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옵티콘


  약 한 달 전쯤 어느 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풀어낸 바 있는데, 의문이 생겨 틈이 나는대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었다. 예전에 쓴 글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어느 고등학교 시험에 정답을 '판옵티콘'으로 써야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팬옵티콘'으로 적어냈고, 선생은 이것을 틀렸다고 채점했다. 학생이 네이버에 팬옵티콘이 틀린거냐고 물었고,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해준 것 같진 않다. 이 내용을 가지고 대학원 수업에서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과 교수님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팬옵티콘'이 더 명확하다 했고, 선생님들은 교과서에 '판옵티콘'으로 나왔으니까 판옵티콘'만' 맞게 해야 한다 했다.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은, 교수님쪽에 가까웠는데, 'Panopticon'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가능한 모든 단어를 정답으로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는 판옵티콘도 맞게, 학생이 쓴 팬옵티콘도 맞게, 단행본 제목으로 나와있는 파놉티콘도 맞게, 더불어 많이 쓰이지 않지만 페놉티콘도 맞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교과서에 나와있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정답만이 정답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교육은, 공부는, 반드시 학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학생이 관심이 있어 접한 단행본이나 논문, 혹은 그밖의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접할 수 있고, 그것이 별 무리없이 쓰여진다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정도가 지난 글의 요지였는데,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추후 조사를 더 해보았다. 일단 국회도서관에서 판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 관련 논문과 학술지가 꽤 나오고, 파놉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도 수적으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팬옵티콘으로 검색했을 때는 수적인 열위를 보이긴 했지만, 역시 논문과 학술지에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공식용어였다. 심지어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 페놉티콘으로도 관련 논문이 한 건 검색되었다. 이쯤되면 네 가지 용어에 대해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현실을 감안해본다면.

  수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해서 학자들간에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적인 우위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실상 언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은 그것을 쓰는 대중들의 편리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고, 네 가지 다양한 표현들이 학계에서 혹은 대중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무리없이' 사용된다면 모두 다 맞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파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팬옵티콘으로 말했을 때, 페놉티콘으로 말했을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경우라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이래도 약간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편집, 교열교정, 국어 계열쪽으로 학위를 가진 전문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저명한 인사인 지인께 여쭤봤더니, 명확히 원칙상 어떤 것이 옳은지를 알려면 국립국어원에 문의해보라 조언해주셨다. 그 분의 개인적인 생각도 나와 일치하지만, 현행 표기법상 옳고 그름을 굳이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에 물어보라는 말.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외래어 표기법 규정을 찾아 뒤적여봤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국립국어원에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확인을 요청했다. (기존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을 찾아봤으나 panopticon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담당자는 파놉티콘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어 내가 그것이 제레미 벤담이라는 철학자가 사용한 원형감옥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이고, 프랑스어가 영어로 옮겨지며 panopticon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몇분의 시간이 지난 후 담당자는 이것저것 뒤적이며 결론을 내려 설명해주는데,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옳은 것은, '파놉티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과서에 표기되어 있는 '팬옵티콘'은 어찌되는가. 그건 틀린 것이다. 고로 선생이 학생에게 말해준 틀린 이유 - 외래어 표기법상 판옵티콘이 맞다 - 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선생은 외래어 표기법이 어찌 되는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뒤적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고, 자신의 주장에 권위있는 근거를 대기 위해 알아보지도 않은 채 '외래어 표기법' 을 들먹이며 이것이 규정이라고 말했던 것일게다.

  표기법대로 한다고 해도 선생은 틀렸고, 학생의 답이 틀렸다고 말한 그 근거는 잘못된 것이므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 물론 표기법대로 하면 학생의 답인 '팬옵티콘'도 틀렸다. 그럼 진짜로 표기법상 옳다고 말해지는 '파놉티콘'만 맞게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올시다 라는게 내 생각이다. 나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생각은 위에서 밝힌대로 표기 가능한 널리 인정될만한 표기는 모두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내가 국립국어원에까지 문의해가며 정확히 알고자 했던 것은 그 선생이 말한 그 근거가 정말 맞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함이었고, 결국 알아본 결과 그 선생의 근거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네이버에서 이 질문을 진작에 봤다면, 답변을 해주겠지만, 아마도 상황이 종료된지 한참된 것 같아 이제 답변해줘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다.

  글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을 것이다. 왜 '파놉티콘'만이 표기법상 맞는가. 국립국어원 담당자는 외래어를 한글로 옮겨 표기할 때의 원칙이 있는데 영어의 경우 그 발음기호를 전환하는 법칙에 따른다고 했다. 네이버 사전에서 panopticon 을 검색하면 "pan·op·ti·con

 n. 원형 교도소[병원, 도서관》] 《한 곳에서 내부모두 있게 만든》" 이라고 해설이 달려있는데, 발음기호대로 한번 읊어보시길. '페납티칸'에 가깝다. 의심스러우면 스피커 볼륨을 크게 높이고 네이버 영어 사전에 나와있는 '발음듣기' 를 눌러보면 그 발음이 어떻게 말로 옮겨지는가를 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음기호상으로 '페납티칸'인 것이 왜 또 '파놉티콘'으로 옮겨지는가. 이것도 의문이 생겨 국립국어원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영어에서 중간에 나오는 o를 옮길 때에는 '아'가 아니라 '오'로 옮긴다고. 그리고 a는 '아'로 옮긴다고. 그래서 결국 '페납티칸'이 '파놉티콘'이 되는 것이었다. 영어원어 발음과 발음기호 따로, 국립국어원 원칙 따로, 교과서 따로, 단행본 따로, 모두 다 따로따로 놀고 있으니 이걸 통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널리 쓰이는 표현 몇가지 안되니, 기껏해야 세 가지 정도이니, 두루 함께 쓰자는게 내 결론이다. 너무 팍팍하게 살지 말자. 결국 유일하게 옳은 말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제레미 벤담의 편지글을 번역한 <파놉티콘>의 첫번째 각주 뿐이다.

  "프랑스어로는 파놉티크panoptique로 발음하지만 여기서는 벤담Jeremy Bentham이 쓰고 널리 알려진 파놉티콘panopticon으로 표기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rhk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옵티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발음이 의미를 충분히 분절(판+옵티콘)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라 '파놉티콘'으로 한다." (파놉티콘, 제레미 벤담, 신건수 역, 책세상, p.128.)

 참고 : 지난글 '팬옵티콘' (http://blog.aladin.co.kr/abraxas/196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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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제 사라마구와 외래어 표기법
    from 자유를 찾아서 2009-03-05 00:26 
      최근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몇 권 연속해서 읽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엄밀히 예전에 어디서 흘려들었던 건데 떠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아마도 사라마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에 신문에서 그에 관해 다루느라 알아보다 그것 자체가 기사가 된 경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땐 사라마구에도, 외래어 표기법에도 관심이 없었던 때라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관심이 생겼다. 지난해 왜 '파놉티콘'과 '판옵티콘'과 '팬
 
 
순오기 2008-05-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립국어원에 문의해 확실하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외국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어떤게 정확한지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말 표기도 제대로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현실이라...영어몰입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새 초등생들 우리말 우리글 교육보다 영어교육을 우선하니, 우리말 우리글 언제 제대로 배우려는지 참말 깝깝합니다!ㅠㅠ

이잘코군 2008-05-05 23:19   좋아요 0 | URL
국립국어원에서 일단 원칙에 의한 정해진 표기법을 알려주긴 했습니다만,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물어서 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외래어 표기 용례집이 업데이트되어 매달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원칙일 뿐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저는 판옵티콘, 파놉티콘, 팬옵티콘, 패놉티콘, 페놉티콘 다 쓸 수 있다고 봅니다. :)

마노아 2008-05-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시험본 서술형 답안 중에 '대한매일신보'를 '대한메일신보'로 쓴 학생들이 꽤 여럿 나왔어요. 녀석들은 '메일'이란 말이 더 익숙했기 때문에 불궈진 실수였겠죠. 맞게 해주었어요. 근데 '대한매일신문'이라 쓴 녀석은 틀리게 했죠. ( '')

이잘코군 2008-05-05 23:18   좋아요 0 | URL
이 경우는 좀 다르지 않나 싶어요. '매일'과 '메일'은 엄연히 다른 단어인데. 표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게다가 '대한매일신보'는 하나의 고유명사잖아요. -_- 이건 틀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_-a '대한매일신문'이 '대한메일신보'보다는 더 가까워보이는데.

마노아 2008-05-06 23:23   좋아요 0 | URL
메일은 맞춤법이 틀린 것이고, 신문은 이름을 틀리게 썼다고 판단해서 그랬어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3년 6월
품절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적 정의와 선을 중시하는 반면, 세계화주의는 시장 질서와 자본의 자유 이동을 강조한다.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세계시민주의가 인간은 그들이 세계 어디에 살든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윤리적 견지의 세계주의를 강조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세계화주의는 윤리적으로 가치 중립적인(사실은 '비윤리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자본 주도적인 성격을 노출하고 있지만, 여하튼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해서) 태도를 표명한다. (역자 오인영)-11쪽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다. 인간은 인류적 질서보다 더 협소한 정치적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바로 그러한 정치적 질서 안에서 공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주로 제기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동료-시민의, 즉 동일한 질서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결코 임의적인 일이 아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자유주의가 국가를 강조한다는 세계시민주의자들의 비판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즉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찬양하는 문화적 다양성은 국가들의 실재의 복수성에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 -54쪽

국가는 원래부터 도덕적 문제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항상 도덕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강제적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규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국가 제도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근대인의 수많은 목적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남용의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홉스가 생각했듯이, 국가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공인된 강제형식을 독점해야만 하고, 그러한 권한의 행사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조금도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포스트-식민 사회들에서조차도,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5쪽

인간은 소규모로 사는 것이 가장 낫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나라, 도시, 거리, 사업, 기능, 직업 및 가족 등도 공동체로서, 또한 인류적 지평보다는 협소하지만 도덕적 관심의 영역으로는 더 적절한 수많은 동심원의 일부로서 옹호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자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국경 안에서나 국경을 초월하여 충분히 연대할 수 있는 민주 국가에서 애국적 시민이 되어 살아갈 권리를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세계시민주의자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콰미 앤서니 애피아)-56쪽

세계시민주의자들이 좋은 시민으로써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세계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에서 특수한 이 지역, 저 지역, 이 계곡, 저 해안, 이 가족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애착은 지역에 대한 애착에서 시작하며, 그 이후에나 밖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세계시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런 점들을 무시하게 되면 종착지가 없는, 모국에서도 세계에서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위험에 곧바로 빠질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소란스러운 다문화적 정치가 주는 교훈이다. 즉 미국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ㅁ너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폴란드계 미국인 혹은 유대계 미국인이나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타고난 시민으로서 존엄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자신의 지역 공동체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벤자민 R 바버)-62쪽

보편주의적 견해나 한계를 설정한 견해 모두 인간의 생존과 안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별 생각 없이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여 폐기할 수 없다는 시지윅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가 언급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의무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모든 사회와 도덕적 전통이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소규모일지라도 내적 지지와 충성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두 견해의 지지자들은 최소한 그러한 약간의 의무가 생존에 필수적인 가치라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물론 더욱 좁게 한정된 의무가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빚을 수 있는 마찰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두 견해의 주창자들 대부분은 살인, 약속의 파기 및 사기 등에 있어서는 모든 동심원의 모든 경계를 초월해 유지되어야 할 어떤 금기가 있으며, 심각한 긴급 상황에서는, 예컨대 지진 이후에는 경계를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국내의 요구들에 우선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시실라 벅)-70쪽

애국주의는 주권 국가가 국제 사회를 조직하는 기초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권은 자연스럽게 교육, 사회화, 포부 및 충성이 지향할 방향의 기초로서의 국가주의 의식에 주어진다. 이런 식의 방침은 영토상의 주권 국가가 어느 정도 자율성과 일차성을 갖는다고 가정하는데, 기실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가 다시 존재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조직이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 큰 구조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그러한 국가의 자율성과 일차성은, 도전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양한 유형의 지방화와 세계화에 의해서, 특히 복잡한 형식의 경제적, 전자적, 표의적인 통합에 의해서 중요하고 누적적인 타협이 강요되거나 심지어 대체되고 있다. (리처드 폴크)-87쪽

세계시민주의적인 견해는 명백히 세계적 차원의 윤리와 인본주의를 갖고 있지만, 급속하게 경계를 초월해서 경험을 통합하고 있는 세계화 경향들과 충분히 구별되지도 않거니와 그것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현재 통화 딜러와 카지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초국적 법인과 은행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시장 주도 세계화의 파괴적 도전에 대한 대처 없이, 환상적인 세계시민주의를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기획하는 것은 현대적 형태의 흐리멍덩한 순진무구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에 구현되어 있는, 윤리적으로 결함 있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 및 세계를 전체로 파악하는 인식에 담긴 윤리적이고 통찰력 있는 내용을 최소화시키는 법을 어떤 식으로든 제정하려는 세계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땅히 결합되어야만 한다. (리처드 폴크)-90-91쪽

무엇보다 세계시민주의는 부모, 조상, 가족, 인종, 종교, 유산, 역사, 문화, 전통, 공동체, 국적 등과 같이 생명을 주는 기존의 사실들을 애매하게 만들고, 심지어 부정한다. 그것들은 개인의 '우연적인' 속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유영하는 자율적인 개인들로서 세계에 편입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간으로,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충분히 형성시키는 모든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완전히 갖추고서 세계로 유입된다. 정체성이란 우연도, 문제도, 그리고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의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도중에 선한 동기에서 이런 소여의 어느 한두가지를 배제하거나 변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게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정체성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기를 갈망하는 '변화무쌍한 자아'는 자신의 국적을 부인하는 사람이 국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정체성 없는 자아이다.(거트루드 힘멜파브)-114쪽

자기 문화의 업적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은 다른 문화의 업적에 대해서도 별로 가치를 부여할 것 같지 않다. 종교가 없는 학생은 다른 사람의 종교적 헌신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영웅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웅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을 경멸하기 십상이다. 어린이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우선 가치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중략) 그 대신에 어린이들을 '세계시민'이 되도록 교육하면, 아마도 그들은 십중팔구 애국자도 세계시민주의자도 되지 못하고, 세계 전역에서 실재하는 결함투성이의 개인과 문화들을 포용할 줄 모르는 추상과 이데올로기의 애호가가 될 것이다. (중략) 그런 교육은 고결한 세계시민주의를 고무시키는 영감이 아니라 자칫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친밀한 사람들을 덜 사랑한다고 해서 소원한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클 W 매코넬)-118-120쪽

나에게는 '세계시민'이 아니라, 바로 그 누군가가 동료이며, 무덤까지 함께 갈 동반자라는 사실이 도적적으로 중요하다. 내 생각에, 그것은 우리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견해에 호소하고, 다른 모든 인간과의 공감에 호소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잠재력'에 호소한다. 그 잠재력은 실제로 보편적일 뿐 아니라, 내가 속해 있고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 시민'은 언젠가는 그런 유의 도덕적 무게를 지닐 것이고, 마사 너스봄도 새로운 도덕적 통찰의 예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힐러리 퍼트넘)-137-138쪽

"만일 누군가가 내일 새끼손가락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고 하면, 그는 오늘 밤 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억 명의 형제들이 잔해 위에서, 자신의 그 하찮은 불행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저 객체로 보일뿐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파멸 위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잘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그들을 본 적이 없다면. 그러므로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인류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 닥친 하찮은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수억 명의 형제 인류의 목숨을 희생시키려고 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 (아마티아 센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160쪽

우리에게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둘 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지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동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전체 인류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큰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 강력한 공통의 귀속 의식 없이는 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사업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8-169쪽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국가들이 꼭 민주적인 국가들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계급 제도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국민 동원을 요구한다. 동원은 공통의 정체성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선택권은, 사람들이 공통의 정체성에 입각한 동원에 호응할지 호응하지 않을지 여부에 이쓴 것이 아니라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정체성들 중에서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정체성(들)이 어느 것인지에 놓여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광범위하고, 세계시민주의적인 연대에 좀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다. 문명적으로 개화된 세계시민주의를 위해 가끔 벌일 수밖에 없는 전쟁은, 바로 이런 정체성들 사이에서 일언아는 것이지 모든 애국주의적 정체성들을 파기하려는 불가능한(가능하다해도, 자멸적일 수밖에 없는) 시도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찰스 테일러)-169쪽

세계 시민권에 대한 너스봄의 견해보다는 그녀의 동심원 이미지가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근본적인' 충성들 가장 바깥의 원에 두거나 두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의 충성은 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자를 관통해서 가장 바깥쪽 원에 도달하는 방식을 이용해 매개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으 안쪽의 원에 대한 구체적이고 호의적이며 마음을 끄는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설명을 요구한다. 그런 후에 안쪽의 원을 바깥으로 펼치는 것 못지않게 바깥쪽의 원을 안으로 그려넣으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마이클 왈쩌)-176쪽

진정 세계 시민으로 처신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므로 세계 국가의 부재는 세계 시민적인 행위의 장애물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계시민주의 전통에 속하는 주요 사상가 어느 누구도, 자신과 자기 가족이 속해 있는 지역 및 국가에서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 국가는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의 기본 조건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가족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시민주의자는 특정 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특성 지역이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분별 있게 선을 행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사 너스봄)-187-188쪽

우리는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애피아가 말하듯이, 세계시민주의적인 이상에는 인간의 문화, 언어, 생활방식의 다양성에 따른 실제적인 즐거움이 내포되어 있다. 이 다원주의는 소위 '좋은 것보다는 올바른 것의 우위'를 주장하도록 세계시민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을 자극한다. (마사 너스봄)-189쪽

세계시민의식은 그런 경우, 우리 각자의 상상에 엄격한 요구를 부과한다. 확실히 상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하듯이, 타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약하고 지속되기 어려운 관념이다. 만일 세계 시민권을 변덕스러운 일상적 반성에 맡겨놓는다면, 우린는 최상의 이념을 제도화하려고 할 때보다 더 제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상상력은 개인들의 동등한 가치를 가능한 한 최대로 제도화할 수 있는 법률을, 특히 입헌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일레인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법률은 상상력에서 동력을 얻어야 하며, 사람들이 우둔할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률 조항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서도 세계 시민권을 계발해야 한다. 나는 스캐리와 몇몇 사람이 제시한 이유에서, 상상에 의거한 문학 작품들이 그런 계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스캐리의 견해에 동의한다. (마사 너스봄)-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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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8-05-0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흥미롭군요..

이잘코군 2008-05-05 09:50   좋아요 0 | URL
나온지 꽤 된 책이고, 그냥그냥 묻혀버린 책인데, 주제가 끌리시죠. ^^ <보스턴 리뷰>라는 잡지를 통해 이루어진 미국 철학자, 작가, 사회학자들 간의 논쟁을 싣고 있습니다.
 


  얼마 전 짭짤한 알바가 들어왔었다. 그 분을 통해 직접 들어온 건 아니고, 의뢰를 받은 친구가 나보고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온 것인데, 흔히 말하는 대필. 나보고 대필 작가가 되어달라는 건데, 거창하게 책을 내는 건 아니고, 직장과 대학을 동시에 다니는 어떤 직장인의 과제물을 대신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격은 무려 십만원. 서평 하나 쓰고 십만원이면 꽤나 짭짤한 금액이다. 너무 잘써줄 필요도 없다고 하니 그냥 평소에 쓰던대로 대충(?) 쓰면 되는건데, 아마 수년전이라면 했을 것이다. 글 한편 쓰고 그만한 돈이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하므로.

  그런데, 거절했다.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물론 내가 안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알바를 넘길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직장인의 서평 레포트는 십만원과 거래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여지고 제출되는 것이다. 그럼 결국 어떻게든 그리 될테니 내가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고백하건대, 예전에 나는 술자리에서, 함께 밴드를 하던 똑같이 직장과 대학을 병행하던 동생의 부탁에 못이겨 약속을 해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기존에 써놨던 서평 두 개를 펌질하겠다는 거였는데, 이를 허락해버렸다.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번복하려면 할 수도 있었으나, 내겐 이미 성립된 약속을 뒤집는 것이 번복하는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결국 내 서평 두 개를 줘버렸다. 후회했다. 그런 약속을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은 나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안하겠다고, 못주겠다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하고 - 주변에 서평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거 같으므로 달리 도움을 요청할 길이 없었을듯 - 결국 본인이 시간을 내어 어떻게든 제출했을텐데, 내가 흔쾌히 약속해버림으로써 나의 양심을 배반하고, 그 사람의 양심을 쉽게 어기도록 만들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경우야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더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던 부정행위를 대학에 와서 하기도 했었다. 결국 시험에 있어 도움을 받진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많이들 하니까, 그런 식으로들 시험을 보니까, 또 조교들도 알면서 다 봐주는 눈치니까, 나도 해봤던건데, 이건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리해도 나는 그리하면 안 되는 거였다. 딱히 또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야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는 친구집에서 가로 3센티, 세로 2센티 정도의 조그만 오토바이 모형 장난감을 훔친 적도 있었다. 나중에 후회했다.

  어제 만난 학교 선생님은 최근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해줬다. 시험 중 한 녀석이 부정행위를 했고, 감독샘이 이를 적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쪽지만 압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쪽지를 해당 과목 기간제 샘한테 넘겨주고 일을 덮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근데 일을 덮으려면 본인만 알고 있으면 되는데 과목담당 기간제 샘에게까지 알린 것이다. 물론 덮어선 안 되는거다. 그 기간제 샘은 학교일이 처음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그런데 내가 만난 그 샘이 이게 어떤 사건인지를 명확히 짚어준 뒤에야 해당 학생에게 0점을 주고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대개의 사건들은 주어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발생하지 않을까. 대구의 초등학교 집단 성폭행 사건도 그렇고 - 듣기로는 백명에 육박한다지 -  걸릴리도 없고, 걸려도 별 문제도 되지 않을테지만, 내게 들어왔던 알바 제의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서로 상부상조(?)함으로써 성립되고 행해진다. 나름 원칙이란 것이 있고,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삼십년을 뒤지면 나올게 더 있을 것이다. 꾸준히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쉽게 받아들이거나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해서는 안 될 행위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십만원은 누가 가져갔을라나. ( '')  (미련을 갖는게 아니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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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5-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주 멋진 아프락사스 님이십니다.
그나저나 십만원은 누구에게?? 3=3=3

승주나무 2008-05-05 03:42   좋아요 0 | URL
알라딘을 통해서 제게 오만원이 왔더군요.
또 자랑질(퍼퍼퍽!!!) ㅋㅋ

이잘코군 2008-05-05 09:50   좋아요 0 | URL
뭐뭐뭡니까. 승주나무님 리뷰당선되신건가요? 확인해봐야지.

파란여우 2008-05-0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아녜요 -.-
ㅋㅋ

이잘코군 2008-05-0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 글쎄요. 십만원은 누구에게 갔는지는 저는 잘... 저는 아니라는. 진짜루 아니라는... -_-a
파란여우님 / 파란여우님이 쓰시면 바로 걸립니다. 대충써도. :)

302moon 2008-05-0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가 나와 깜짝(;) 양심을 속이지 않은 것, 멋져요. 박수, 짝짝짝.(웃음)

이잘코군 2008-05-04 23:27   좋아요 0 | URL
박수받자는건 아니고 -_-a 과거사 고백이라고나 할까요.

순오기 2008-05-0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녁에 이걸 읽고 추천만 하고 댓글은 못 달았어요. 몇몇 후배나 친구의 리포트에 도움 준 적도 있었고, 아예 내 걸 가져가서 안 가져 온 사람도 있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어서 찔렸거든요. 물론 돈을 주고 받고 해 본 적은 없어요. 하여간 양심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야죠~ 잘 하셨어요!!^^

프레이야 2008-05-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얼마전 제 경우가 생각나요.
'원칙대로 하길 원한다'는 제 말에 어떤 엄마가 계속 씹어대던군요.
자기는 원칙대로 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못박더군요. 그게 휴머니즘은 아닐텐데요.
전, 원칙대로 되길 원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징계가 가해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자필로 서명했지요. 인간적으로 많이 생각한 나름의 배려였어요.
그런대도 제가 '~ 원한다'는 제 원칙에 대해 뭐라고 따지다니 얼마나 화가 나던지요..
아무튼 원칙대로 잘 하셨구요. 서평 빌려드린 건 좀 별로인 것 같아요.ㅎㅎ
참, 저도 하나 고백해요.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컨닝 시도했어요.
사회 시험시간이었는데요, 결국 제대로 못 보고 컨닝실패했어요.

이잘코군 2008-05-0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 사실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지나가는 일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가만히 떠올려보면 더 있죠. ^^ 앞으로 안하면 되는거죠.

혜경님 / ^^ 서평 빌려준 건 그렇죠. -_-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해도 약속이었던지라. 혜경님은 그래도 커닝을 거의 안하셨네요. 전 오히려 초중고에서는 한번도 안하고 - 초등학교 때 성적에 안들어가는 시험이라고 보여줬다가 걸려서 혼난 적은 있어요 아주 눈물 쏙 빠지게 - 대학에 와서 그랬다는게 더 부끄럽군요. -_-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구판절판


계몽사상가 루소는 사람들이 세상과 타인을 속속들이 볼 수 있을 때 투명한 사회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자신은 보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비대칭적 시선의 확장은 규율 사회와 감시 사회를 낳았다. 파놉티콘이라는 건물에 구현된 감시의 원리는 사회 전반에 스며들면서 규율 사회의 기본 원리인 파놉티시즘으로 탈바꿈했다. -25쪽

기든스는 푸코가 이 둘의 변증법적 상호 작용에 주목하지 않고 단지 감옥에서 죄수를 통제하는 방법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를 통제하는 방법을 동일시한닫는 점에서 푸코를 비판했다. 파놉티콘과 같은 건축물은 물리적 감금이 허용되는 감옥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고용주와의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서 하루에 몇 시간씩만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기든스의 비판의 요지였다. -54쪽

규율을 주입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사용했던 것은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시계였다. 시계는 노동자들을 근면하고 유능한 공장 노동자로 만든 중요한 메커니즘이었다. 공장에 시계가 도입되면서 작업은 생체 리듬이 아니라 시계의 시간에 맞춰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공장주가 시계를 독점하고 시간을 속여서 더 작업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정확한 시간의 중요성을 체화한 다음엥는 노동자들이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하고 초과 노동에 대한 초과 수당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제 시간은 '때우는' 것에서 소비되고 사고 파는 것으로 변했다. '시간은 돈'이라는 식의 시간 관념이 중요해지면서 공장에는 작업 시간표와 작업량을 체크하는 표가 도입되었고, 이는 다시 규율과 시간 관념을 더욱 강화했다. -58-59쪽

전자건강보험증은 잠정적으로 포기되었지만 2002년 초 정부는 홍체나 얼굴형과 같은 생체 인식 전자 정보를 포함한 생체 인식 여권을 추진하기 위해 그 타당성 검토에 들어갔다. 선진국은 추진하고 있는데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 치열한 기술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측 논리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주민카드를 추진할 때에도 정부는 이러한 핵심 기술에서 선진국에게 밀리면 안 되고, 오히려 이를 빠르게 추진함으로써 기술을 선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사실이다. -78쪽

2001년, 삼성 그룹은 참여연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린 직원을 해고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아직 기업에 의한 직원의 전자 메일 감시 등에 대한 법률적 규정이 없어 이러한 감시가 광범위하게, 직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91쪽

포스터는 자발성에 근거한 슈퍼파놉티콘이 파놉티콘을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사회 전체를 관장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포스터의 수퍼파놉티콘은 가상 세상을 통한 파놉티콘의 권능 강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상 파놉티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디즈니월드에서 수많은 관광객에 대한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한 쉬어링과 스테닝은 그곳 통제의 특징을 "방문객의 자발적협조"라고 규정하면서, 파놉티콘식의 속박과 감시를 통한 통제가 아니라 미묘하고, 협력에 기초하고, 강제 없이 느슨하게 퍼져있는 통제의 네트워크가 현대 사회의 통제의 특성임을 지적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통제가 가능한가? 디즈니월드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이 "리얼리티쇼"의 세상이다. 여기에서 관광객들은 현란한 이미지를 구경 잘하고 즐기기 위해서 통제에 자발적으로 협조한다. 이를 조금 일반화해보면, 현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비를 부추기는 수만 가직 상품에 대한 현란한 이미지에 시선과 관심을 고정시킴으로써 통제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는 것에 만족한 나머지 보여지는 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102-103쪽

푸코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스펙터클의 사회"가 "감시 사회"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전자 파놉티콘의 사회에서는 "스펙터클"(보는 것)과 "감시"(보여지는 것)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현재는 스펙터클과 감시가 융합된 세상이다. 우리는 보여짐으로써만이 아니라 보는 과정에서도 감시와 통제의 네트워크에 포함된다. -103쪽

벤담의 파놉티콘은 푸코에 의해 현대 사회의 규율 메커니즘으로 탈바꿈했고, 푸코의 파놉티콘은 정보 파놉티콘과 전자 파놉티콘, 수퍼파놉티콘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19세기 이후 사회의 파놉티콘화와 더불어 의회, 언론, 시민운동과 같은 시놉티콘이 동시에 발전했으며, 정보 파놉티콘과 전자 파놉티콘은 권력을 감시하는 역파놉티콘으로 기능할 수도 있음을 살펴보았다. "감옥이 없다면 우리 사회가 바로 감옥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을 것"이라는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의 말이나 "현대사회=감옥"이라는 등식은 현대 사회와 조직에서의 통제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127쪽

미래는 부자를 제외하고는 프라이버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던 과거와 비슷해질 것이다. ......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시골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지만, 미래에는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1999년 5월 1일자 -130쪽

사람들은 약간의 편리함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너무 쉽게 포기한다. 당첨될 확률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경품 때문에 성명, 주소는 물론 전화번호까지 쉽게 제공한다. 적립금이나 마일리지 보너스를 위해 멤버쉽 카드를 만들고, 이를 위해 자세한 신상 정보를 제공한다. 공공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이점 때문에 폐쇄 회로 텔레비전으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에 무관심하다. 핸드폰 전화번호는 이미 자기 사무실 전화번호만큼이나 공적인 것이 되었다. 실명 등록을 권하는 국내의 어느 포털 사이트는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아예 회원으로 등록할 수 없는 곳도 있다. -133쪽

기술의 궤적은, 기술이 새롭게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 세력들과 그 기술 때문에 힘을 잃게 되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통해 그때 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식인 경로를 따른다. 이러한 상호 작용 때문에 특정한 기술이 특정한 궤적을 그리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를 들어 정보기술은 반드시 '글로벌 파놉티콘'을 낳게 되어 있다는) 자칫 비관적인 결정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기술의 궤적에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 세력들 사이의 힘의 관계이지, 기술의 초기 디자인에 각인된 발전 방향성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기술을 놓고, 이 기술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의 역설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위험한 태도이다. 이럴 경우 기술의 궤적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기술과 사회 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 작용이다.-139쪽

대부분의 데잍터베이스는 접근자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다른 패스워드를 지정해서 공개 정도를 차등적으로 결정한다. 파놉티콘이 시선의 비대칭성 때문에 가능했다면, 전자 파놉티콘은 정보 접근의 비대칭성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정보에 권력을 가진 어떤 자가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나를 옭아매는 파놉티콘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역파놉티콘은, 가능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운동과 다양한 NGO들에 의한 행정 및 사법 권력에 대한 감시, 대기업의 횡포와 통신, 인터넷 기업의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감시, 의정과 언론에 대한 감시, 시민운동의 또 다른 권력화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 감시,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통제에 대한 반대운동, 정보의 수집을 제한하는 강력한 프라이버시법의 입법화, 그리고 역감시를 위한 정보 공개권의 확보 등이 결합할 때에 역파놉티콘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140쪽

각주 56) 폐쇄회로 텔레비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태도이다. 영국에서 사람의 조작에 의해 작동되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연구한 한 보고서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조작하는 사람이 뚜렷한 이유 없이 흑인 남성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카메라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슨 가핀켈, <데이터베이스 제국>, 195쪽.-151쪽

각주 98) 해킹과 해커 문화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도로시 데닝은 인터넷을 이용한 운동을 액티비즘, 핵티비즘, 사이버테러리즘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액티비즘은 인터넷을 연대, 홍보, 출판,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고, 핵티비즘은 가상 연좌 농성, 폭탄 메일 등을 사용해서 특정한 웹사이트나 통신을 일시 마비시키는 것이며, 사이버테러리즘은 비행기 관제 시스템 같은 기간 시설을 마비시켜서 살상과 인명 피해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 중 핵티비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이버액티비즘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이버테러리즘으로 간주되는 등 그 경계가 가장 모호하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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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출근을 핑계삼아 일찍 잠들었던 그날의 프로그램, 100분 토론을 '다시보기'했다. 알고 지내는 지인이 나와서라기보다는 - 먼저 본 분들에 의하면 열심히 노트에 필기하는 모습밖에 안나왔다고 - 삼성 결과에 매우 심히 엄청나게 불만족스러운, 그간 삼성 제품 열심히 사다 썼던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가 궁금해서이다. 수사결과가 결과로 그치지 않고 100분 토론까지 이어진 건, 결과야 어찌됐든 미리 계획되었던 것이겠지만, 그만큼 논란이 많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일 터다.

  화제의 김용철 변호사를 더 이상 왜곡된 언론이나 찌라시 신문쪼가리를 통해 보지 않고, 온전히 생방송으로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고, 먼저 본 분들에 의하면, 함께 나온 김상조 교수란 분이 참으로 옳은 말만 논리정연하게 빠득빠득 말씀 잘 하셨다기에, 또 반대진영에 나온 한 교수가 전화연결된 시청자로부터 "저 교수 왜 나왔어요?"라는 말을 들었다기에, 이거 또 어떤 대화가 오갔기에 그랬을까, 하는 궁금증, 그리고 더불어 지인을 티비로 보는 겸 해서 '다시보기'를 통해서라도 뒤늦게나마 보게 된 것. 

  디워 이후로 처음 본 100분 토론인거 같은데, 꽤나 재밌었다. 100분 토론도 하나의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으로 보인다. 어디서 이한유 교수 같은 분을 섭외한건지. 그 분 발언할 때마다 그 바로 뒤에 앉으신 호랑나비 무늬의 브라우스를 입고 나오신 이쁘장한 여자분의 표정이 아주 재밌었다. 그리고 그건 방송을 보고 있는 내 표정과 같았다. 더불어 손석희 교수 또한 사회자이기에 자기의견을 말하지는 못하지만, 당황스러운 모습을 몇 번 보여주더라는. 디워 이후 다른 100분 토론을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그때만큼의 '후끈'은 아니었어도 충분히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이나 '라인업'이나 '무릎팍도사' 보다 재밌었다.

  100분 토론에서 김용철 변호사나 김상조 교수가 충분히 반대진영이 납득할만한, 이해할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발언했다고 본다. 금융실명제도 잘못되었고,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상속세를 무는 것도 잘못이라는 등의 발언과 합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 정말 이건 상식 이하의 발언이다 - 반대진영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아니 '수긍할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김상조 교수 덕분에 끄덕끄덕 많이 했고, 이한유 교수 덕분에 많이 웃었다. 그리고 김용철 변호사 같은 사람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살 맛 난다.

  100분 토론을 시청하고, 저녁에 한겨레 신문 <책과 생각>을 넘겨보니 최재봉 기자의 '김성동의 분노와 문학 현실'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나는 전혀 듣도보고 못한 작가이다보니 블로그에서 몇몇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음에도 자세히 읽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를 읽어보니, 사건이 복잡할 것도 없는지라, 알고 있는 그대로가 다 였다. 한 명은 추리소설가고 다른 한 명은 '한국문학' 대표작가에 들만한 분인 듯 하다. 그런데 문학과 지성사가 작년 11월에 '한국문학선집 1900-2000'이라는 네 권짜리 책을 내면서 그 둘을 혼동하여 하나로 묶어 해설을 달아버렸다는 것인데(해설자는 충북대 국문과 이익성 교수), 작가의 항의로 잘못나간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수정하거나 해설자와 출판사 대표가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고작 보내온 메세지가 "수정하겠다"인데, 아니 무슨 배짱으로 작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그 따위 해설을 달고, '한국문학선집'이란 거창한 제목으로 그 따위 책을 낸단 말인가. 그것도 창비와 함께 대한민국 대표 문학 출판사로 손에 꼽히는 곳에서. 너무 부끄럽고 얼굴 빨개질만한 실수를 저질러서 자신들도 당혹스러워서 그런건지 모르겠다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내놓은 책들을 전량 걷어들여 수정하겠다고 하면 끝날 일이 왜 여지껏 지속되는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시끄러워지고 이목이 집중되니깐 지난주에야 작가에게 사과를 한 것 같은데, 너무 늦었다. 너무. 명색이 문학 대표 출판사라는 곳과 대학 교수가 작가 하나 완전히 죽여버린 꼴이다.

  왜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삼성이 떠올랐을까. 하나는 재벌기업이고, 하나는 거대 출판사인지라 분야도 다르고, 다루는 내용물도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사건 내용과 맥락 또한 다 다르다. 그런데, 한 가지 같은 점이 있는데, 잘못하고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학과 지성사야 지난주에 겨우 사과했다고 하니 그나마의 책을 만드는 출판사로서의 양심은 지킨셈(?)인데, 그야 시끄러워지니깐 뒤늦게 그리한 듯하고. 삼성은 아무리 시끄러워져도, 대한민국이 그 문제를 가지고 난리가 나도, 증거내놔, 로 일관하고 있으니, 이런 걸 보고 '삼성스럽다'라고 해야할지.

  아니 잘못한거 잘못했다고 그냥 말하는게,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는게, 뭐 그리 어려울까. 눈에 뻔히 보이는 잘못을 해놓고 잘못하지 않았다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빠득빠득 우기고, 증거내놓으라며 그 사이 이리저리 손쓰고 자기들이 가진 증거 없애는 거보다, 그냥 깔끔하게 아 미안하다, 그동안 관행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 순수하게 연구에만, 제품 개발에만 신경쓰도록 하겠다, 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어쩌면 문학과 지성사가 한참 뒤늦게라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미 내놓은 출판물에 명백히 증거가 드러나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증거를 책을 산 모든 이들, 사지는 않아도 서점에서 책을 찾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만인에게 접촉가능한 증거물이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잘못을 시인했는지도. 

  사과에 정말 인색한 사람들이 많다.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오늘은 어디를 갔다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나보다 몇살 어려보이는 한 청년이 DMB 핸드폰을 이용해 - 이게 티비 볼 수 있는 핸드폰 맞나? - 음량을 아주 크게 해놓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버스 안엔 빈 자리가 곳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도 않고, 그들 모두 거의 조용히 있었으니, 티비 소리는 매우 컸을 수밖에 없다.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막 대화를 하다가 푸하하하 크게 웃고 하는 걸 보면 오락 프로그램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대화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대화를 한다는 사실, 웃는다는 사실만 감지될 뿐. (소리가 커도 내용이 들리진 않는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한 마디 할까 하다가 참았다. 그러면서 눈으로 몇 번 흘겨줬지만, 그 사람은 열심히 작은 액정에 몰입해 있는지라 나의 이런 눈초리를 느꼈을 리 없다. 그런데 앞에 있는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다른 청년이 뒤를 돌아, 너무 시끄럽잖아요, 버스 혼자 쓰는거 아니잖아요, 볼륨 좀 줄여주세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열심히 티비 보던 청년이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받아들이고 핸폰을 아예 꺼버리지 않았다면, 나도 한 마디 더 추가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물리적으로 그 분보다 거리를 두고 있었다.) 상황이 그쯤에서 마무리 됐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말을 하면서 상대방이 원하는 건, 볼륨을 줄이거나 핸드폰을 끄는 행위이지, 사과가 아니다. 당연히 사과가 있어야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공공장소에서의 에티켓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당사자로부터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 잘못을 인지했다면 행동을 수정하는 건 당연하고, 나아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해야할텐데 그러지 않는다. 사과를 하기엔 피해 본 이들이 어디 멀리 있거나 접촉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바라지 않는다. 행동을 수정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기에. 정말 고마워해야하는지 모르겠다만.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지적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누군가 잘못을 저질러도 주변에서 쉽게 그에게 한 소리 날리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에서 그런 사람들 부지기수로 봤다. 그런데 한 번도 그렇게 지적한 적이 없다. 왜냐. 한 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적해서 바로 행동을 수정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러리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피차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와 그 사이에 언쟁이 오갈 것이고, 그곳에 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몰릴 것이고, 여러 구경꾼들 앞에서 구경거리를 제공해주는 역할밖에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적을 했을 때 상대방이 수정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미리 전개상황을 예상해버리고 체념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여러번 목격했기에, 이미 아 그런 상황은 이렇게 전개되는구나, 에 대한 어떤 시나리오가 머리에 박혀있고, 그렇게 될거라면 에이 그냥 지나치자고 생각하게 되곤 한다. 삼성 사건도 그런게 아닐까. 분명 잘못된 일인줄 알지만, 지적해봐야 나만 피곤하고, 그러다보니 다들 못 본 채 지나가고, 그런데 갑자기 어떤 정의로운 분께서 혼자 총대를 메고 그거 잘못아니냐, 지적하니 당사자는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은 몰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저 파렴치한, 어쩌고 하면서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사과하지 않은 채 발을 뺐으며, 구경꾼들은 에이 어디 이렇게 될거 모르고 있었나, 다 알고 있지 않았나, 문제제기한 놈만 안됐지, 하면서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작년엔가 접한 일본 기차 사건이 떠오른다. 한 남자가 혼자 앉은 젊은 여자 옆에 가서 흉기를 들이대고 성추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그들은 그 남자의 협박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여성은 기차 화장실에서 그 남자로부터 성폭행 당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관사에게도 경찰에게도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마땅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과하지 않아도 전과 같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모든 사람들도 죄값을 치뤄야 한다. 김성동 사건은 그 사실을 안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 뒤늦게나마 출판사로부터 사과를 받았지만 - 그것도 미흡하다 - 삼성 사건은 이런저런 권력자들의 비호에 의해, 돈에 의해, '경제성장'이라는 유령에 의해, 그렇게그렇게 덮어졌다. 김용철과 사제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졌고, 삼성을 내버려둔 이들은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100분 토론에서 어떤 여자분이 전화로, 삼성 사건을 지켜보면서 자기는 삼풍백화점 사건이 떠올랐다고 했다. 괜찮겠지, 문제 없겠지, 하고 내버려뒀다가 한번에 무너졌다는 말.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러한 결정을 내린 그들과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국민들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사실. 우리는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한 마디씩 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소리 높여 그들에게 너 잘못한거 아니냐, 인정해라, 사과해라, 말한다면 그들도 마지 못해 뒤늦게라도 사과를 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삼성을 향해 한 마디씩 하는 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시끄럽게 티비를 보는 이들을 향해 뭐라고 한 마디씩 하는 것보다 쉽다. 직접 대면할 일도 없고,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으니.

  사과해라. 삼성아. 사과하자.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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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4-27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동 이라는 사람이 두 명인데"가 아니고, 한 사람은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 다른 사람은 <만다라>의 원작자 '김성동'입니다. 둘다 유명작가입니다. 혼동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이고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잘코군 2008-04-27 00:56   좋아요 0 | URL
아 이름도 다르군요. 수정하겠습니다. 김성종, 김성동. -_- 아니 이름도 다른데 왜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한대요.

Mephistopheles 2008-04-28 22:56   좋아요 0 | URL
"감성돔"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아 나의 뇌구조는 나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이잘코군 2008-04-29 00:37   좋아요 0 | URL
메피님 그거 개그에요? -_-a

Mephistopheles 2008-04-29 01:19   좋아요 0 | URL
개그라뇨...단지 회가 먹고 싶을 뿐입니다.

Jade 2008-04-2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분토론 보셨군요. 양 이씨패널에 대한 네티즌들 의견을 검색해보다가 참 웃지못할 의견들을 많이 만났어요. 특히 김상조 교수와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험담...논리적 비판이라기 보단 감정적 분노에 더 가깝기에 험담이란 말이 적절할듯 하네요. 삼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판단이라기 보단 종교더라구요. 어딜가나 말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다시한번 깨닫는 기회였어요.

이잘코군 2008-04-27 00:57   좋아요 0 | URL
-_- 끌어들이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신도가 되고 참들 어쩌다 그리 됐는지. 무서운거죠 이런게.

다락방 2008-04-2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동'과 '김성종'은 제가 오늘 본 신문(어제 신문이지만 오늘 봤어요)에도 나왔어요. 읽다가 덮어버리기는 했지만.

지하철안에서 DMB 핸드폰을 이어폰 없이 보는것고 아주 불쾌하고, 시끄럽게 통화하는 것도 싫어요. 최근엔 영상통화까지 하더군요. 내참. 기가막혀서. 말씀하신대로 무슨 말인지는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아요. 아마 그래서 더 짜증스러운지도 모르겠어요. 시끄럽고 큰데 웅얼대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영상통화까지 더해져서 대중교통 이용이 더 소란스러워졌어요.

내가 왜 저인간들 통화하는걸 들어야 하지? 내가 왜 저인간들 얼굴을 봐야하지?

왜 많은이들이 불편해하고 불쾌해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내 생각과 같진 않다지만 기본적인 예의나 에티켓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는거 아닌가요?

잘못을 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잘못을 하게됐다면 사과를 해야죠. 사과를 해야함이 마땅하죠. 내가 잘못했다, 고 상대에게 말하는것이 당연한거예요.

그런데 저 일본 기차 사건 말이지요. 그게 막상 내 눈앞의 현실이 된다면 나는 신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모두가 하나가 되서 그에게 덤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한 개인만이 신고를 한다거나 맞선다거나 하면 그 흉기가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질 텐데, 그걸 감수하고 용기를 내어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누군가 한명이 먼저 용기를 낸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따르긴 하겠지만 누구든 그 처음의 한명이 되려고는 하지 않을테니 말이지요. 무서워요. 무섭고 불쾌한 일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본래 페이퍼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저는, 성폭행범들은 다 죽여버려야 될 것 같아요. 거세하거나. 한 여자의 인생을 완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거니깐요.

이잘코군 2008-04-27 09:03   좋아요 0 | URL
DBM에, PMP에, 뭐 각종 영상장비들 다 동원되더라고요 요새는. 전에는 엠피쓰리나 씨디피에 이어폰을 꽂고 크게 듣는 사람들 정도가 문제였는데, 요새는 아예 대놓고 켜고 들으니까요. -_-

살면서 잘못 숱하게 저지르고 다니지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말하면 되는거죠. 그리고 다시 안 하면 되는거죠.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을 못하는, 아니 안하는, 그리고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일본 기차 사건은, 성폭행범이 그 여자를 뒤로 데리고 간 뒤에도 시간이 있었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해요. 그니까 성폭행 당하고 있는 그 시간에도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있었다는거죠. -_-

가넷 2008-04-2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백분토론 봤는데, 재미있었어요. 저도 이 교수님 발언 할때 뒤에 계신 분이 참 예뻐 보이더라구요(????)

이잘코군 2008-04-27 08: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분 유심히 봤어요. 아무래도 가넷님과 저는 비슷한듯. (뭐가?)

야클 2008-04-2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드립니다. 맨날 염장성 페이퍼만 올려서.

이잘코군 2008-04-27 16:42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야클님! :) 야클님은 염장질 계속해도 돼요. 자극받아서 빨랑 저두 결혼(동거)해야죠.

도넛공주 2008-04-2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과를 잘 하는 편인데,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충고도 가끔 들어요."너 그러면 사회생활 못한다"는게 그이들의 요지랍니다.자세히 좀 설명해주지.음.

이잘코군 2008-04-27 21:31   좋아요 0 | URL
흐음, 명백히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는 건 당연한건데 말여요. 잘못인지 아닌지 명확치 않은 것은 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Mephistopheles 2008-04-2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 안하는 이유가 간단하죠. 자신들이 한 행동이 절대 잘못이라고 생각을 않하는 거죠..^^
모두가 잘못이라해도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이잘코군 2008-04-27 23:41   좋아요 0 | URL
-_- 글쵸. 그거죠. 정신상태가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는 것. 아 길게 말했는데 메피스토님이 한 줄로 요약하시네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