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림자군. 자네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그: 무엇을 말인가?
나: 그것 말이네. 그것.
그: 무엇. 무엇. 도대체 무엇!
나: 말이 통하지를 않는군. 답답하네. 답답해.
그: 자네도 어쩔 수 없군
나: ...
그: 이런 가을밤.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줄 아나?
나: 슬픈 것? 가장 슬픈 것? 그런 것을 도대체 왜 알아야 하나. 가장 슬픈 것을 알면. 이제 나머지 슬픔들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왜. 왜. '가장'이라는 빌어먹을 형용사를 여기저기 끌어다 쓰는 것이지? 강조하고 싶어서인가? 모든 것을 강조해 버리면, 모든 진한색으로 그림을 그려버리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이야!
그: 가을밤에 옷을 주어입는 여인의 뒷모습. 그 옷이 살갗에 스치는 소리. 그 등의 곡선. 그림자가 등뼈 주위로 흐르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나는 항상 슬퍼. 옷을 입는 뒷모습.
나: 뭐. 여인! 뒷모습? 무엇이란 말인가. 자네. 옷 따위는 찢어버리라지. 그림자따위가 옷에도 신경을 쓰는가. 하기는. 벗은 여인의 그림자는 보기 힘든 것이기는 하네. 그러나. 이는. 이따위는 중요한게 아니야. 사람은.. 사람은 말이야... 사람은..
그: 그림자는 한가지 색이 아니야. 석양과 같은 붉은 그림자도 있지. 붉으면서도 또 붉은게 아니야. 스러지는 거지.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 아릅답지 않나..
나: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이란.. 사람이란 말이야... 젠장. 나는 처음부터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뭐야. 그 표정은? 난 그런 것이 너무 싫어. 아니 자네 표현대로. '가장' 싫어. 진짜로. 무엇이야.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아. 아니. 정말로. 나는 그래.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제발 말이야. 사람이란.. 그래. 사람이란 말이야..
그: 사람? 사람? 인간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 투명한 비늘들이지. 자네의 눈에서 무엇인가 흘러. 물고기처럼 헐떡이면서. 그것의 이름이 무얼까. 어머니와 같은 맛이 나지. 첫사랑과 같은 향이고. 점점 흐르다가 흐르다가, 인간 안에서 무언가가 모두 빠져나가면 다시 인간은 살 수 있는 거지. 스스로를 죽이는 자는 분명 충분히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서일꺼야. 자살방지를 위해서는 코메디 대신, 진짜 비극을 보여줘야 한다고.
나; 자네. 정말 원하는게 무언가. 무엇이. 무엇을. 그렇게 원하기에 내 뒤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거지. 제발 이제 그만 해줘. 나는... 나는 말이야. 정말 지친다고. 정말이야. 이제. 그만해줘.. 부탁이야.
그; 나는 태어날때 부터. 아니. 바꿔 말하자면. 의식할 때 부터. 저 둥그런 태양으르 가지고 싶었어. 저것을 손에 쥐고. 으스러져라 쥐는 거지. 그래. 그냥 그거야. 태양을 그 물컹하고도 미끌미끌한 것을. 터지도록. 쥐고 싶었던 말이야. 그게. 그래. 그거야. 그것만이야.
나: 그런데. 도대체 왜 나야? 도대체 왜 나냐고? 태양을 원하면. 저 위로 가라고. 태양을 잡아 찢던 이를 터뜨려서 즙을 마시던. 나는 정말 상관하지 않아. 그리고 상관도 없고 말이야. 왜 언제나 내 발 밑에서. 그리고 눈을 감을때도 언제나 내 주위에 그렇게 있는거지? 제발..
그; 그때였어. 그래. 그때였을꺼야. 네가 눈을 찡그렸을 때.
나: 제발 가. 나는 도마뱀처럼 너를 잘라버릴꺼야. 네가 언제나 붙어있는 내 발뒤꿈치를 자르면 되나. 칼을 찾아야지. 칼을 찾아야 겠어. 너를 잘라내버릴꺼야. 너는 시들겠지. 너는 말라붙을꺼야. 너를 잘라내고 너를 찢어버릴꺼라고.
그: 시드는것은 누구일까. 네 발뒤꿈치에 왜 내가 항상 맴도는 줄 아나? 아킬레스도. 저 위대한 아킬레스도 말이야.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서 죽고 말았다고. 그런데 네가. 너. 그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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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학부 2학년때 쓴 것. 대사라는 것을 실험해보고 싶어했다. 소설들에서의 대사는 미묘하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화라는 것은 어쩌면, 둘이 마주보며 끊임없이 비껴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