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옵티콘
약 한 달 전쯤 어느 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풀어낸 바 있는데, 의문이 생겨 틈이 나는대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었다. 예전에 쓴 글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어느 고등학교 시험에 정답을 '판옵티콘'으로 써야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팬옵티콘'으로 적어냈고, 선생은 이것을 틀렸다고 채점했다. 학생이 네이버에 팬옵티콘이 틀린거냐고 물었고,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해준 것 같진 않다. 이 내용을 가지고 대학원 수업에서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과 교수님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팬옵티콘'이 더 명확하다 했고, 선생님들은 교과서에 '판옵티콘'으로 나왔으니까 판옵티콘'만' 맞게 해야 한다 했다.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은, 교수님쪽에 가까웠는데, 'Panopticon'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가능한 모든 단어를 정답으로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판옵티콘도 맞게, 학생이 쓴 팬옵티콘도 맞게, 단행본 제목으로 나와있는 파놉티콘도 맞게, 더불어 많이 쓰이지 않지만 페놉티콘도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정답만이 정답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교육은, 공부는, 반드시 학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학생이 관심이 있어 접한 단행본이나 논문, 혹은 그밖의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접할 수 있고, 그것이 별 무리없이 쓰여진다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정도가 지난 글의 요지였는데,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추후 조사를 더 해보았다. 일단 국회도서관에서 판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 관련 논문과 학술지가 꽤 나오고, 파놉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도 수적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팬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는 수적인 열위를 보이긴 했지만, 역시 논문과 학술지에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공식용어였다. 심지어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페놉티콘으로도 관련 논문이 한 건 검색되었다. 이쯤되면 네 가지 용어에 대해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현실을 감안해본다면.
수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해서 학자들간에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적인 우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실상 언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은 그것을 쓰는 대중들의 편리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고, 네 가지 다양한 표현들이 학계에서 혹은 대중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무리없이' 사용된다면 모두 다 맞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파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팬옵티콘으로 말했을 때, 페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경우라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이래도 약간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편집, 교열교정, 국어 계열쪽으로 학위를 가진 전문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저명한 인사인 지인께 여쭤봤더니, 명확히 원칙상 어떤 것이 옳은지를 알려면 국립국어원에 문의해보라 조언해주셨다. 그 분의 개인적인 생각도 나와 일치하지만, 현행 표기법상 옳고 그름을 굳이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에 물어보라는 말.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찾아 뒤적여봤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국립국어원에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확인을 요청했다. (기존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을 찾아봤으나 panopticon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담당자는 파놉티콘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어 내가 그것이 제레미 벤담이라는 철학자가 사용한 원형감옥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고, 프랑스어가 영어로 옮겨지며 panopticon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몇분의 시간이 지난 후 담당자는 이것저것 뒤적이며 결론을 내려 설명해주는데,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옳은 것은, '파놉티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표기되어 있는 '팬옵티콘'은 어찌되는가. 그건 틀린 것이다. 고로 선생이 학생에게 말해준 틀린 이유 - 외래어 표기법상 판옵티콘이 맞다 - 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선생은 외래어 표기법이 어찌 되는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뒤적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고, 자신의 주장에 권위있는 근거를 대기 위해 알아보지도 않은 채 '외래어 표기법' 을 들먹이며 이것이 규정이라고 말했던 것일게다.
표기법대로 한다고 해도 선생은 틀렸고, 학생의 답이 틀렸다고 말한 그 근거는 잘못된 것이므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 물론 표기법대로 하면 학생의 답인 '팬옵티콘'도 틀렸다. 그럼 진짜로 표기법상 옳다고 말해지는 '파놉티콘'만 맞게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올시다 라는게 내 생각이다. 나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생각은 위에서 밝힌대로 표기 가능한 널리 인정될만한 표기는 모두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내가 국립국어원에까지 문의해가며 정확히 알고자 했던 것은 그 선생이 말한 그 근거가 정말 맞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함이었고, 결국 알아본 결과 그 선생의 근거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네이버에서 이 질문을 진작에 봤다면, 답변을 해주겠지만, 아마도 상황이 종료된지 한참된 것 같아 이제 답변해줘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다.
글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을 것이다. 왜 '파놉티콘'만이 표기법상 맞는가. 국립국어원 담당자는 외래어를 한글로 옮겨 표기할 때의 원칙이 있는데 영어의 경우 그 발음기호를 전환하는 법칙에 따른다고 했다. 네이버 사전에서 panopticon 을 검색하면 "pan·op·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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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 원형 교도소[병원, 도서관 《등》] 《한 곳에서 내부를 모두 볼 수 있게 만든》" 이라고 해설이 달려있는데, 발음기호대로 한번 읊어보시길. '페납티칸'에 가깝다. 의심스러우면 스피커 볼륨을 크게 높이고 네이버 영어 사전에 나와있는 '발음듣기' 를 눌러보면 그 발음이 어떻게 말로 옮겨지는가를 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음기호상으로 '페납티칸'인 것이 왜 또 '파놉티콘'으로 옮겨지는가. 이것도 의문이 생겨 국립국어원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영어에서 중간에 나오는 o를 옮길 때에는 '아'가 아니라 '오'로 옮긴다고. 그리고 a는 '아'로 옮긴다고. 그래서 결국 '페납티칸'이 '파놉티콘'이 되는 것이었다. 영어원어 발음과 발음기호 따로, 국립국어원 원칙 따로, 교과서 따로, 단행본 따로, 모두 다 따로따로 놀고 있으니 이걸 통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널리 쓰이는 표현 몇가지 안되니, 기껏해야 세 가지 정도이니, 두루 함께 쓰자는게 내 결론이다. 너무 팍팍하게 살지 말자. 결국 유일하게 옳은 말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제레미 벤담의 편지글을 번역한 <파놉티콘>의 첫번째 각주 뿐이다.
"프랑스어로는 파놉티크panoptique로 발음하지만 여기서는 벤담Jeremy Bentham이 쓰고 널리 알려진 파놉티콘panopticon으로 표기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rhk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옵티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발음이 의미를 충분히 분절(판+옵티콘)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라 '파놉티콘'으로 한다." (파놉티콘, 제레미 벤담, 신건수 역, 책세상, p.128.)
참고 : 지난글 '팬옵티콘' (http://blog.aladin.co.kr/abraxas/196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