히는데 - 가령 <본 얼티메이텀>시리즈 같은 - 무대뽀 액션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모을 생각을 했다니.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정말 주먹구구식 액션이긴 했지만,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한 주먹에 아홉명씩 떨어져나가는' 액션보다는 아저씨에게 감정이입되어 그 분노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게 되더라. 이 영화를 보면서 작년에 봤던 <호스텔>이 떠올랐는데, 범죄의 대상을 물색하는 방식이 일치한다. 갓 여행 온 파릇파릇한 이쁘장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절을 미끼삼아 꼬드겨내고 납치를 감행, 마약을 수시로 주사해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창녀로 만들거나, 돈 많은 부자에게 경매를 통해 팔아넘긴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이런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말 충분히,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어디 신문에 나오고 티비 뉴스에 나와야만 실제로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소위 말하는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사실만을 현실에서 실제 발생하는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매일 새로운 뉴스거리가 쏟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사실. 세상엔 정말 개썅욕을 퍼부어도 부족한 놈년들이 가득하다. 뉴스는 오히려 충분히 드러나고 보여지는 사건만을 다루고 있을 것.

  작년이었던가. 동해바단지 서해바단지 모르겠는데, 젊은 남녀 둘이 배를 타고 어딘가를 들어가는데, 배 주인인 할아버지가 남자는 물에 빠뜨려버리고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였다는 기사를 본 거 같다. 비단 해외 여행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납치-매춘' 사건이라는 사실. 어떤 개인의 잘못된 성적 욕구나 조직적인 범죄나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한 명이 당하느냐, 백 명이 당하느냐의 차이랄까. 공리주의자 벤담이라면 한 명이 당하는 것과 백 명이 당하는 것을 엄연히 일 대 백으로 나누어 후자를 더 큰 죄악으로 간주하겠지만,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는 자체에 우리는 분노해야 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제일 먼저 내뱉고 싶은 말은 쌍욕이었고, 동시에 아저씨가 결국 주먹구구식 액션으로 모두를 평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깔끔하지 않은건, 그 아저씨가 구하지 못한 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딸들이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딸만 구한 것도 저 상황에선 대단해보이지만, 그럼 남은 여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맹자라면 우선 다급한 상황에서 내 딸이라도 구해보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묵자라면 남은 이들을 두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 자신이 죽는다해도. 어떻게 보면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겠지만, 남은 이들이 끝내 마음에 밟힌다.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분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권장하고 지속적으로 키워야 한다. 미친소 수입이나 의료보험 민영화나 대운하 건설 같은, 영화 속 인신매매 같은 이따위 것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키워야 한다. 분노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테이큰>. 꼭 봐야 할 영화다. 보고 부정의한 짓거리에 대한 분노를 키워야 한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분노를 표출해야 할 사안이 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는 감정적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야 한다. 분노하고 욕을 퍼부어대고 부정의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p.s. 바람직한 분노를 키울 수 있는 개봉 영화 : <식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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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5-04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노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마샬아츠"를 열심히 수련해야 겠습니다.

이잘코군 2008-05-04 10:13   좋아요 0 | URL
메피님 그건 머에요? 또 새로운 숙제인거에요? :)

Mephistopheles 2008-05-04 19:43   좋아요 0 | URL
저기 무술의 일종이에요...숙제라고 하기엔 좀 과격하다는...ㅋㅋㅋ

이잘코군 2008-05-04 21:1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마샬아츠란 무술이 있군요. 이름이 멋져보이는데요. 얼마나 세길래. 저는 싸움엔 완전 젬병이라는.

순오기 2008-05-04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가진 부모 마음이 딱 그마음입니다. 시사회때 남편과 같이 보고 주위분들에게 많이 권했어요. 영화 '식코'는 아줌마들 동원해 택시 두대로 달려가 봤고요. 영화를 통해 문제의식을 깨우는 것, 정말 필요해요.
어제 지식e 베스트에서 식코도 편집해서 나오기에, 게임하던 아들녀석도 중지시키고 보게 했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야겠지요.

이잘코군 2008-05-04 10:15   좋아요 0 | URL
분노할 것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분노를 바람직하지 못한양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때나 이성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성은 판단할 때나 쓰는 것이고, 대응할 땐 최대한 감정적이 되어야죠. 그 대상이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대라면 더더욱.

Jade 2008-05-0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촛불문화제 전 집회에서 어떤 아주머니 분이 이런 농담을 하셨어요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 천명을 죽이면 영웅, 다 죽이고 이명박 혼자 살아남으면....?

나는 전설이다!"

뜬금없이 생각나서요 ㅋㅋ


이번에 표출된 건강한 분노를 보며 아직 우리사회가 역동적이라는 희망을 느꼈어요! ㅎㅎ

balmas 2008-05-0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를 권장함, 아주 멋진 표어네요. ^^

이잘코군 2008-05-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 그 분 혼자 영화 찍으려나 봅니다. -_- 그래도 스텝은 확보해야할텐데 ( '')
발마스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