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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평점 :
대학 다닐때, 우리는 주사파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공부 좀 하라고, '아직도' 주체사상이냐고. 주사파로 묶일 수는 없지만, 소위 NL세력들에 대해서도 '통일'을 항상 소리 높여 부르짖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북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해방'되어야 할 객체도,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별 관심 없었다. 타자.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요, 남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주체는 더욱 아닌. 타자.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계기는, 대학원에 들어와서 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 때문에 금강산 관광 관련해서 간사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금강산 관광을 준비하며 북한의 까다로운 태도와 외국인들이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날카로운 감정들을 새삼 느끼면서, '북한'이라는 미묘하고도 까다로운 주체에 대해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록 제한되고 통제된 금강산이나마, 그 곳을 밟았을 때. 김정일, 김일성의 이름이 붉은 그야말로 '용사비등'한 문체로 곳곳의 바위와 건물들에 새겨져 있는 땅에 섰을 때. 그들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를 걸고, 조금은 마른 북한 남자와 조금은 촌스러운 북한 여자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때의 충격! 북한이라는 것은 남한을 전제해야만 존재하고, 남한은 북한을 전제해야만 존재한다는 것. 논리적으로도 '북'과 '남'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우리'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 언어 민족주의의 '위대한' 힘이여.
남한에서 차로 불과 30여분 가서 북에 도착할 때 흘러나왔던 '방갑습네다' 노래는 철책선과 군인들의 살벌한 경계에 뛰던 가슴을 또 다르게 움직였고, 북에서 출발할 때 '다시 만날 그 날까지'의 가사가 가슴을 때렸다.
그랬던 북한. 또 훈련소 입소 때, 하필이면 그 때, 북한의 '핵실험'이 실행되어 비상이 떨어졌고, 하필 그날 야간행군을 끝내고 불침번을 서다가 졸았던 때, 중령이 시찰을 돌아서 걸리게 된 훈련병 나.
군에 있을 때, 북한은 악마이고 전쟁 외에는 알지 못하며, '미친놈'들이니 이제 갈 때까지 간 거라는 '세뇌'에 지쳐갔다. 북한의 '민중'들은 한 없이 가까우면서도, 한없이 먼, 그래서 정말 공포의 대상인 미지의 존재로 각인되어 졌다.
그리고 얼마 전, 중학생과 고등학생에게 논술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북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었다. '불쌍한 나라'라고. 얼마 전에 있었던 핵실험이나 2002 월드컵 시기의 '서해교전'은 그들의 기억 속에 없었다. 한없이 불쌍한 나라지만, '타자'. 그들의 인식은 내 학부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북한에 사는 소시민들의 일상사. 일상을 통해서만이 '사람'됨이 드러나고 구성된다고 할 때, 정말 이 책은 '북한'의 소시민들을 잘 그려낸다. '북한'이 '타자'가 아닌 '우리'로 드러난다. 공포나 연민의 대상이 아닌, 대화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상으로.
물론 북한은 그러한 대상만은 아니다. 대미관계나 미국의 압박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무력도발 가능성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안온하게 살고 있는 남한의 소시민들을 압박한다. 2002 서해교전에서 국가장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병사들은 죽어가며, 서로를 죽여가면서 '국가'라는 이름의 대리전쟁을 치른다. 이로 인해 우리 '국민/인민'들은 다시금 '남한' 또 '북한'으로 호명되며 이는 다시 '북한-빨갱이 미친놈', '남한-미제의 압잽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각인된다. 우리는 다시 '우리'됨을 그치고 서로의 철책선을 상기한다. 북한과 남한으로 존재한다.
결국 문제는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기보다는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로 물어야 할 것이다. '북한'이라는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 인민은 '남한'이라는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 국민들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특정한 성질을 갖는 대상으로 드러난다. 그럴 때, 이와 같은 책의 역할은 '북한 인민의 일상'과 '남한 소시민의 일상'이 만나는 점에 있어서의 '북한'이라는 대상. 그 따뜻한 공유지점들과 소중한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남/북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호명되지 않은 균열지점들을, 하나의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북한'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의 하나로 기능해 북-남, 남-북 관계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기를. 아니, ‘북한’ ‘남한’으로 존재하는 것을 멈추고, 함경도, 황해도, 평양의 ‘우리’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결국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괴물인지, 동포인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