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가난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엠마뉘엘 수녀의 이 '풍요로운 가난'은, 얼마전 유행했던 피에르 쌍송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나 행복의 본질은 물질적 조건에 있지 않음을 역설 알랭의 "행복론"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녀는 가난 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활동하며 평생을 보내며, 빈곤을 퇴치해야 할 것으로 여기며 사회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과 같은 점은 제목 그대로 가난한 삶의 풍요로움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

그래도 결국 수녀님의 방점은, 빈곤의 퇴치에 있으며, 나누는 삶을 전도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개신교, 카톨릭 포함하여) 많은 비신도들에게 있어서 폭력적이며, 비신도들은 기독교도들에게 거부감을 갖는다. 우선 첫째, '예수천국, 불신지옥'과도 같은 표어로 보여지듯, '무조건'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가고,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식으로 단순화된 신앙에 대한 비신도들의 반발이다.

또 둘째로 예수를 믿는 이들의 삶 또한 별반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기독교도들의 행위를 '천국에 가기 위한' '위선'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도나 비신도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엠마뉘엘 수녀는 이 책 어디에서도, '예수를 믿어라, 그래야 천국간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도 좋은 사람이고, 중요한 것은 '선함'이라는 어떻게보면 급진적인 생각을 곳곳에 담고 있다.

남한의 기독교는 기복신앙화 되어, '예수를 믿으면 복이 온다'라는 식으로 왜곡되었다. 본래 종교의 역할은 삶을 '편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게 하며, 세계관을 이타적으로 변화시켜, 결국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데 있다.

예수가, 석가가, 알라가, (공자가)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복을 빌라고 했던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진리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항상 남을 먼저 위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그것이 성인들의 말씀이고 종교일지언데..

남한의 기독교 신도들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을 주는 예수' '천국의 열쇠를 예비한 예수'와의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일 뿐인가.

종교는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위안의 심리학'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배 이데올로기로 적극 봉사하고, 인민의 독한 아편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엠마뉘엘 수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본받는 것,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 이 책이 의미있는 이유는, 쉬운 언어로 많은 사람들이 아는 진리인, 물질적 부가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저 낮은 곳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웃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녀님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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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2-2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추천만 합니다. ^^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강유원 선생의 입문서. 그야말로 입문서다.

맑스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면 좋을지에 대한 안내도도 나름 그려주고 있어, 맑스를 '들어만 본'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듯 보이는 한 사상가에 빠져들 수 있는 괜찮은 지도가 될 것 같다.

강유원 선생에 따르면 좋은 접근법은

헤겔 '역사철학 강의'를 읽고, 맑스 텍스트를 읽는다 정도;;;

그 와중에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하비)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정도 읽어주면 ㅇㅋ

(생각해보면 내가 다 읽어본 책인데, 괜찮은 접근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로 '입문'만 하는 교양강좌의 강의록 비슷하게 되어있어, 왠만큼 맑스를 읽고 있다면, 적어도 박종철출판사의 선집과 <자본>은 들추어본 적이 있다면, 별반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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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2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학기때 읽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 책이네요.-_-; 집에 어디 꽂아 두었는데 기억이 안나는 건지... 아니면 지하철에서 두고 내린 건지... 아니면 강의실에서 읽다가 두고 나간 것인지...
생각만 하면 현기증이-_-; 다시 살려고 하니, 집에서 둔것 같기도 해서 ... 뭐 집에서 찾다 보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요번에도 1년 뒤에 나올려나;;;

기인 2007-02-2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별로 다시 살만한 책은 아닌 것 같은데요? ^^;
그늘사초님이면, 그냥 맑스-엥겔스 선집 읽으시는 것이 더 좋을 듯. 강유원 선생책은 공산당 선언 1장만 꼼꼼히(?)읽은 것인데, 사실 2장이 정말 논쟁적이거든요.

로쟈 2007-02-2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든 월급쟁이를 프롤레타리아라고 규정한 대목이 있었던 듯한데, 기인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월급받는 대통령도, 판검사도, 재벌기업 이사도 다 프롤레타리아?)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리더군요...

기인 2007-02-2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모든 월급쟁이를 pt라고 규정한 대목은 제 기억에는 없고, '부장님'도 pt라는 대목은 기억납니다. 조금 들추어보니,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면 계급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pt는 알거지 상태로 전락하기 직전이 된다.' (167면)이 보이네요.
좀 논쟁적인 지점은 로쟈님도 지적하신, 좌파는 우파를 경유한 근대인이라는 것. 그러면 pt는 좌파가 아니게 되고, '좌파냐 우파냐'는 '근대인'인 지식인만의 문제로 규정되는 것인 듯 합니다. (서문)에서..

로쟈 2007-02-2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대목은 108쪽에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본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는 반드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속한다. 그 사람이 어떤 직장에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있건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인 것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 하여 그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의 노동자에 대한 핵심적인 규정이다." 그러니까 억대 연봉을 받는 기업체 간부이건 교수이건 로펌 변호사건 다 '노동자'란 것이고, 동네 분식점 주인은 (이에 따르면) '부르주아'라는 논리 아닌가요? 그럴 경우 '가난'이란 건 노동자를 규정하는 핵심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게 '현대 노동자에 대한 핵심적 규정'이라고 단언하는데(제 생각엔 '상식 이하'의 규정이건만),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린다는 것이죠...

기인 2007-02-27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다시 읽어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구분이 있고, pt와 bg라는 구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산수단이 없다는 점에서의 pt와 bg로 나뉠 수 있겠고, 직업에 따라서 노동자냐 아니냐가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 말씀처럼 억대 연봉을 받는 기업체 간부, 교수, 로펌 변호사는 노동자이지만, bg일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재산을 통해 (이자, 주식투자, 부동산 등) 이윤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직업적으로는 노동자이지만, 계급적으로는 bg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밀히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pt와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라는 구분을 하려는 노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

로쟈 2007-02-2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기인님의 pt론인가요?^^ 논리적으론 네 가지 범주가 가능한데요. 노동자bg, 노동자pt, 자본가bg, 자본가pt(?). 그런데, 강유원은 이 '노동자'와 'pt'를 '구분 없이' 쓰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기인 2007-02-27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유원 선생은 구분있이 쓰고 있으니까 (사실 엄밀히 강유원 선생을 분석해본적도, 그럴 필요도 못 느꼈지만 ^^;) 네 가지 범주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왜 노동자냐. 우리도 노동한다. 등. 결국 노동자는 계급적 의미보다는 노동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에 댓가로 임금을 받는 이가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pt냐 bg냐는 결국 '재산(증식될 수 있는. 결국 유사자본)'의 유무로 판단해야 겠지요. 제 생각을 페이퍼로 쫌 정리해봐야 겠습니다. ㅎ

로쟈 2007-02-2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까 "직업적으로는 노동자이지만, 계급적으로는 bg"란 말씀은 아무래도 '새로운' 주장이신 것 같습니다(pt와 bg의 구별이 유사자본의 유무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씀도). 기존의 '즉자적 노동자'와 '대자적 노동자'란 카테고리도 넘어서는 것이니까요. 그 즉자적/대자적이란 범주까지 도입하게 되면 분류항은 8개가 될 터인데... 흠...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백인 사회에서 성장한 많은 코리언 입양아들은 양부모나 지역 사회의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차별에 시달린다. 자신들의 노란 얼굴은 "부모로부터도 나라로부터도 버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낙인"이라고 말한 입양아가 있었다. 미희 역시 자신의 출신을 알아내 존엄을 회복하고 싶다는 갈망을 지닌 채 열여섯 살때 양부모의 집를 나왔다. 자립해 생활하면서 예술을 배웠고 처음으로 제작한 단편영화에는 코리언 입양아가 베트남풍의 밀짚모자를 들고 등장한다. 그것은 농담이나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 자신이 당시에는 조선 문화와 베트남 문화의 차이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224-225쪽

어린시절. 외국경험. 결국에는 '타자'로서의 위치. 코스타리카라는 중남미 국가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녔기에 조금 덜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찌보면 더 할 수도 있었던 것. 학교는 차를 타고 1시간은 가야했고, 주5일제와 방학등에는 할일이라고는 집에서 책을 읽는 일 뿐에는 없었다.
당시 학원세계문학전집, 학원한국문학전집을 한국에서 올 때 가져왔어서, 초딩때부터 의미를 알 수 없었어도, 할일이 전혀 없었기에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의 긴긴 겨울밤이 장편소설의 부흥을 가져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 또한 일종의 섬에서, 긴긴 낮과 밤들을 소설을 읽어내려갔었다.
여하튼. 너는 '타자'라는 낙인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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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해 인류의 그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Les damnes de la terre, Francois Masper edituer S.A.R.L., 1961)-105쪽

계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태어나 프랑스 본국에서 정신의학을 배운 후 알제리 해방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 한 사람 디아스포라의 강렬한 말이 동아시아의 디아스포라인 나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은 '식민주의'의 '계통적인 부정' 때문이다. 그것은 나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디아스포라로서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모습이 아직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105-106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현대 한국인이라면 물어야 하는 물음이 아닐까. 식민주의. 아직 끝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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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일본을 떠나기 전에 "영국에 가는데 묵는 호텔이 미국 대사관 부근"이라고 했더니 "자폭공격의 표적이 되니까 테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불운을 한탄하지 않을 자신은 없고, 공격한 자를 증오하지 않을 자신도 없지만, 그 운명을 끔찍하게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는 충분히 그와 같은 죽음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폭공격이라는 행위가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한, 내가 거기에 말려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나는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살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기득권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종사하면서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개척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 때문이다.-46-47쪽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적 상상력은 '국민'을 하나의 유기적인 신체로 상상한다. 프로이센의 농민 아무개, 작센Sachsen의 장인 아무개, 바이에른Bayern의 공증인 아무개를 일괄해 '독일인'으로 상상한다. 그러기에 라인 강변의 누구누구가 '프랑스인'에게서 상처를 입으면, 프로이센에서도 작센에서도, '우리'가 상처받았다고 분개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간다. 추도의 의례는 그 소름끼치는 국민적 상상력과 깊이 연결돼 있다.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바친 자들의 묘. 그것은 이미 개별적인 사자의 묘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념, '국민'이라는 관념의 묘인 것이다.-59쪽

인간은 또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귀족과 노예, 지주와 소작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로 인류사회학을 이해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해방을 지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서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노예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왜 검은 피부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났는가? '생의 우연성'과 연관되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근대 이후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운명의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것으로, 세속적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필요하게 된다. 그 '변환 장치'야말로 내셔널리즘이라고 앤더슨은 말하고 있다.
개인들은 운명의 우연성과 유한성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다. 종교 사상도 이미 의지할 게 못 된다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죽음이라는 궁극의 숙명성을 견뎌내야 하는가. 거기서 영원불사의 존재로서의 '국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60-61쪽

1936년,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바라 겐자부로가 조선 사람들을 향해 "천황 폐하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소아小我를 버리고 크나큰 존엄에 살아 국민으로서 참 생명을 발양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니, 참으로 살고 싶으면 죽으라는 것이다. '나'는 유한하지만, '국가'나 '국민'은 무한하다. 따라서 '국가'나 '국민'을 위해 죽으면, 그 '나'는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근대의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국민'이라는 관념, 국토나 혈연의 연속성, 언어의 문화의 고유성과 같은 환상에 의해 구성되는 이 만만치 않은 관념은, 인간이 갖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사의 욕망에 의해 지탱된다. 자신의 재산 혈통 문화를 영구히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내셔널리즘의 토대가 된다. 이 관념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우연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61-62쪽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는 것이다, 혼자서 살고 혼자서 죽는다, 죽은 뒤는 무無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내셔널리즘에서 오는 현기증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달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다.
분명히 마르크스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에서 유대-기독교적인 종말론의 영향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다. 계급투쟁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를 거쳐 계급의 소멸에 이르면 그 시점에서 인류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는 구상은, 일종의 종말론적 유토피아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불사에의 바람을 이러한 구상에 기대어 해소하고자 한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정권 붕괴 이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이 민족주의 정당이나 원리주의 집단으로 변모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죽음과 불사를 둘러싼 상상을 해소해줄 대상을,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62쪽

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또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도 없으리라.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71쪽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의 민중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는 대신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자기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고 썼다. (.....)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 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로 전락할 운명을 지닌다고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냉소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식민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피억압 민족의 저항을 눈엣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76쪽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77쪽

개인적으로 주요한과 이광수. 사실 그들의 사상을 좇다보면 묶일 수 없는 존재이지만 빈번히 묶이는 이 두 '민족주의자'들이 파시즘으로 회귀한 것. 김지하 시인이나 신비주의적 국수주의로 퇴행하는 이들. '파시즘'의 매력에 대해서 더 공부해 봐야한다. 이 문제는 풀면서, 1920~40년대와 1980~2000년대를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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