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는 꽤 부끄러운 고백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 없게 할 일이 없는 사람이고, 친구도 없고, 그런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부끄럽게도 나는 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고 이를 밝힐만큼 뻔뻔하니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사실, '내'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할수도 있다.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 '내' 그림자의 소유를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누구에게서 선물받거나 구입한 기억이 없다. 사실 이를 누가 가져간다고 해도 별 상관을 안 쓸 수도 있을 터이다. 내 그림자를 누가 밟아도, 내 신발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그림자가 못 생겼다고 해도, 누가 내 귀가 보기 흉하게 길쭉하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터이다. 어쨌든, 그러나 나를 가끔 밝을 때나 빛이 있을 때면 졸졸 딸아다니고는 해서 편의상 '내' 그림자라고 붙인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림자와 내가 열띤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술할 작정이다.

각설하고 이제 대화와 그 당시 상황을 적어 본다. 그 당시 나는 녹음기를 들고 이를 녹음하지 않았음으로 지금 순전히 내 기억에 의해서 재구성된 것이고 하니 조금 착오가 있을 수도 있겠다. 혹시 내 그림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나 이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서 일부러 바꾼 것은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사실 나는 조금 비참한 상태였다. 일요일 오후, 누구도 집에 없었다. 전화를 걸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배는 고프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랬다. 심심했다. 그런데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실실 웃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림자의 표정을 잘 감별하지 못하지만, 이는 나중에 그림자가 내 모습이 우스워서 웃고 있었다고 말했음으로 알았다.) 나는 심심한 마음에 저 놈에게 말이나 걸어보자 라고 생각했다.

"이봐. 거기 안색이 어두운 양반. 자네도 심심한가?"

"어이. 안색이 어둡다고? 내 안색은 내 이빨만큼 하얗다고. 지금 어디서 시비를 거는 것이야?"

거의 즉각적으로 그가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봐. 당신 이빨도 검고 당신 안색도 검다, 이 말이야 나는."

그림자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었다. 나는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봐, 혹시 당신 그 여자 좋아하나?"

"누구 말이야?"

"시치미 때지 말라고. 어제 편지 쓸까 말까 고민하던 그 여자 말이야. 날씬하고 잘 웃는 여자."

"아니. 그림자면 그림자 답게, 그 여자 그림자나 신경쓸 것이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실로 나는 관심이 없어. 그 여자 뻔하지 뭐. 키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바라면서 살고 있을 구시대적 인간형임에 분명해. 이쁜 여자들은 다 그렇거든."

"아니. 왜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 당신은 그 여자 그림자에 관심 가진 적 없어? 없다고? 참 무심한 양반이네 그려. 나는 좀 내 세계가 넓을 뿐이라고. 관심을 갖는 것도 죄인가?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야 뭐야. 난 그냥 그림자들이 알고 있는 비법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는 솔깃했지만,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면 안된다는 것은 내가 13살때 내 첫사랑에 대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던 때의 아픈 기억으로 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녀와 사귀어 버렸다. 물론 비밀은 절대 지켰지만 말이다. 설마 내 그림자가 내가 짝사랑하는 그녀를 빼앗을 지는, 그럴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아마 안 될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배신당한 이야기는 고전이지만 자신의 그림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본 듯 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실상 내가 믿을 것은 묵묵히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내 그림자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도 그에게 그 '비법'을 바로 물어본다는 것은 조금 쑥쓰러웠고 나는 말을 돌려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척 했다. 아니 실상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림자라는 것은 나에게 조금 생소한 대화 상대이니까 말이다.

"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나인가?"

"아니.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있나? 내가 당신이라고? 그럼 당신은 나인가? 그럼 지금 우리는 미친 쇼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만약 자네가 혹은 내가 미쳤다고 해 보세. 그래도 결국은 두 명이 있지 않는가. 그 사람 머리속이라 해도. 만약 내가 자네이고 자네는 자네이면 자네를 지칭하는 것은 두 개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A는 B다. C도 B다. 그러나 A는 C가 아니다. 이런거 아닌가? 아닌가? 무엇 이상한가? 내가 말을 너무 빨리하는건가? 오해하지 말게. 내 친한 친구도 그의 그림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너무 화를 냈었네. 뭐라고? 잘못 말한거 아니냐고? 이런 사람아! 자네 역지사지를 해보게. 내 입장에서 자네를 '그림자' 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겠나? 자네는 눈과 잎술과 이빨이 다른 색이라서 '그림자'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은 왜 당신네 '그림자들'이 정하는 것이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그림자' 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아니 실상은 말일세. 자네들은 태양이 어디있던 간에 상관없이 똑같은 형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림자' 라고 말하는 것이야. 도대체 태양이나 광원에게 따르지 않은 존재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우리는 언제나 태양이나 광원을 생각하면서 우리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지 생각하네. 숭고한 임무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를 지켜야만 하고 말고. 자네 '그림자'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지만 말일세."

내 그림자는 흥분한 듯 보였다. 실상 모든 이에게 콤플렉스는 있는 법이지, 하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흥분한 이들에게는 진중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고의 무기인 법이다. 이 법은 언제나 들어맡기에, 그는 사과를 했다. 우리는 잠시 교통사고를 내서 고래고래 서로 욕을 하면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자기의 사돈인 이들처럼, 묵묵히 침을 삼키고 딴청을 피웠다.

(보편자, 실존자 논쟁. 그림자의 하소연. 등등으로 이끌어 나감.)



학부 2학년때 씀. 돌이켜보면, 가장 무엇이가를 쓰고 싶어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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