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3년 6월
품절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적 정의와 선을 중시하는 반면, 세계화주의는 시장 질서와 자본의 자유 이동을 강조한다.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세계시민주의가 인간은 그들이 세계 어디에 살든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윤리적 견지의 세계주의를 강조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세계화주의는 윤리적으로 가치 중립적인(사실은 '비윤리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자본 주도적인 성격을 노출하고 있지만, 여하튼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해서) 태도를 표명한다. (역자 오인영)-11쪽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다. 인간은 인류적 질서보다 더 협소한 정치적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정치적 질서 안에서 공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주로 제기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동료-시민의, 즉 동일한 질서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결코 임의적인 일이 아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자유주의가 국가를 강조한다는 세계시민주의자들의 비판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즉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찬양하는 문화적 다양성은 국가들의 실재의 복수성에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 -54쪽

국가는 원래부터 도덕적 문제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항상 도덕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강제적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규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국가 제도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근대인의 수많은 목적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남용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홉스가 생각했듯이, 국가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공인된 강제형식을 독점해야만 하고, 그러한 권한의 행사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조금도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포스트-식민 사회들에서조차도,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5쪽

인간은 소규모로 사는 것이 가장 낫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나라, 도시, 거리, 사업, 기능, 직업 및 가족 등도 공동체로서, 또한 인류적 지평보다는 협소하지만 도덕적 관심의 영역으로는 더 적절한 수많은 동심원의 일부로서 옹호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자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국경 안에서나 국경을 초월하여 충분히 연대할 수 있는 민주 국가에서 애국적 시민이 되어 살아갈 권리를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세계시민주의자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6쪽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좋은 시민으로써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세계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에서 특수한 이 지역, 저 지역, 이 계곡, 저 해안, 이 가족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애착은 지역에 대한 애착에서 시작하며, 그 이후에나 밖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세계시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런 점들을 무시하게 되면 종착지가 없는, 모국에서도 세계에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위험에 곧바로 빠질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소란스러운 다문화적 정치가 주는 교훈이다. 즉 미국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ㅁ너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폴란드계 미국인 혹은 유대계 미국인이나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타고난 시민으로서 존엄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자신의 지역 공동체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벤자민 R 바버)-62쪽

보편주의적 견해나 한계를 설정한 견해 모두 인간의 생존과 안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별 생각 없이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여 폐기할 수 없다는 시지윅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가 언급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의무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모든 사회와 도덕적 전통이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소규모일지라도 내적 지지와 충성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두 견해의 지지자들은 최소한 그러한 약간의 의무가 생존에 필수적인 가치라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물론 더욱 좁게 한정된 의무가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빚을 수 있는 마찰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두 견해의 주창자들 대부분은 살인, 약속의 파기 및 사기 등에 있어서는 모든 동심원의 모든 경계를 초월해 유지되어야 할 어떤 금기가 있으며, 심각한 긴급 상황에서는, 예컨대 지진 이후에는 경계를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국내의 요구들에 우선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시실라 벅)-70쪽

애국주의는 주권 국가가 국제 사회를 조직하는 기초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권은 자연스럽게 교육, 사회화, 포부 및 충성이 지향할 방향의 기초로서의 국가주의 의식에 주어진다. 이런 식의 방침은 영토상의 주권 국가가 어느 정도 자율성과 일차성을 갖는다고 가정하는데, 기실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가 다시 존재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조직이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 큰 구조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그러한 국가의 자율성과 일차성은, 도전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양한 유형의 지방화와 세계화에 의해서, 특히 복잡한 형식의 경제적, 전자적, 표의적인 통합에 의해서 중요하고 누적적인 타협이 강요되거나 심지어 대체되고 있다. (리처드 폴크)-87쪽

세계시민주의적인 견해는 명백히 세계적 차원의 윤리와 인본주의를 갖고 있지만, 급속하게 경계를 초월해서 경험을 통합하고 있는 세계화 경향들과 충분히 구별되지도 않거니와 그것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현재 통화 딜러와 카지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초국적 법인과 은행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시장 주도 세계화의 파괴적 도전에 대한 대처 없이, 환상적인 세계시민주의를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기획하는 것은 현대적 형태의 흐리멍덩한 순진무구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윤리적으로 결함 있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 및 세계를 전체로 파악하는 인식에 담긴 윤리적이고 통찰력 있는 내용을 최소화시키는 법을 어떤 식으로든 제정하려는 세계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땅히 결합되어야만 한다. (리처드 폴크)-90-91쪽

무엇보다 세계시민주의는 부모, 조상, 가족, 인종, 종교, 유산, 역사, 문화, 전통, 공동체, 국적 등과 같이 생명을 주는 기존의 사실들을 애매하게 만들고, 심지어 부정한다. 그것들은 개인의 '우연적인' 속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유영하는 자율적인 개인들로서 세계에 편입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간으로,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충분히 형성시키는 모든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완전히 갖추고서 세계로 유입된다. 정체성이란 우연도, 문제도, 그리고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의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도중에 선한 동기에서 이런 소여의 어느 한두가지를 배제하거나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게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정체성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기를 갈망하는 '변화무쌍한 자아'는 자신의 국적을 부인하는 사람이 국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정체성 없는 자아이다.(거트루드 힘멜파브)-114쪽

자기 문화의 업적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은 다른 문화의 업적에 대해서도 별로 가치를 부여할 것 같지 않다. 종교가 없는 학생은 다른 사람의 종교적 헌신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영웅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웅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을 경멸하기 십상이다. 어린이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우선 가치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중략) 그 대신에 어린이들을 '세계시민'이 되도록 교육하면, 아마도 그들은 십중팔구 애국자도 세계시민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세계 전역에서 실재하는 결함투성이의 개인과 문화들을 포용할 줄 모르는 추상과 이데올로기의 애호가가 될 것이다. (중략) 그런 교육은 고결한 세계시민주의를 고무시키는 영감이 아니라 자칫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친밀한 사람들을 덜 사랑한다고 해서 소원한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클 W 매코넬)-118-120쪽

나에게는 '세계시민'이 아니라, 바로 그 누군가가 동료이며, 무덤까지 함께 갈 동반자라는 사실이 도적적으로 중요하다. 내 생각에, 그것은 우리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견해에 호소하고, 다른 모든 인간과의 공감에 호소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잠재력'에 호소한다. 그 잠재력은 실제로 보편적일 뿐 아니라, 내가 속해 있고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 시민'은 언젠가는 그런 유의 도덕적 무게를 지닐 것이고, 마사 너스봄도 새로운 도덕적 통찰의 예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힐러리 퍼트넘)-137-138쪽

"만일 누군가가 내일 새끼손가락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고 하면, 그는 오늘 밤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억 명의 형제들이 잔해 위에서, 자신의 그 하찮은 불행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저 객체로 보일뿐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파멸 위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잘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그들을 본 적이 없다면. 그러므로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인류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 닥친 하찮은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수억 명의 형제 인류의 목숨을 희생시키려고 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 (아마티아 센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160쪽

우리에게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둘 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지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동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전체 인류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큰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 강력한 공통의 귀속 의식 없이는 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사업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8-169쪽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국가들이 꼭 민주적인 국가들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계급 제도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국민 동원을 요구한다. 동원은 공통의 정체성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선택권은, 사람들이 공통의 정체성에 입각한 동원에 호응할지 호응하지 않을지 여부에 이쓴 것이 아니라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정체성들 중에서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정체성(들)이 어느 것인지에 놓여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세계시민주의적인 연대에 좀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다. 문명적으로 개화된 세계시민주의를 위해 가끔 벌일 수밖에 없는 전쟁은, 바로 이런 정체성들 사이에서 일언아는 것이지 모든 애국주의적 정체성들을 파기하려는 불가능한(가능하다해도, 자멸적일 수밖에 없는) 시도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9쪽

세계 시민권에 대한 너스봄의 견해보다는 그녀의 동심원 이미지가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근본적인' 충성들 가장 바깥의 원에 두거나 두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의 충성은 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자를 관통해서 가장 바깥쪽 원에 도달하는 방식을 이용해 매개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으 안쪽의 원에 대한 구체적이고 호의적이며 마음을 끄는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설명을 요구한다. 그런 후에 안쪽의 원을 바깥으로 펼치는 것 못지않게 바깥쪽의 원을 안으로 그려넣으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마이클 왈쩌)-176쪽

진정 세계 시민으로 처신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므로 세계 국가의 부재는 세계 시민적인 행위의 장애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계시민주의 전통에 속하는 주요 사상가 어느 누구도, 자신과 자기 가족이 속해 있는 지역 및 국가에서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 국가는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의 기본 조건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가족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시민주의자는 특정 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특성 지역이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분별 있게 선을 행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사 너스봄)-187-188쪽

우리는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애피아가 말하듯이, 세계시민주의적인 이상에는 인간의 문화, 언어, 생활방식의 다양성에 따른 실제적인 즐거움이 내포되어 있다. 이 다원주의는 소위 '좋은 것보다는 올바른 것의 우위'를 주장하도록 세계시민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을 자극한다. (마사 너스봄)-189쪽

세계시민의식은 그런 경우, 우리 각자의 상상에 엄격한 요구를 부과한다. 확실히 상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하듯이,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약하고 지속되기 어려운 관념이다. 만일 세계 시민권을 변덕스러운 일상적 반성에 맡겨놓는다면, 우린는 최상의 이념을 제도화하려고 할 때보다 더 제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력은 개인들의 동등한 가치를 가능한 한 최대로 제도화할 수 있는 법률을, 특히 입헌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일레인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법률은 상상력에서 동력을 얻어야 하며, 사람들이 우둔할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률 조항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서도 세계 시민권을 계발해야 한다. 나는 스캐리와 몇몇 사람이 제시한 이유에서, 상상에 의거한 문학 작품들이 그런 계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마사 너스봄)-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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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8-05-0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흥미롭군요..

마늘빵 2008-05-05 09:50   좋아요 0 | URL
나온지 꽤 된 책이고, 그냥그냥 묻혀버린 책인데, 주제가 끌리시죠. ^^ <보스턴 리뷰>라는 잡지를 통해 이루어진 미국 철학자, 작가, 사회학자들 간의 논쟁을 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