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라님의 "등록금 천만원 시대 꼭 대학에 가야할까?"

사고가 너무 수동적으로 된 듯. 대학가서 투쟁해야죠! 혹은 가기 전에 대학교육 쟁취해야죠! 내라고 다 내면 어떻해요!! 역시 이 또한 학생회의 '몰락'과 관련이 큰 듯. 집회의 자유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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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내가 처음 접한 건 허세욱 선생이 옮긴 범우문고판 <장자>였다),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P.S. 참고로, 교수신문에 연재됐던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는 안동림과 오강남 역주의 <장자>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표플 얻었지만 반론도 만만찮은 것으로 소개돼 있다. 지난 1963년 최초의 완역본이 출간된 이래 6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학자와 종교학자의 번역이 가장 '읽힐 만한' 번역으로 추천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거기에 '재야' 고전학자의 새 번역본이 보태진 셈이다. '정역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하여 전문가의 조언을 같이 옮겨둔다.

교수신문(05. 07. 04) 장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고전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의 다양성은 모든 고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따라서 ‘장자’를 펼칠 때는 먼저 어떤 시각에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삶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번득이는 지혜로 가득 찬 우화집으로 읽힐 수도 있고, 특유의 도가적 상상력으로 포장된 신화적인 사유의 보고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주제들을 탁월한 레토릭으로 버무려낸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문제의식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장자’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들이 조형된 시기가 중국철학의 황금기인 ‘戰國’ 시대라는 점도 이런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므로 ‘장자’에 대한 제대로 된 독법은 그것을 한 권의 철학서로 읽는 것이다.

‘장자’를 철학서로 읽고자 할 때 그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늪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선이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첫째, ‘장자’에서 구사되는 언어적 표현들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장자’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구사 방식은 크게 ‘우언(寓言)’과 ‘중언(重言)’과 ‘치언(癡言)’, 세 가지로 나뉜다고들 말한다. ‘우언’은 말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른 말 속에 은폐시켜 전달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이미 확립된 사람의 입을 빌리는 이중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며, ‘치언’은 마치 내용물이 일정 기준 이상 차오르면 저절로 기울어져 쏟아지도록 고안된 술잔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시종일관 거부하는 표현법이다. 이와 같은 언어구사 방식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특유의 통찰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런 까닭에 ‘장자’를 읽을 때는 언제나 이른바 ‘행간’을 읽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장자’는 연대기를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저자들이 만들어낸 집단 저작물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화된 견해에 따르면, ‘장자’에는 적어도 너댓 가지의 사상적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장자 본인의 사상에서부터 그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자후학들의 사상, 한비자류의 법가적인 경향성이 강한 사유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사유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탈속적인 개인주의적인 성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혼재된 생각의 갈래를 개략적으로라도 묶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자’는 고작해야 잡다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끌어 모아 놓은 단편들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셋째, ‘장자’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의 성격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장자’에 담겨 있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전국’이라는 시대가 제기한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소화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중국의 전국시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이후의 동서양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제들의 원형이 제시된 시기이다. ‘장자’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분위기의 중심을 관통하며 형성된 고전이다. 장자 본인의 사상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 내편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을 비롯해 ‘주체’, ‘타자’, ‘언어’, ‘소통’, ‘실재’, ‘몸’ 등 그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장자’는 이런 주제들이 특유의 탈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심미적 세계관 속으로 수렴된 결과다. 이점이 또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상황에서 ‘장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먼저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며 구축해내는 철학적 사유의 정수와 대면하는 작업이다. 몇 번의 두레박질로 모두 길어 올리기에는 그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은 책, 그것이 ‘장자’이기 때문이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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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략 난감. 말이, 자유여행인데, 준비한 거라고는 밀란 쿤데라 책 두권, 카프카 단편전집. 그리고 퍼펙트 프라하라는 여행책 뿐. -_-;

물론 여권과 비행기표는 챙겼으나;; 8일동안 입고 간 옷..으로 대충 때우고,, 속옷이랑 양말만 넣고. 그냥 말그대로 '자유'여행이라는 의미로 별반 계획도 없습니다.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네요.

비행기가 12시간 직항이고 공항 대기 시간도 있으니까, 그 안에서 우선 밀란 쿤데라와 체코여행서를 다 읽을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슬렁슬렁 카프카 읽으려고요. ㅋ 딱히 프라하를 가보고 싶었다기 보다는 (저는 원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서 어디도 '가보고' 싶은 곳이 없습니다. 가지고 싶은 집은 있지요. 국회도서관 옆의 아담한 단칸방 같은 것! ㅋ) 애인이 교환학생 가는김에 따라가는 거고, 그냥 여유롭게 '동유럽'이라는 곳, 프라하가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쓰윽 둘러보고만 오려고요. ㅎ

아아 이제 이 페이퍼를 쓴 이후에는 슬슬 가방을 챙겨야 겠네요. 음.. 칫솔과 치약은 항상 가방에 가지고 다니고 (그냥 매일 메고 다니는 배낭가방가지고 갑니다;;) 여권이랑 비행기표 챙기면 되고, 추리링이나 한벌 더 챙기고. 음. 로션 챙길까나. 서울보다 쫌 더 춥다는데 챙겨야 겠네요. 그리고 역시 앞서 말한 책4권. 뭐 끄적일 노트 한권은 가서 사면 될꺼고. 펜은 있고. 음... 그냥 이렇게 갔다가 오죠 뭐;;

음.. 대충 이정도면 ㅇㅋ. 건강하고 사고만 없이 잘 다녀왔으면 좋겠네요. :)

07.01.27~07.02.04 도브리덴 프라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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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2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기인님 글을 못 보는 것이 섭섭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동유럽의 아름다움 만끽하시기를

로쟈 2007-01-2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코어로 나왔다는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꼭 챙겨오시길. 그거 '소장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매지 2007-01-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히 돌아오시옵소서. 제가 몇 군데 가보고 싶어하는 곳 중에 한 곳이 체코인데 부럽네요 ㅠ_ㅠ

건우와 연우 2007-01-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가넷 2007-01-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잘 다녀오세용..;

프레이야 2007-01-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담한 것처럼 하셔도 무척 설렐 것 같아요.
아름다움, 흠뻑 취하시고 잘 지내다 오시기 바래요^^
갖고 가시는 책들, 국회도서관 옆의 단칸방,,, ^^

LAYLA 2007-01-2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로쟈님 댓글에서 웃음이 났어요. 잘 다녀오세용 건강히 ^,^)/

기인 2007-01-2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감사드립니다. ㅎㅎ
근데 로쟈님;; 저 체코어 알아볼 수도 없는데요?;; 음.. 서점은 들려볼 생각이기는 한데 ㅋㅋ 뭐 알파벳을 쓰기는 하니까 알아볼 수는 있겠지요. :)

물만두 2007-01-26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로쟈 2007-01-26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기인님은 읽을 수 있는 책들만 사시나요?!..

기인 2007-01-26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로쟈님/ 우선은 책 '제목'을 알아볼까라는 말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질화된 책 자체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는 편인 것 같아요. 사실 돈도 없고요;;; ㅎ

릴케 현상 2007-01-2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바이^^

Mephistopheles 2007-01-26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히 다녀오시길...그런데 양질의 사진을 기대하는 건 좀 무리일까요.???
설마 거기가서 죙일 책만 보는 건 아니시겠죠.?

기인 2007-01-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홋; 굳바이는 쫌;; ㅎㅎ 잘 다녀올께요 ^^
메피스토님/ ㅋ 음. 애인이 디카를 가져가기는 할 텐데... 애인이 나중에 사진을 파일로 보내주기는 할테죠. 그러면 올려볼께요. ㅎㅎ 근데 쫌 시간이 걸릴듯;;;

나비80 2007-01-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히 다녀 오세요. 이것 저것 많이 보고 오시구요.^^
 
 전출처 : 이잘코군 > 영어로 학문하기(이남호)

2007. 1. 26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1/h2007012519150824370.htm

[아침을 열며] 영어로 학문하기

최근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이 영어 강의를 적극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카이스트(KAIST)를 비롯한 몇몇 대학은 아예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강의할 것이라고 한다. 영어 강의 및 국제화가 대학 변화의 핵심 트렌드가 되었다.

이는 몇 년 전 고려대에서 시작된 '영강' 및 국제화 전략을 앞다투어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한국의 대학 캠퍼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마을'이 될지도 모르겠다.

● 캠퍼스를 영어마을 만드나

영어 강의가 아니더라도 학문 용어들의 대부분은 이미 영어여서 영어를 외면하고는 학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몇 년 전 뜻있는 몇몇 학자들이 모여서 우리 학문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을 위해서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후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얼마만큼 결실을 거두었는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영어로 학문하기'에 재생불능의 완패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너나없이 민족을 최고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영어 강의 열풍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반발이 없고, 교수들도 영강 시행의 무리함을 작은 목소리로 지적할 뿐 영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영어 강의라는 큰 바위에 한글사랑이라는 계란을 던질 엄두가 나지 않는 현실이다.

현재 대학에서의 영어강의는 문제가 많다. 가장 일반적인 문제점은 강의 내용의 부실이다. 교수나 학생 모두 영어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학습 효과가 매우 낮아진다.

뻔하고 상식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한 교실에서 심도있는 학문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언어를 고급스럽게 구사해야 하는 특정 학문 분야에 따라서는 코미디 같은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강의 소통의 차원에서도 문제이지만 강의 준비의 차원에서도 문제이다. 다수의 교수나 학생이나 영어 준비를 하느라고 수업 내용을 충실하게 준비할 여력이 없어진다.

처음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이 과정을 겪어야 제대로 된 영어강의가 이루어진다고 변명을 하지만, 영어강의 연습 하느라 일반 수업이 희생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영어강의는 대학교육의 부실화를 넘어서 우리말의 빈곤을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대학 사회는 가장 지적이고 창조적인 사유가 생산되는 공간이다. 지속적인 지적 사유의 표현을 통해서 언어는 발전한다.

조선시대의 지적 사유는 거의 한문으로 표현되었고, 한글은 단순한 생활언어였다. 고급한 지적 사유를 한글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한글은 아직도 고급한 지적 사유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서툰 면이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고급한 지적 사유가 주로 영어로 표현되는 세상이 된다면 한글은 또다시 '언문'의 위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 대학교육 물론 사유의 빈곤 초래

물론 영어의 현실적 중요성은 크다.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위상은 이미 공고하고, 국제화가 진행될수록 영어의 패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머지않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라는 강력한 무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학사회 전체를 영어마을로 만들고 영어로 학문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 영어 강의를 많이 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라는 생각은 비지성적이다.


이남호ㆍ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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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저널리스트 작가'고종석의 꿈

이번주 한겨레의 '한국의 글쟁이들'은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을 다루고 있다.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씨가 글을 썼는데,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나름대로 많이 읽고 잘 안다고 생각한 이 '글쟁이'의 특이한 면모도 읽을 수 있다. 가령 남의 소설을 안 읽는 기벽 같은 거. '방주'에 넣어두려다가 아끼는 마음에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게 후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책 <감염된 언어>의 서문에서 일부를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1. 26)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나 또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던 시절 가장 많이 복사해서 나눠준 자료이기도 하다. 하니 '그 공'은 내게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내가 읽은 고종석의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돈 아까운 책이었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07. 01. 26. 

 

 

 

 

P.S. 그의 첫소설 <기자들>은 절판이라서 알라딘에는 아예 뜨지도 않는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책들 가운데 드물게도 읽지 않았다). 대신에 가장 많이 팔렸다는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네 권' 안에 채워넣도록 한다. 나머지는 나도 모두 읽은 책들이다. 그 중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에서 그가 (서문을 대신하여) 길게 쓴  서문 '서툰 사랑의 고백' 중 한 대목. 

사전 편찬자의 꿈을 접은 뒤, 나는 한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직업적인 글쟁이가 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몽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간단한 편지글 말고 내가 앞으로 외국어로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또 내가 외국어로 기다란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륵이나 김은국만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작업을 프랑스어로 수행한 뤼시앵 골드만이나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야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그 사람들은 동유럽의 조국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 유년기를 둘러싹 있던 언어는 오직 한국어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건 내 운명이다.(...)

이런 모든 꿈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 지금, 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으로 한국어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평가받을 만한 글 말이다. 아직은 그것이 몽상에 불과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한국어로 글을 쓸 작정이므로, 이 꿈은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읽을 만한 한국어로 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10대 이래 내가 지녔던 몽상들 가운데 실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유일한 목표다.

실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최인훈, 조세희, 김원우, 복거일, 이인성, 최윤 등 여럿이다. 그들이 대체로 번역 문투를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말에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를 19세기 말의 한국어와 견주어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어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 최인훈에서 최윤에 이르기까지 외국어에 된통 감염된 한국문학은 세련과 풍요를 향한 한국어의 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그들만큼 볼품있게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애써볼 작정이다.(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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