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듣기로 유럽 어딘가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는데 한국에서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영화 <테이큰>을 봤다. 아마도 흥행의 원인은 최근 발생한 몇 건의 납치사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용은 전혀 모르고 단순히 '납치사건을 다룬 액션영화' 정도로 알고 봤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면서도,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경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액션물이랄까. 액션물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있는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를 단순 액션 영화로 받아들일 수 없는건, 나의 내면의 분노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하고픈 말은, 쌍욕이었다. 개X러새X 같은. -_- 차마 온전히 단어를 다 옮기지는 못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아저씨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80년대식 완전 무술을 선보이시는데, 내가 <람보>나 <다이하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다이하드>는 그래도 아저씨가 많이 맞고 피흘리고 고생하니깐 완벽한 1인 액션으로 보기는 어렵다.) 요즘은 홀로 펼치는 '주먹구구식 만능 액션'보다는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머리쓰며 지능적으로 복수하고 처벌하는 '복합 지능형 액션'이 먹히는데 - 가령 <본 얼티메이텀>시리즈 같은 - 무대뽀 액션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모을 생각을 했다니.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정말 주먹구구식 액션이긴 했지만,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한 주먹에 아홉명씩 떨어져나가는' 액션보다는 아저씨에게 감정이입되어 그 분노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게 되더라. 이 영화를 보면서 작년에 봤던 <호스텔>이 떠올랐는데, 범죄의 대상을 물색하는 방식이 일치한다. 갓 여행 온 파릇파릇한 이쁘장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절을 미끼삼아 꼬드겨내고 납치를 감행, 마약을 수시로 주사해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창녀로 만들거나, 돈 많은 부자에게 경매를 통해 팔아넘긴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이런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말 충분히,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광범위하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어디 신문에 나오고 티비 뉴스에 나와야만 실제로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소위 말하는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사실만을 현실에서 실제 발생하는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매일 새로운 뉴스거리가 쏟아진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사실. 세상엔 정말 개썅욕을 퍼부어도 부족한 놈년들이 가득하다. 뉴스는 오히려 충분히 드러나고 보여지는 사건만을 다루고 있을 것.
작년이었던가. 동해바단지 서해바단지 모르겠는데, 젊은 남녀 둘이 배를 타고 어딘가를 들어가는데, 배 주인인 할아버지가 남자는 물에 빠뜨려버리고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였다는 기사를 본 거 같다. 비단 해외 여행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납치-매춘' 사건이라는 사실. 어떤 개인의 잘못된 성적 욕구나 조직적인 범죄나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한 명이 당하느냐, 백 명이 당하느냐의 차이랄까. 공리주의자 벤담이라면 한 명이 당하는 것과 백 명이 당하는 것을 엄연히 일 대 백으로 나누어 후자를 더 큰 죄악으로 간주하겠지만,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는 자체에 우리는 분노해야 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제일 먼저 내뱉고 싶은 말은 쌍욕이었고, 동시에 아저씨가 결국 주먹구구식 액션으로 모두를 평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깔끔하지 않은건, 그 아저씨가 구하지 못한 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딸들이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딸만 구한 것도 저 상황에선 대단해보이지만, 그럼 남은 여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맹자라면 우선 다급한 상황에서 내 딸이라도 구해보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묵자라면 남은 이들을 두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 자신이 죽는다해도. 어떻게 보면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겠지만, 남은 이들이 끝내 마음에 밟힌다.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분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권장하고 지속적으로 키워야 한다. 미친소 수입이나 의료보험 민영화나 대운하 건설 같은, 영화 속 인신매매 같은 이따위 것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키워야 한다. 분노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테이큰>. 꼭 봐야 할 영화다. 보고 부정의한 짓거리에 대한 분노를 키워야 한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이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분노를 표출해야 할 사안이 있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는 감정적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야 한다. 분노하고 욕을 퍼부어대고 부정의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p.s. 바람직한 분노를 키울 수 있는 개봉 영화 : <식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