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 시공 로고스 총서 26 시공 로고스 총서 26
피터 싱어 지음, 연효숙 옮김 / 시공사 / 2000년 12월
절판


헤겔의 자유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앞서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에게는 우리가 다른 사람, 사회적 환경 혹은 자연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그렇게 검토한 결과 그의 자유 개념을 훨씬 더 잘 이해함으로써 즉시 우리는 그의 관념들의 체계 전체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현상학>>으로부터 헤겔이 모든 인간 역사를 정신 발전의 필연적인 오솔길로 본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정신을 역사의 추동력으로 간주한 사실에서, 우리의 고유한 욕구가--그것이 자연적이든 혹은 사회적으로 제한된 것이든 간에-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는 점을 그가 주장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헤겔에게서 자유는 우리가 기꺼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정신을 갖는 데 있다. 정신은 여타의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하며, 또 정신은 제어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칸트에게처럼) 본성의 비지성적 측면이 단순히 억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헤겔은 우리의 자연적이고 사회적으로 제한된 욕구에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정신에 의해 정렬되고 지배된 위계 질서 내에 자리한다.-122쪽

이성이 정신에 필수적 매개자라면, 그에 따라 정신은 본성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개렵적 인간 존재의 특수한 정신들은 공통적인 보편적 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다. 헤겔은 이러한 점을 좀더 강하게 언급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개별적 인간 존재의 특수한 정신들은 본성적으로 보편적인 어떤 측면, 즉 정신 자체이다. 세계의 이성적 질서에 대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단순히 개별적 인간 존재들이 자신의 정신이 이러한 보편적 정신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신은 이러한 장애물을 조금씩 무너뜨림으로써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123쪽

사실 이는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지는 액화된 모든 인간이 정신적 상태로 존재하는 이미지와 같다. 세계의 종말, 또는 역사의 종말.

소위 '물질적 대상'은 의식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립하는 사물이 아니라, '속성'과 '실체'의 개념을 포함하는 의식의 구성물임이 입증된다. 자기의식의 수준에서,의식은 과학의 법칙들이 자신의 고유한 창조의 법칙임을 깨닫게 되며, 그리하여 처음으로 정신은 자신을 세밀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바로 이 단계에서 의식은 물질적 대상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작동하며, 그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의 본래적 형태와 일치되게 그것들을 만듦으로써, 세계를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그 다음 자기의식은 또한 이성이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는 발견에서 정점을 이루는 과정인 사회적 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달리 말하면, 비록 우리가 정신이 실재를 알려고 할 때 단지 정신의 오솔길만을 추적하기 시작했지만, 길의 궁극에 가서 우리가 정신이 실재를 구성한 대로의 정신을 관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126-127쪽

피터 싱어 또한 지적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물자체'를 부정하거나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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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들뢰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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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 시공 로고스 총서 26 시공 로고스 총서 26
피터 싱어 지음, 연효숙 옮김 / 시공사 / 2000년 12월
절판


우리 욕구 중의 어떤 것은, 선천적 식욕이나 혹은 잠재적으로 더욱 발달하기를 희망하는 성욕처럼, 우리 본성의 산물이다. 우리의 다른 욕구들 대부분은 우리가 받는 양육, 교육,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의 환경에 의해 일반적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욕구들의 기원이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각 경우에 우리가 욕구들을 선택한 것은 아니란느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욕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60-61쪽

그래서 결국 도출되는 것은 '이성을 따르는 행위'가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라는 것, '나'라는 '주체'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 걸린다. 즉 육체에서 파생되는 욕구는 비본질적인 것이고 '주어진 것'인 반면, 정신에서 파생되는 이성은 본질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라는 전제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들을 살펴보자, 물론 칸트와 헤겔은 가장 주요하게 자유의 실현에 있어서 '공동체'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큰 차이가 있다.

나의 동기는 단순히 이성과 도덕성의 보편적 법칙과 일치되어 그 자체를 위하여 행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이 나의 의무라는 이유 때문에 수행해야만 한다-칸트 윤리학은 때때로 '의무를 위한 의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칸트가 말한 바로부터는 정말로 우리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위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는 사실이 나온다.-64쪽

"의무에서 개인은 단순한 자연적 충동으로부터............. 해방을 맛본다. ...... 의무에서 개인은 그의 본질적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은 참이다. 칸트를 직접적으로 논평하면서 헤겔은 말하길, "나의 의무를 행하면서 나는 홀로 자유롭다. 의무의 이러한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칸트 철학의 장점과 그것의 전망의 품위가 형성되었다."
헤겔에게는 그 자체를 위해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것은 우리가 원해서 행하는 자유의 소극적 개념에서 괄목할 만하게 전진한 것이다. -65쪽

헤겔은, 우리가 다른 인간 혹은 우리의 본성적 욕망 혹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자유에 관심을 갖는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가 이성적으로 선택할 때만 그러한 자유는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가 보편적 원리들과 조화를 이루어 선택할 때에만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헤겔은 생각한다. 이렇게 선택하여 우리의 권리가 만족스러워진다면, 보편적 원리들은 이성적인 노선에 따라 조직된 유기체적 공동체에서 반드시 구현될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에서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은 조화를 이룬다. 나의 의무를 선택할 때 나는 자유롭게 선택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성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며, 나는 보편자의 객관적 형태, 즉 국가에 봉사함으로써 나 자신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 보편적 법칙은 국가의 구체적인 제도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나에게 공동체 내에서 나의 입장과 역할에 대한 특정한 의무들을 지시한다.-76-77쪽

위 구절에서 '국가'라는 것을 현대의 nation-state의 일반적 형태라고 인지하면 안되는 것 같다. 헤겔의 전제로서 국가는 정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삶'을 지시하는 것이며 '전체로서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전체'와 '부분' 또는 '보편'과 '특수'로서의 국가와 개인 사이의 변증법적인 논리를 살펴보아야만, 어떻게 헤겔적 의미에서의 '자유', '공동체', '국가'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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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2년 동안 고생한 댓가(?)로 오늘 외무고시 최종합격했다. 사실 합격하면 함께 할 일의 리스트까지 만드려고 할 정도로, 기대했던 일인데 막상 합격이 되자 조금은 멍했다. 그리고 외교관으로서의 삶, 그리고 앞으로 내 삶 등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내가 아마도 선택하게 될(?) 학자 특히 국문학도와는 전혀 다른 삶이라 할 수 있다. 외교관은 사람을 만나며,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며, 아마도 성격이 좋아야 할 것이다. 반면, 내 주위에 보이는 국문학도는 진득이 앉아서 국문학 텍스트를 열라게 보아야하고(돋보기는 필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힘들며, 대부분 성격이 특이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비국문학 전공자들이 국문학 전공자들에게 말한다. 단, 여기서 '전공자'라고 하면 석사과정 이상의 의미이다 ^^; )

흠흠. 그렇게 다르니, 어쩌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다. 앞으로 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어짜피 한 번 인 것, 경험해보지 못하는 삶을 다른 상대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어쨌든 애인은 오지 근무를 희망하고 있어서(아프리카 등) 조금 걱정은 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밖에서 나가 노는 것보다는 방에서 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방에 꼼짝안고 틀어박혀서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제일 좋은 것은, 애인과 함께 그렇게 방에서 꼼짝안고 함께 책보고 영화도 보고 하는 것 ^^;

뭐. 어쨌든 축하할 만한 일이고, 애인과 열심히 놀아야겠다.

하지만, 요즘은 석사논문 최종으로 다듬고 있는 중. 쩝;;; 그래도 놀 때는 놀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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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6-2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축하드려요 !!!! +ㅁ+
외무고시라니 굉장하군요! >ㅁ<)b
하는 일은 달라도 애인분과 앞으로도 좋은 관계 유지하셨으면 좋겠어요! 잇힝-

비자림 2006-06-2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애인님이 재원이군요.
축하드려요. 사랑과 일. 삶의 목표와 방향. 님의 머릿속이 즐거우면서도 바쁘시겠군요. 우선 님의 일을 잘 매듭짓기를 바랍니다.
흠, 물론 꽃다발 한아름 선사하셨겠지요? 호호호

기인 2006-06-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고맙습니다 ㅎㅎ :)
비자림님/ 옷; 꽃다발을 선사한게 아니라 맛있는거 제가 얻어먹었는데요? ^^; ㅎㅎ

werpoll 2006-06-3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 어렵다는 외무고시! 축하드려요!
외교관이라. 한때 제 장래희망이었거든요 -.-ㅋㅋ
이과반에 있으면서, 학교에서 직업에 대한 조사를 할때 원하는 직업이 외교관이라고 했다가 애들의 웃음을 샀던ㅜ_ㅜ
지금은 이제 다른 꿈이지만요 ^^; 그래도 외교관에 대한 꿈은 아직쪼끔 남아있어요
아무튼 그래서인지 기인님의 애인분 부러워요~ㅎㅎ

기인 2006-06-3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토깽이탐정님 처음 뵙겠습니다 :) 애인 말로는 합격자 중에 매년 꼭 한명씩 공대분들이 계신다던데요 ^^ 외교관은 참 특이한 직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

balmas 2006-06-30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시네요.
애인님도 그렇고 애인님을 애인으로 만든 기인님도 그렇고. ㅋㅋㅋ
어쨌든 축하드려요.
미래를 잘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

마태우스 2006-06-3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 어려운 외무고시를 합격하다니, 기인님의 내조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조선인 2006-06-3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축하드려요. 그런데, 앞날도 여러 모로 걱정이시겠네요. *^^*

기인 2006-07-0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ㅎㅎ 감사합니다. 아 미래라;;
마태우스님/ 네. 사실 제 덕분에 합격한 거죠 ^^; ㅎㅎ
조선인님/ 네 고맙습니다. :) 흠. 앞날이 참 두근거리네요.

로쟈 2006-07-0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의 '외조'가 아니구요?..

기인 2006-07-0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 사실 놀아달라고 떼만 썼지, 한 것은 없습니다;;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일본 소설 <초밥> 서평단 모집!

안녕하세요,
알라딘 편집팀 박하영입니다.

뜨인돌 출판사에서 출간된  일본 소설 <초밥>을 읽고 리뷰를 써주실 독자 10분을 찾습니다.
이전에 진행된 <이우일 선현경의 신혼여행기>,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 서평단에 뽑히신 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양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900년대 초, '일본 근대 문학 부활의 첫울음'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들어선 여성 작가 오카모토 카노코의 단편집. 그녀의 작품들 중 음식을 테마로 쓴 네 편의 소설을 선별해 엮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음식에 투영되어, 때론 매콤하고 아릿하게, 때론 쌉쌀하고 달콤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음식을 통해 삶의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한 노 신사는 신선하고 상큼한 '초밥'을 먹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반추한다. '식마'의 요리 선생 베츠시로는 끊임없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식재료를 통한 요리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집 유령'은 추어탕집 대대로 내려오는 여주인들의 운명, 떨칠 수 없는 가업의 굴레에 대한 이야기다.

오카모토 카노코는 생명의 고향으로서 음식을 선택하고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먹이에 대한 집착과 사유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초밥', '집 유령', '식마'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동시대 작가뿐 아니라 후대의 여러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서평단에 참여하길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신청합니다"라고 써주시면 됩니다.
*  신청해주신 분들 가운데 10분께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신청은 6월 27일 화요일 오전 10시까지 받습니다.

서평단 모집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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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 23일까지 써야 함. 일본 근대소설은 언제나 한국 근대소설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