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번에 그 여자에 대한 글을 꼬옥 써서 국문과 학우들과 그 밖의 이 게시판에 오셔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제 체력이 문제이거나, 혹은 제 글쓰기 방식이 기본적으로 뻗어나가기 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하이퍼 텍스트틱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_-a


뭐. 어쨌든. 그 여자는 수수하고 조금은 귀엽게 생기고 회사원 틱한 옷을 입은 여자였습니다. 회사에 가는 중이었다면 출근을 조금 늦게 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교대에서 2호선을 갈아타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제가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항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분명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추론하는 여러 근거들이 밝혀지겠지만) 종합운동장역에서 지하철을 탄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다가 말이지요. 그리고 목적지는 신도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리의 근거들은 글이 전개되면서 나타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와 제 옆의 그 신사가 그녀를 그렇게 멍하게 주목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그다지 부차적이지도 않은 이유로, 그녀의 가방과 그녀가 그 가방을 이용하는 방식의 의외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루이 뷔통 커다란 옆에 끼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 쪽에 세워두고 앉아있었습니다. 지하철 의자의 맨 오른쪽 가에 앉았기 때문에, 일종의 철봉 비슷한 칸막이와 그녀 사이에 그녀의 가방을 끼워서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잠깐, 여기서 제가 예전에 가방에 대해 고찰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상기해 보았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인간을 설명해 줄 수 있고, 나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방의 의식 혹은 표면적 욕구는 무엇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제 가장 친한 가방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했다' 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조금 오래되서 본래의 색 보다 칙칙해진 life guard 배낭용 가방이었는데.


"이봐. 당연히 우리들은 무언가를 항상 '담고' 싶어해. 이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예전부터. 나는 항상 무언가를 '담고' 싶어했지. 왜 그랬는지는 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는 있겠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건 후의 합리화일 뿐이지. 그저 그래. 담고 싶어."


이러한 가방의 '담고자 하는 욕구' 에 대해 어떤 이는 이것이 존재의 허무감을 만족시키려는 본질적 의지라고 설명하기도 하였고, 누구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무언가 '담는다' 라는 것은 곧 무언가를 '소비한다'와 연관 시켜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사회에 의해 세뇌된 의식일 뿐이다. 그저 가방 자체로 존재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저러한 논의들에 대해서 가방에게 묻자, 가방은 어의없다는 듯이 위의 발언을 했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수록, 가방의 표면적 의식을 살며시 드러내서 그 무의식적 욕구를 살펴보면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가방이 무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 입니다. 가방의 보다 본질적인- 그러나 가방군은 이를 회피하는 듯이 보였던- 욕구는 바로 무언가를 '꺼내려는' 욕구입니다.


즉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에 만큼, 2차적인 욕구입니다. 그럼에도 가방군은 '담고자' 하는 욕구가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임을 주장했고, 무언가를 '꺼낸다' 라는 말은 마치 신성 부정의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데,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와 일견 보기에 정반대의 욕구로 보입니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과 갈등이 가방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신성하게 하고 이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한데. 이분들의 IQ를 모두 곱할수록 0에 수렴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를 사람의 '먹는 욕구'와 '싸는 욕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가방의 본질적 욕구를 그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의 모순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알아차렸겠지만 말입니다. 즉 '의식적-담고자하는 욕구'와 '무의식적-꺼내고자 하는 욕구'의 종합은 무언가를 필요할 때 까지 A에서 B로 운반하기 위한 욕구입니다. 즉 A에서 담은 다음에 B에서 꺼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일종의 운반체라는 것이 가방 존재이고 또한 본질입니다. 샤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듯이, 이는 모둔 존재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일종의 운반체 입니다. 무엇을 운반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 운반에 대해서 고찰을 해야 합니다.


다시 가방군의 상징으로 돌아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정말 오래된 유래를 가진 것이고, 여러 상징들과 신화에 되풀이 되며 쓰여집니다. 그 중 대표적이면서 신비주의 집단에서 오랫동안 집착해 온 '바보의 상징'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존재가 무엇을 담지해야 되는가는 일견 명백해 보입니다.


바보라는 것은 신비주의 상징에 있어 '입문자'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입문이란 신비에로의 입문이고 그럼으로 즉 진리에로의 입문이며, 빛, 선, 천국, 그리고 나아가 신으로의 입문입니다. 신으로의 입문. 이것이 모든 존재의 움직이는 방향이고 모든 존재의 운동성은 이리로 향합니다. 이를 구체적 상징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보의 상징은 한 바보가 괴나리 봇짐을 지고 광대복을 입고 개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고도의 상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우선적으로 광대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광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왕을 웃겨야 살고, 왕을 화내게 하면 죽습니다. 왕을 웃기는 것은 왕 그 자신의 희화화로써 합니다. 유머와 웃음의 매커니즘은 긴장의 해소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자기 비하와 그의 극복에서 제일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왕의 광대는 왕을 끊임없이 희화화합니다. 이것이 도가 지나치면 광대는 죽는 것이요, 미진하다면 왕은 웃지 않게 되어 또한 광대는 죽는 것입니다. 즉 중용이 중요합니다.


중용 자체의 의미도 물론 -여러 동양의 스승들이 강조하셨지만- 중요합니다. 진리로 신으로 향하는 자들은 당연히 중용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상징은 왕과 광대 자신과의 관계 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세속을 상징하고, 뭍 대중들의 욕망을 집결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입문자는 세속에서 너무 멀어지거나 욕망을 회피하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거기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진리는 세상 밖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 안의 인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는 그 절묘한 경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대의 상징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에게 물어뜯기는 것도 이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개라는 것은 짐승이요, 무엇보다도 인간의 짐승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게 물어뜯기면서 광대는 길을 재촉하고 있음은 아까의 광대의 상징과 유사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개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물어뜯게 놓아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상징인 괴나리 봇짐 상징이 남았습니다. 물론 이는 '길'을 떠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인류적 차원의 상징으로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길이라기보다는 인생 과정 특히 진리로 향한 빛으로 향한 신으로 향한 길을 의미합니다.


괴나리 봇짐은 기다란 나무 막대 한쪽에 보따리를 동여맨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막대기는 -> 1 보따리는 -> 0 을 의미합니다. 유한과 무한. 진리와 거짓.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되풀이 되지만. 1이라는 막대기에 0이라는 보따리가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나 빛이나 신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보에게 필요한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보따리이고, 막대기는 보따리를 보다 잘 동여매기 위해서. 즉 보따리에 더 잘 접근하고 이를 간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위 세 차원의 상징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진리와 신으로 향하는 길은 세상과 거짓이 아무리 추악하고 입문자를 괴롭히더라도 (개의 상징이 물어뜯고 있지요) 그곳으로 부터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세상에 물자체로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이것에 떠나서 진리나 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을 육에 유배된 것으로 파악하더라도 육이라는 것은 감옥이오 속죄의 장소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으음....... 그래요. 그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루이 뷔통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제가 그 여자가 그 가방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 했습니까? 안 했다고요?


오오... 이제 부터가 본론인데.. 역시 힘들군요.. 저번에 쓴다고 했던 리쾨르 서평도 쓰지 않았고 말입니다.... 힘듭니다. 그럼 또 다음에 이어 쓰면 되지요. 그 여자. 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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