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험에서 어떤 학생이 답을 '팬옵티콘'으로 적었다가 틀렸다고 한다. 원래 정답은 '판옵티콘'이었던 것. 이걸 맞게 해야 할까, 틀리게 해야 할까? 난 맞게 해야 한다고 본다. 당연하게도. 한 지인을 통해 대학원 수업 중 이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들었다.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맞게 해야 한다와 틀리게 해야 한다로 대립했다고 한다. 나에게 이 작은 소란(?)을 전해준 지인도 틀리다, 는 입장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길 경우 한국어 표기법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표기법에 따르지 않았으니 당연히 틀리다, 라는 것이요, 둘째, 이걸 맞게하면 다른 것도 다 맞게 해야하기 때문에 답안 수정 작업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당장 인터넷 서점 검색창이나 네이버에서 '팬옵티콘'을 검색해보라. 네이버에선 당당히 네이버 사전에 의거해 팬옵티콘을 우리가 알고 있는 '판옵티콘'과 같은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더불어 주목받는 시인 김경주의 시 제목 '팬옵티콘'이 나온다. 이어서 아래로 내려오면 문제의 질문이 나와있다. 어떤 학생이 네이버 지식인에 올린 질문 내용인데, 팬옵티콘이 맞냐, 페놉티콘이 맞냐, 어쩌구 저쩌고 하면서 질문을 올렸고 답변자는 '팬옵티콘'이 맞는 발음이겠죠, 하고 답변을 올렸다. 답하는 사람마다 달리 말하니 도대체 무엇을 답으로 해야 할 것인가. 최근 책세상 문고에서 문제 단어의 원저자 제레미 벤담의 책이 번역되었는데, 그 제목은 '파놉티콘'이다.
어이쿠. 점점 많아지고 있다. 책세상 번역서는 파놉티콘, 선생은 판옵티콘, 네이버 지식인은 팬옵티콘, 기타 항목으로 페놉티콘도 있다. -_- 뭘 맞게 하고 뭘 틀리게 할 것인가. 너무 많아서 수정 작업이 힘드니 딱 하나 '판옵티콘'만 맞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외국어를 한글로 옮기는 표기상의 문제이고, 그 의미는 모두 같으니 다 맞게 해야 하는가. 나는 후자를 지지하고 싶다. 위에 나온 모든 단어가 다 답이다. 'panopticon'을 한국어로 옮겼을 때 표기가능한 모든 단어를 답으로 해야한다고 본다. 학교에서는 정답지를 제출할 때 유사답안을 함께 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교사들이 협의하여 유사답안으로 가능한 모든 단어들을 한글로 표기해야 한다.
외국어를 한글로 옮길 때의 표기법은 분명 정해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표기법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할 기자들이나 출판관계자들도 역시 헷갈리며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판국이니,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윤리 시험을 치룬 고등학생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명확하게 하고 싶으면 교사는 시험문제지에 영어원어로 표기하시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_- 그럼 스펠링에 따라 빼먹거나 잘못 표기한 답은 틀리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orange 를 오렌지라고 하나, 오린지라고 하나, 오륀지라고 하나, 어륀지라고 하나, 어린쥐(이건 아닌가? -_-a) 라고 하나, 다 같은거 아니냐.
난 평소에 보통 '라디오헤드'라고 하는 걸 본토(?) 발음대로 '레디오헤드'라고 습관적으로 발음하고 표기하는데, 그 누구도 그것을 영국의 브릿팝 밴드 Radiohead 가 아닌 다른 걸 지칭하는 걸로 간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단 내가 말로 레디오헤드 라고 했을 때(너무 굴려서), 상대가 못 알아듣는 경우는 아주 가끔 있었어도. 영어를 못하는 나지만, 레디오헤드나 라디오헤드나 레이디오헤드나 다 같은 밴드를 지칭한다는 건 안다.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그렇게 융통성 없이 굴면 학생들은 살기 빡빡하다. 몰라서 그리 썼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 해도 그것이 벤담이 말한 원형감옥을 지칭하는 건 확실하다.
주관식 답안에서 어렴풋 했는데 찍은 답이 맞다면, 그 학생이 명확히 알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 썼으니깐 맞게 한다. 심지어 수학 주관식에서는 찍었는데 우연히 그게 답인 경우도 허다하다. 1,0,-1 이런게 답으로 잘 나왔다. 하물며 알고 팬옵티콘 이라고 쓴 학생을 틀리게 하는 건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배움은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머리를 열어두어야 한다. 학교 현장의 교육이 주입식, 지식암기형으로 가는 것도 모자라 맞는 답을 표기가 다르다 하여 틀리다고 한다면 학생들의 사고는 점차 닫혀갈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의 머리가 닫혀있다면 '열린 교육'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한다. 제발 융통성을 발휘하자.
나도 현장에 3년 있어봐서 시험 문제 낼 거 다 내봤고, 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도 받아봤다. 이의제기자의 말이 설득력 있다면 당연히 내가 고생스럽더라도 맞게 해줘야 한다. 심지어 시말서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교사가 정해둔 답만을 옳다고 한다면 아이들은 언제나 답이 뭐에요, 라는 질문 밖에는 던질 줄 모른다. 아이들 입에서 답이 뭐에요, 라는 질문이 아닌 각자가 생각하는 답을 내놓을 때 열린 교육은 시작된다. 답을 찾는 아이, 답을 찾는 사회는 암울하다. 아무리 열린 사고를 강조하고, 열린 과제를 던져줘봐야 아이들은 선생님만 빤히 바라보며 얼른 답을 말해주길 기다릴 뿐이다. 혹시 내가 쓴 답이 그 답이 아닐까 걱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